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석] 지휘 거장 쿠르트 마주어 뒤엔 그녀가 있었다
지휘·연주자 소속된 아라벨라 아츠 CEO
뉴욕 필 등 거치며 베테랑 매니저로 성장
지휘자 마주어 타계 전까지 25년간 동행
지금은 그라치니테 틸라·도이처 등 뒷받침
루마니아 출신.. 5개국 언어 구사하며 소통
"매니저 전에 굿리스너.. 음악가 앞길 비출것"
뉴욕 매디슨가에 위치한 아라벨라 아츠(Arabella Arts)는 뉴욕 필하모닉, IMG 아티스트, 콜롬비아 아티스트 매니지먼트를 거친 베테랑 매니저 스테파나 아틀라스가 사만다 스컬리와 함께 설립한 회사이다. 아틀라스는 뉴욕 필과 프랑스 내셔널 오케스트라 음악감독을 맡았던 지휘자 쿠르트 마주어(1927~2015)가 타계하기 전까지, 25년간 그의 곁을 지켜온 유명 아티스트 매니저이기도 하다.
회사에는 현재 지휘자 26명, 악기연주자 13명, 작곡가 1명 총 38명의 아티스트가 소속되어 있다. 우리에게 친숙한 아티스트들도 있는데, 2017-2020년까지 서울시향의 음악감독을 맡은 티에리 피셔(1957~)와 작년에 KBS교향악단을 지휘한 사샤 괴첼(1970~)이다.
필자가 뉴욕 필에서 일했던 시절, 그녀와 함께 했다. 그녀의 귀에는 반짝이는 커다란 귀걸이가 항상 달려 있었다. 무대 뒤를 분주하게 뛰어다니는 직업임에도 불구하고 항상 하이힐을 신고 다녔다. 무대 앞에서는 연주자들에게 힘찬 격려를, 무대 뒤에선 스텝들에게 해피 바이러스를 전파하는 강철 체력의 소유자였다. 다음은 뉴욕의 봄기운을 전해 준 그녀와의 활기찬 일문일답.
-전공이 시각예술이라고 들었다. 어떻게 음악계에 발을 들이게 됐나.
"일자리를 찾으며 '뉴욕타임스'를 보고 있는데 '독일어에 능숙하며 오랜 시간 동안 예술단체에서 일할 수 있는 사람'을 찾는 구인광고를 보았다. 우체통에 무작정 원서를 넣었다. 내 전공이 시각예술이니 당연히 예술단체가 박물관이나 미술관이겠거니 하고 추측했다. 그게 뉴욕 필일줄은 꿈에도 몰랐다(웃음).
-뉴역 필인걸 알고는 어떻게 반응했나.
"한참 지난 어느 날 전화 한 통이 걸려왔는데 뉴욕 필이었다. 마침 공연을 보러 가려던 날이라 예약확인 전화인 줄 알고 "티켓 있으니 걱정 마세요"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런데 다시 전화가 오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그게 아니라, 일자리 구한다고 원서 넣으셨잖아요"라고 말했다. 내가 얼마나 놀랐을지는 충분히 짐작하리라 생각한다.
◇인생과 예술의 스승 마주어로부터
-그렇게 23세에 쿠르트 마주어와의 인연이 시작됐다.
"그는 나에게 정말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고, 나 역시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 최선을 다했던 날들이었다. 공연계 경험이 전무했던지라 리허설과 공연 체계, 계약서 협상, 홍보, 노조 등 배워야 할 게 많았다. 당시 뉴욕 필 대표였던 데보라 보르다(1949~)가 많이 도와줬다. 뉴욕 필이 최고의 팀워크를 자랑하던 시기였다.
-마주어의 뉴욕 필 임기가 끝날 무렵에 그의 회사 '마주어 뮤직 인터내셔널(Masur Music International)'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근무 첫날, 그가 나에게 '눈을 활짝 열어 모든 것을 주시해라(Keep your eyes wide open, put everything in!)라고 말한 것을 기억한다.
-그렇게 마주어가 타계하기 전까지 20여 년을 함께 일했다.
"출근 첫날은 정말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그날은 카네기홀에서 공연이 있었다. 마주어가 리허설 시간에 가까스로 도착해 모두 걱정하고 있었고, 그가 너무 걱정스러운 얼굴로 공연장에 들어와 무슨 일이냐고 물었는데, 대답이 충격적이었다. 키우고 있는 오리가 새끼를 낳기 직전이었는데, 리허설에 와야만 해 태어나는 걸 보지 못한 채 왔다며 속상해했다. 새끼 오리가 소독약이 뿌려진 수영장에 빠지지 않도록 그의 집에 가야만 했다. 정말 웃기지 않은가. 출근 첫날에 새끼 오리를 돌보다니!
