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작가와 독자 사이..'즐거운 대화' 30년

한겨레 입력 2022. 5. 27. 05:06 수정 2022. 5. 27.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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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Book] 번역가를 찾아서]번역가를 찾아서-민승남 번역가
'유영 번역상' 수상 민승남 번역가
106권 출간한 "한결같은 시간"
편집·번역 동료들 든든한 아군
"이 즐거운 대화 오래 함께하고파"

취미를 직업으로 삼아 30여 년 즐겁게 일한데다 지난해엔 영문학 번역계 최고의 영예인 ‘유영 번역상’을 수상해 커리어에 정점을 찍었으니, 민승남 번역가는 축복 받은 ‘덕후’요, 원조 ‘성덕’(성공한 덕후)인 셈이다. 그의 ‘라떼는~’(나 때에는)은 국내 영문학 번역계의 생생한 역사다.

“1990년대 초에는 전업 번역가라는 개념이 없어서, 처음엔 아르바이트쯤으로 생각했어요. 대학(서울대 영문학과)을 졸업하고 광고회사에 입사했는데 적성에 맞질 않았죠. 2년 만에 그만두고 우연히 번역을 하나 맡았는데, 너무 재미있고 열정이 생기는 거예요. 책 읽는 게 인생의 낙이던 사람이 종일 책만 보게 됐으니 날 새는 줄 모르고 일했죠. 그러다 2002년 유진 오닐의 <밤으로의 긴 여로>(민음사, 2002)를 번역하면서 이름도 조금 알리게 됐어요.”

그렇게 30여 년간 106권을 출간하며, 그의 삶은 “어두운 무대 한구석에 구부정하니 앉아서 목을 길게 빼고 흐릿한 조명에 의지해 텍스트를 들여다보고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며 한결같은 시간을 보내는 것”(제15회 유영 번역상 수상소감 중)이었다. 그러나 그가 앉은 무대가 결코 고요하지는 않았는데, 예를 들면 민승남 번역가는 애니 프루의 <시핑 뉴스>를 10년 주기로 세 번 출간했는데, 매번 새롭게 번역해야 했다.

“첫 출간 때는 인터넷이 없었으니 도서관에 가서 자료를 찾아가며 번역했어요. 그런데 2011년(미디어2.0)에 다시 내려니 부족한 부분이 여기저기 보이는 거예요. 인터넷에 이미지 자료가 많이 있으니까 실물을 확인하기도 하고 공부도 좀 더 해서 대대적으로 손질해야겠다 싶었죠. 2021년(문학동네)에 낼 때는 문장을 고쳐 썼어요. 예전에는 의역을 많이 하더라도 최대한 우리말로 매끄럽게 표현하는 게 관건이었는데, 독자들이 영어식 표현에 익숙해지면서 다소 어색하더라도 원문을 최대한 살려 쓰는 식으로 번역 트렌드가 바뀌었거든요.”

이처럼 역동적인 그의 무대는 또한 늘 인파로 북적였다. 그가 30여 년간 변화하는 번역 트렌드에 발맞출 수 있었던 데는 “능력 있고 감각 있는 출판 편집자들”의 몫이 컸다. 여기에 선·후배, 동료 번역가들은 누구보다 든든한 아군이 되어주었다.

“번역하는 법을 배운 적도 배울 수도 없었으니 나름대로 방법을 터득해야 했죠. 제가 처음 옮기는 책이 아닌 경우엔, 국내에서 먼저 출간된 그 책의 모든 번역서를 다 찾아서 읽어봐요. 제일 좋은 참고서니까요. 번역을 하다가 아무리 애를 써도 답이 없을 땐 후배 번역가들을 믿어요. 나보다 실력 있는 분이 나중에 더 좋은 번역을 해주려니 하는 거죠(웃음). 단, 제가 번역한 책은 다시 안 봐요. 일하면서 여덟, 아홉 번을 문장 하나하나 뜯어보고 나면, 아무리 좋은 작품이라도 좀 질리거든요(웃음).”

지난해 그는 폴 오스터의 <낯선 사람에게 말 걸기>(열린책들)를 옮기면서 선배 번역가들과 특별한 협업을 했다. 베스트셀러 소설가인 폴 오스터는 에세이스트이자 시인, 시나리오 작가이며 심지어 번역가이기도 하다. 그의 산문집 <낯선 사람에게 말 걸기>는 국내에서 손꼽히는 번역가인 김석희·이종인·황보석 번역가가 펴낸 ‘뉴욕 3부작’에 수록된 글에 더해, 25편의 새 글을 민승남 번역가가 처음 옮겨 엮은 책이다. 당대 최고의 번역가들과 시차를 두고 협업하면서, 민승남 번역가는 “좋은 번역에 함께한다는 기쁨과 잘해야 한다는 부담을 동시에 느꼈다”고 한다.

민승남 번역가의 무대에선 관객이 보이지 않는다. 독자들은 저 너머 어딘가에서 작가와의 만남을 고대하며 그의 전언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폴 오스터는 소설을 통해 본인은 한 번도 본 적 없고 영원히 아는 사이가 되지 못할 사람들과 대화를 나눠왔고 평생 그렇게 살고 싶다고 했어요. 독서가 작가와 독자의 내밀한 정신적 대화라는 얘기겠죠. 번역가는 이 특별한 대화의 적극적인 참여자이자, 원활한 소통을 돕는 전달자인 셈이에요. 폴 오스터가 그렇듯 저도 이 대화에 오래도록 함께하고 싶어요.”

글·사진 이미경 자유기고가 nanazaraza@gmail.com

민승남 번역가, 이런 책을 옮겼어요

<낯선 사람에게 말 걸기> 폴 오스터 지음, 열린책들(2022)

소설가, 시인, 시나리오 작가이자 비평가인 폴 오스터의 산문집. 이전에 열린책들이 펴낸 ‘뉴욕 3부작’에, 이후 발표된 25편의 글을 더해 엮은 이 책은 “오스터의 팬들에겐 선물과도 같다.” 내로라하는 여러 번역가들이 공들인 결과물이 한 권에 담긴 것도 매력.

<기러기> 메리 올리버 지음, 마음산책(2021)

자연과 함께하는 소박한 삶의 기쁨을 노래한 메리 올리버의 시선집. 작가 쪽이 언어별로 한 명의 번역가만 허용하고 있어, 민승남 번역가는 이 작가의 작품을 독점 번역해왔다. “자연이 주는 황홀한 기쁨을 노래한 아름다운 시가 상처받은 마음을 위무해준다”고.

<시핑 뉴스> 애니 프루 지음, 문학동네(2019)

“아름답고 시적인 문장으로 가득한” 이 소설은 삶에 속고 사람에 지친 한 남자가 조상들의 고향인 캐나다 뉴펀들랜드로 돌아가 자신의 진정한 가치를 찾아가는 과정을 그렸다. “팍팍한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는 작품”이다.

<밤으로의 긴 여로> 유진 오닐 지음, 민음사(2002)

미국의 극작가 유진 오닐의 대표작이며, 아일랜드 출신 미국 이민자 가정의 상처와 고통, 화해를 담았다. 민승남 번역가는 “사랑하기에 때로 가장 치명적인 상처가 되는 가족 이야기가 시대를 뛰어넘어 공감과 울림을 준다”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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