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해원의 말글 탐험] [168] ‘팩트’가 ‘사실’을 이기는 나라

양해원 글지기 대표 2022. 5. 27.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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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어디를 가도 한국에서 왔다고 자랑하자. 이게 나라의 명함이요 국위 선양이지. 같은 시대에 살아서 고맙고 행복합니다. 위인전에 오를 인물, 역사를 새로 썼네. 경기 끝나고 잠을 못 잤다. 왜 울컥하지 내가….

손흥민이 기어코 해냈다. 세계 최고 축구 무대 득점왕이라니. 어떤 찬사도 아깝잖은 까닭이 저 댓글 속에 있다. ‘대한민국 선수라서, 대한민국 사람이라서.’ 온 국민 벅차게 해줬으니 마땅한 대접인데. 운동이든 예술이든, 우리 것 떠받드는 마음이 언어생활에서만은 어째 심드렁하다.

엉뚱하고 거북하거나 못된 짓 하는 사람을 서울 지하철에서 자주 본다는 기사가 있었다. ‘1호선은 어쩌다 빌런(괴짜 악당)의 성지가 됐을까.’ 왜 영어를 앞세웠을까. 괄호 붙인 대로 괴짜일 수도, 악당일 수도 있음을 한마디로 드러낼 수 있으니 우리말은 좀 비켜라? ‘빌런(villain)’에 ‘악당(악인)’ 말고 다른 뜻도 없구먼.

말 많은 장관 후보 신상에 대통령이 당선인 시절 말했다. “부정(不正)의 팩트가 확실히 있어야 하지 않나.” 신문도 ‘사실(실상)’ 이상의 뜻이 없는 ‘팩트(fact)’를 즐겨 쓴다. ‘팩트 체크’라는 해설란 간판을 ‘사실은…’ 식으로 달면 어느 쪽이 쉽게 읽힐지 궁금하다.

요즘 유명한 사람은 많아도 ‘유명인’은 씨가 말랐다. ‘셀럽(celeb)’이라는 영어가 판치는 탓이다. 더 어려운 ‘셀레브리티(celebrity)’를 줄여 쓰니 그나마 다행이려나. 그렇다면 ‘명사(名士)’라는 2음절 낱말도 있건만.

‘설루션(solution)’ 대신 ‘해법(해결책)’ 고집했다간 꼰대 되기 십상. ‘태도(자세)’가 아무리 좋은들 ‘스탠스(stance)’만 할까. ‘젠더(gender)’ 대신 ‘성(性)’이나 ‘성별’이라 쓰는 걸 보기 어렵다. 어느 ‘미사여구’나 ‘수사(修辭)’가 ‘레토릭(rhetoric)’을 이기랴. 대체 뭘 보듬어야 할지 어리둥절하다.

손흥민 우러르는 그 눈길처럼, 우리말 씀씀이도 그랬으면 좋겠다. 대기석에만 앉아 있는 손흥민을 상상할 수 있는가. 우리말은 지금 벤치 신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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