-그와 함께 일하는 동안 감동적인 순간도 많았을 테다.
"한 번은 바이올리니스트 장영주와 루마니아 투어를 하고 있을 때였다. 우리는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TV를 통해 비행기가 세계무역센터(WTC) 쌍둥이 빌딩을 향해 날아가 부딪히는 끔찍한 순간을 목격했다. 무거운 마음으로 투어를 마치고 뉴욕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브람스 '독일 레퀴엠'을 지휘하며 관객에게 박수를 치지 말라고 부탁했다. 나 역시 공연을 통해 많은 위로를 받았고, 이런 순간들이 23년간 무수히 많았으니 추억을 일일이 말하려면 며칠 밤샘도 모자랄 것 같다.
-마주어는 모든 분야에 반짝이는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그는 아르헨티나로 연주 여행을 가면 반드시 탱고를 브라질에 가면 삼바를 봐야 했다. 재즈에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트럼피터 윈턴 마샬리스(1961~)에게 재즈곡을 작곡하라고 동기 부여를 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이후 마주어와 윈튼 마샬리스는 함께 많은 공연을 했다. 특히 마샬리스의 '올 라이스'(All Rise) 앨범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을 겪은 전형적인 독일 사람이어서 매우 정직했다. 무엇보다 자신보다 음악을 더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당신의 의견을 존중해 주는 편이었나.
"서로 깊은 신뢰감이 있었다. 내 의견을 많이 존중해 준 덕분에 나 역시 그가 음악에만 몰두하도록 그 밖의 정보들을 준비해 줄 수 있었다.
◇매니저로서의 자세와 덕목
-뉴욕 필, 프랑스 내셔널 오케스트라·런던 심포니·버밍엄 심포니를 비롯해 많은 오케스트라와 음악 감독 계약을 도왔다. 매니저로서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 계약시 주의해야 할 점을 꼽는다면.
"가장 중요한 것은 지휘자와 오케스트라의 케미스트리이다. 지휘자의 예술적 목표가 오케스트라의 성격과 얼마나 일치하는가도 중요한 부분이다. 오케스트라 음악감독을 수락하게 되면 보통 한 시즌(1년)에 10~14주 가량 지휘를 하고, 투어와 교육 콘서트가 추가된다. 지휘가자 이를 수용할 수 있는지, 그 밖에 서로 원하는 조건이 부합하는지도 잘 조율할 수 있어야 한다.
-미국과 유럽의 오케스트라와 함께 일했다. 미국과 유럽의 문화적인 차이가 있다면.
"노조, 정부 지원, 월급 지급 방법, 의료 보험 등 많은 시스템에서 차이를 보인다. 미국의 노조법이 유럽보다 훨씬 까다롭다. 미국의 경우 리허설 이후 15분당 오버타임에 대한 비율을 지불해야 한다. 반면 유럽은 오버타임에 그다지 예민하지 않다. 유럽은 정부의 지원을 비교적 많이 받지만, 미국은 상대적으로 정부의 지원이 적다는 것도 차이라고 볼 수 있다.
-지금까지 만난 아티스트 중 가장 인상 깊었던 사람은.
"마주어와 함께 일하며 훌륭한 아티스트를 많이 만났다. 바이올리니스트 안네 조피 무터(1963~), 첼리스트 요요 마(1955~), 테너 피터 슈라이어(1935~2019), 베이스 르네 파페(1964~), 그리고 훌륭한 지휘자들까지. 특히 기억에 남는 연주자는 소프라노 제시 노먼(1945~2019)이다. 그녀의 노래를 처음 들었을 당시 온몸에 닭살이 돋았다. 정말로 신이 주신 목소리다.
-5개국 언어가 구사 가능하다니 참 놀랍다. 이 언어들을 어떻게 다 습득했는지.
"나는 루마니아출신이다. 루마니아어를 비롯해 영어·독일어·프랑스어는 꽤 자유롭게 구사한다. 그에 비하면 이탈리아어가 조금 부족하다. 일을 하다 보면 투어를 많이 다니는데 아무래도 언어가 수월한 것이 많은 도움이 된다.
-매니지먼트 일을 하면서 배운 점이 있다면.
