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난장]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불안

국제신문 2022. 5. 27.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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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데믹·전쟁 등 이슈에 현대인들 불안감 증폭
통제하려 애쓰기 보다 수용하려는 자세 필요

사방이 불안이다. 현대인의 열 명 중 한 명꼴로 불안장애 진단을 받고, 우리가 하는 모든 생각의 삼분의 이는 부정적인 생각과 걱정이다. 심지어 걱정할 게 없는 평화모드조차, 언젠가 이 평화가 깨지지 않을까 불안해하는 분도 계시다. 가수가 본무대에서 실수하지 않게 미리 리허설을 하는 것처럼 걱정이란 불안에 대처하는 정신적인 리허설이다. 불안에 잠식당하면 걱정이란 리허설만 반복하다 좋은 시절 다 지나가 버린다.

최근에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불안이 악화된 분들을 만난다. 비극적인 현실이지만 사실 우리와 직접적인 연관은 없는데 왜 그토록 불안할까? 이유를 물었다. “핵을 쏠까 불안해요? 3차 세계대전이 일어날까 봐?” 다들 그건 아니라고, 불안한 이유를 모르겠다고 답한다. 그들과 깊은 대화를 나누고서야 불안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한 가지 공통점은, 그들 모두가 절대로 러시아의 침공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 믿고 있었다는 점이다. 지구 한 귀퉁이의 국지전도 아니고, 21세기 세계화 시대에 대놓고 침공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거라는 믿음이 깨진 것이다.

그들은 저마다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어떤 믿음을 갖고 있었다. ‘실직할 일은 절대로 없어’ ‘가족이 사망할 일은 절대로 없어’ ‘연인과 헤어질 일은 절대로 없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뜬금없이 단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던 각자의 절대적인 믿음을 송두리째 뒤흔들었다. 확신의 강에 날아든 돌멩이 하나가 불안의 파문으로 마음에 번진 것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쩌면 불안을 중심으로 건축된 게 아닐까. 당장 저녁 퇴근길에 내가 탄 차가 사고가 나지 않는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한 치 앞을 모르는 게 우리의 삶이다. 성수대교를 건너던 사람은 곧 무너질 걸 알았을까? 삼풍백화점에서 쇼핑하던 사람은 몇 분 후 건물이 무너질 걸 상상이나 했을까?

우리가 믿는 세상은 언제든 찢어질 수 있는 그물망에 가깝지 않을까. 평범한 일상적 대화가 돌연 위험한 것으로 탈바꿈해서 다시는 원상회복할 수 없는 외상을 남긴 경험이 있을 것이다. 찢어지기 쉬운 그물망으로서의 현실은, 밀란 쿤데라의 소설 ‘농담’에서 농담 한마디가 야기한 엄청난 현실이고, 정신분석학이 통상적으로 말하는 일상의 현실적 이미지이다. 안타까운 사연이 생각난다. 경제적인 형편이 어려워 가족 여행을 꿈꾸기만 했던 분이, 난생처음으로 제주도 가족여행을 계획하고 들떠 있었다. 출발 당일, 아파트를 나서다가 그의 모친이 그만 하늘에서 날아온 물체에 머리를 맞고 쓰러졌다. 고층에 사는 아이가 놀다가 무심코 창밖으로 던진 장난감이 가속도가 붙어 하필이면 머리를 강타한 것이다. 뇌출혈, 행복한 순간이 가장 비극적인 순간이 돼버렸다.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 절대로가 산산조각 난 것이다.

현대인을 불안하게 만드는 일차적인 원인은 불안한 사회 때문일 것이다. 재난과 팬데믹, 범죄와 같은 크고 작은 이슈가 끊이지 않고 고용불안이나 신체 질환 같은, 우리가 일상에서 ‘아, 이 정도면 불안해할 만해’ 하는 일이 너무나 많다. 이때 사람들은 ‘절대적인 믿음’이란 환상을 품는다. 절대로 일어나지 않아야 우리는 팍팍하고 불안한 세상을 건널 수 있다. 문제는, 살면서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 일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럴 때 불안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원래 불안이란 감정은 위험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주는 소중한 신호인데, 지나치면 나를 상당히 불편하게 만드는 까칠한 친구다.

불안을 대하는 좋은 자세는, 불안을 불안해하지 않는 것이다. 어린아이가 더 놀겠다고 떼쓸 때 억지로 자게 하면 오히려 말똥말똥해진다. 그럴 때는 모른 체하고 자는 시늉을 하면 아이가 보채다가 어느 순간 잠들어버린다. 불안을 적으로 간주해서 싸우지 말고, 불안을 아이처럼 다룰 필요가 있다. 즉각적으로 통제하려 애쓰는 것보다 그냥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수용할 때 오히려 불안이 줄어든다. 불안이 강속구처럼 훅 들어오면 나를 통과하게 가만히 내버려 두고 현재 상황을 묵묵히 바라보는 것이다. ‘나의 삶’이란 영화의 주인공에서 잠시 물러나, 관객의 입장에서 내 마음이 뭐라 얘기하나 물끄러미 지켜만 보는 자세.


일상에서 불안을 줄이는 삶의 내용을 늘려나가는 게 필요하다. 우리의 뇌가 지금은 전쟁이 아닌 평화모드라 인식해야 불안이 줄어든다. 말로만 평화라고 떠드는 건 효과가 없고, 실제 평화로울 때 하는 행동을 늘려야 한다. 좋은 사람들과 만나서 수다 떨고, 자연과 교감할 수 있는 산책이나 운동이 도움이 되며 영화나 음악, 그림 감상처럼 문화와 예술 콘텐츠에 공감할 때 불안이 감소한다. 무엇보다 우리 삶은 원래 불안하다는 걸 담담히 받아들이고 불안하건 않건 지금 이 순간을 소중하게 여기면서 불안과 더불어 사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

권명환 해동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진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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