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 프리즘] 230년 만에 부활한 美 제조업 보고서

이심기 2022. 5. 27. 0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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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新산업전략 수립에 올인
산업 정책과 안보 전략은 한묶음
정부, 국익 위해 기업지원 나서야"
이심기 부국장 겸 B&M 에디터

지난달 20일 미국 뉴욕경제클럽에서 브라이언 디스 백악관 국가경제위원회(NEC) 위원장이 한 연설은 미국의 지향점이 어딘지를 단적으로 보여줬다. 핵심은 산업정책의 부활이다. 그는 1791년 알렉산더 해밀턴 미국 초대 재무장관이 작성한 ‘제조업 보고서’를 언급하며 연설을 시작했다. 이 보고서의 결론은 강력한 산업 시스템을 확립하는 것이야말로 국가의 기틀을 잡기 위한 조건이라는 것이다.

미국 대통령의 경제 자문역을 맡은 NEC 위원장이 월가의 투자자 앞에서 200년이 넘게 지난 보고서를 꺼내 든 이유는 뭘까. 지난 반세기 동안 월가는 산업정책이라는 용어 자체를 혐오했다. 자유 경쟁을 통한 ‘승자 선택’을 철칙으로 여기는 월가에서 산업정책은 정부 개입과 시장 왜곡, 비효율과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디스 위원장은 “이제 미국 경제는 변했고, 세계도 바뀌었다”며 월가의 시각 교정을 요구했다. 그는 산업정책 대신 ‘신(新)산업전략’이라는 세련된 용어로 포장했지만, 내용은 230년 전 보고서와 다를 바 없다.

과연 무엇이 미국의 현재를 건국 초기로 돌렸을까. 그 이유는 지난주 한국을 찾은 존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행보에서 드러났다. 그는 첫 행선지로 삼성전자 평택 반도체공장을 선택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한국 반도체의 심장’이라고 말한 곳에서 삼성전자는 3나노미터(㎚·10억분의 1m) 공정의 반도체 웨이퍼를 보여줬다. 미국의 제2 파운드리 공장에서 똑같은 제품을 생산할 것이라고 약속한 셈이다. 바이든 대통령에게 한국의 반도체는 미국 산업 생태계를 지키는 핵심 인프라가 됐다.

한 경제계 인사는 “이제 삼성전자는 ‘인계철선(trip wire)’과 같은 존재가 됐다”고 말했다. 인계철선은 한반도에서 위기 상황이 발생할 경우 미군이 자동 개입할 수 있는 역할을 뜻하는 군사용어다. 과거 주한미군 제2보병사단이 맡았다. “지금은 미사일이 아니라 반도체로 전쟁하는 시대라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줬다”는 얘기다.

한국과 비슷한 지정학적 리스크에 놓인 대만도 마찬가지다. 대만 국민은 세계 1위 파운드리 업체 TSMC를 ‘호국신산(護國神山)’이라고 부른다. ‘나라를 지키는 신령스러운 산’이라는 뜻이다. 연초에 나온 미국 싱크탱크의 전략보고서도 TSMC가 중국의 침공을 막는 ‘전략자산’ 역할을 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최근 불거진 글로벌 공급망 전쟁은 각국의 기업과 안보를 떼놓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최근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삼성전자와 비공식적으로 접촉했다고 한다. 반도체 사이클 변동이 외환시장에 미치는 영향이 어느 정도인지 직접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반도체는 한국 수출액의 20% 안팎을 차지한다. 외환당국으로선 환율 리스크 관리를 위해 반도체 경기 변동에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다.

미국뿐만 아니라 일본, 중국, 유럽연합(EU) 등 모든 주요국은 산업 전략을 다시 짜고 있다. 이미 세계무역기구(WTO)는 무력화됐고, 어떤 국가도 특정 산업과 기업에 보조금을 몰아줬다고 시비조차 걸지 않는다.

이제 우리 기업들은 새로 출범한 정부의 산업 전략이 무엇인지 묻고 있다. 윤 대통령은 취임 일성으로 “민간이 창의와 혁신을 바탕으로 경제 성장을 주도해 나갈 수 있도록 뒷받침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기업들은 구체적인 수단과 방법을 묻고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재임 당시 미 2사단의 주둔에 대해 “남의 나라 군대를 왜 인계철선으로 써야 하느냐. 염치가 없지 않으냐”고 반문했다. 하물며 글로벌 경제 전쟁의 최일선에 나가 있는 우리 기업들에 필요한 무기가 무엇인지는 정부도 알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미국 제조업 보고서는 “전(全) 산업의 생산 총량을 늘리는 것은 궁극적으로 우리 모두에게 유익하다”고 결론 맺었다. 한국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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