[책&생각] 다른 세상을 살다 오게 해주는 이야기의 힘

한겨레 2022. 5. 27.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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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동안 무엇이든 원하는 대로 하게 해주는 요술 방망이가 생긴다면 사람들은 무얼 할까.

나는 돌아가신 아버지를 불러낼 것이다.

반항심과 인정욕구에 휩싸인 고등학생 딸에게 불평과 원망의 말만 듣다 떠나신 아버지와 마주 앉아 식사를 할 것이다.

세상을 떠난 아버지를 다시 만나 돌보고, 이야기를 나누고, 아버지와 팀을 이루어 유쾌하고 새로운 만남의 장에 발을 들여놓는 이 발랄한 서사를 따라가는 시간은 대리만족의 달콤함을 만끽하는 작은 축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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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아은의 책들 사이로]정아은의 책들 사이로

브로콜리 펀치
이유리 지음 l 문학과지성사(2021)

하루 동안 무엇이든 원하는 대로 하게 해주는 요술 방망이가 생긴다면 사람들은 무얼 할까. 나는 돌아가신 아버지를 불러낼 것이다. 반항심과 인정욕구에 휩싸인 고등학생 딸에게 불평과 원망의 말만 듣다 떠나신 아버지와 마주 앉아 식사를 할 것이다. 풍성하게 차려진 식탁에 앉아 천천히 음식 맛을 음미하고, 맛에 대한 소회를 나누고, 그리고 말씀드릴 것이다. 쉰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니 이제야 내 지난날의 어리석음을 볼 수 있게 되었다고. 아버지를 모순을 가진 한 명의 복합적인 인간으로 연민하며 공감할 만한 지성과 여유가 그때의 내게는 없었다고. 그렇게 딸에게는 용서를 구할 기회가, 아버지에게는 용서받지 못해 괴로워하는 딸을 용서할 기회가 생길 것이다. 단 하루라 해도 좋다. 마주 보고 마음을 전할 기회를 얻을 수 있다면, 그 순간의 기억으로 남은 평생을 지탱할 수 있으리라.

많은 이들에게, 가까웠던 이들과의 사별은 극심한 슬픔일 것이다. 강도의 범위나 유효 기간이 정해져 있지 않은 슬픔. 잊을 만하면 그 어느 때보다 낯선 모습으로 강력하게 닥쳐오는 슬픔. 내 존재의 많은 부분의 원천이지만 이제는 만날 수 없게 된 이들의 존재를 통해 우리는 죽음을, 그와 연계된 삶을 처절하게 감각하며 살아간다.

이유리의 소설집 <브로콜리 펀치>의 수록작인 ‘빨간 열매’는 아버지와 사별한 딸이 아버지와 다시 만나는 이야기다. 화자인 딸은 “빼빼 마른 나무 한 그루”로 소생한 아버지에게 물을 주고, 잎을 따주고, 볕을 쏘여준다. 어느 날 답답해하는 아버지의 요청을 받은 화자는 화분을 손수레에 싣고 밖으로 나가고, 공원에서 자신처럼 화분을 끌고 나온 한 남자와 마주친다. 남자가 앉은 벤치에 놓인 화분 속 식물은 알고 보니 남자의 돌아가신 어머니였고, 식물이 된 남자의 어머니와 화자의 아버지, 그리고 그 남자와 화자는 그날 이후 급속도로 가까워진다.

비를 쫄딱 맞은 아버지가 “더욱 푸르러져서 잎들이 마치 얇은 에메랄드 조각처럼 반짝반짝 빛나곤 했다”거나, “별로 우습지도 않은 농담을 했는데 아버지가 줄기를 꼬부리고 껄껄 웃었다”와 같은 반짝이는 문장으로 채워진 소설은 구체적인 설정과 성실한 묘사로 현실에 일어날 가능성이 조금도 없는 사건에 독자가 자연스럽게 몰입해 믿고 따라가게 만든다.

확연한 거짓말임에도 진짜 있는 일처럼 들리는 이 기발한 상상의 서사에서 혹자는 세련되게 응축해 새겨넣은 문학적인 상징을, 혹자는 삶과 죽음에 대한 통찰을 발견하고 감응할 것이다. 아버지를 잃은 이후로 접하는 모든 현상을 아버지의 부재라는 틀에 넣고 바라보게 된 나 같은 독자에게는, 무엇보다도 ‘카타르시스’로 다가왔다. 세상을 떠난 아버지를 다시 만나 돌보고, 이야기를 나누고, 아버지와 팀을 이루어 유쾌하고 새로운 만남의 장에 발을 들여놓는 이 발랄한 서사를 따라가는 시간은 대리만족의 달콤함을 만끽하는 작은 축제였다. 그러니 내게 이 소설은 ‘소설’이 담당해온 가장 전통적인 역할을 해낸 작품으로 남으리라. 잠깐이나마 나를 잊고 다른 세상을 살다 오게 해주는 강력한 ‘이야기’로서의 힘을 유감없이 발휘한 작품으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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