"'굿 리스너(Good Listener)'가 되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최대한 정보를 끌어모아야 한다는 것. 음악 현황에 대한 정보가 많을수록 아티스트를 적재적소에서 공연할 수 있도록 하며, 혹시 모를 사고까지 미리 방지할 수 있다. '굿 리스너'가 되어야 하는 이유는, 내가 하는 조언이 모든 아티스트에게 똑같이 적용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아티스트 매니저로서 가지고 있어야 하는 자질은.
"인내, 음악에 대한 열정, 신뢰, 열린 마음.
-아티스트를 선택할 때, 어떤 기준으로 선택하는지.
"재능과 인성, 그리고 비전을 본다."
-아티스트와 일할 때 비전이 불일치하면 어떻게 해결하나.
"매니저는 아티스트를 지원하는 사람이다. 일단은 아티스트가 그들의 아이디어를 잘 펼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우리의 역할이다."
◇아라벨라 아츠와 함께 하는 현재
-현재 함께 하고 있는 아티스트를 소개한다면.
"현재 38명의 아티스트와 함께 일하고 있다. 우리 공식 홈페이지에 아티스트별 자세한 소개가 담겨 있다. 모두가 소중한 아티스트들이다.
-버밍엄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인 미르가 그라치니테 틸라(1986~)아도 함께 하고 있다. 유럽 오케스트라 중 최초의 여성 음악감독이다.
"마주어의 마스터클래식에서 그녀를 처음 발견했다. 나는 그녀와 나아갈 비전에 대해 함께 이야기한다. 그리고 일과 가정생활을 병행할 수 있도록 힘쓰고 있다. 젊은 지휘자는 잘하는 레퍼토리를 더 잘 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 레퍼토리를 천천히 깊이 연구해 나가며 본인의 목소리를 찾아가야 한다. 틸라는 그런 면에서 훌륭하게 해 나가고 있어 뿌듯하다. 그녀와 함께 하고 있으면 아티스트와 매니저가 함께 성장하고 있다는 말이 실감이 난다.
-아티스트 중 알마 도이처는 2005년에 태어난 신동이다. 이제는 신동이라고 반짝 주목받는 것보다, 장기적 안목을 가지고 아티스트의 임래 구상을 짜는 게 적합하다고 본다.
"2019년, 도이처가 14세일 무렵 처음 만났다. 그해 카네기홀에서 공연을 했고 전석 매진을 기록하며 호평을 받았다. 그녀는 피아노·바이올린·작곡을 공부했고 지금은 빈에서 지휘 공부를 하고 있다. 2023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여성 지휘자인 카타리나 윈코의 지휘 아래 그녀의 오페라인 'Emperor's New Waltz'가 초연될 예정이다. 그녀의 성장을 볼 수 있는 공연이니 기대해 주길.
-신인 연주자들과 이미 알려진 연주자들의 매니징 스타일은 어떻게 다른가.
"많은 예술단체들이 이미 유명한 연주자들만을 원한다. 따라서 신인 연주자들은 최대한 많은 기회를 잡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이미 자리를 잡은 연주자는 신인 연주자에 비해 확실히 기회가 더 많은 편이다.
-신인 연주자들이 전문 연주자로서 커리어를 시작하려고 할 때 유의해야 할 점은 무엇인지.
"우선 훌륭한 선생님과 좋은 학교에서 공부하고, 인내심을 갖고 연습하는 것이 중요하다. 1~2번의 해외 콩쿠르를 나가라고 조언한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본인이 하는 일을 사랑하는 것.
-초창기 커리어를 쌓을 때와 지금의 가장 큰 변화는 무엇이라고 체감하는가.
"의사소통 속도. 전에는 팩스로 의사소통을 했다면 지금은 메일로 하니 정말 빨라졌다. 앞으로 정기공연의 형식이 계속될 지, 관객참여형 공연으로 발전할 지, 공연 트렌드가 어떻게 변할지 궁금하다. 어쨌든 클래식 공연은 계속 존재할 것이라고 믿는다.
-앞으로 클래식 음악 업계가 지속되기 위해 무엇이 중요할까.
"교육이다. 어린이들이 오페라, 오케스트라, 뮤지컬을 비롯해 공연을 많이 보는 것이 중요하다. 그들이 공연을 많이 접할수록 음악 시장은 점점 커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한국은 젊은 관객이 많은 것 같다.
-개인적인 꿈은 무엇인가.
"아라벨라 아츠가 음악가들의 보금자리가 되어 그들의 앞길이 밝게 빛날 수 있도록 도와줄수 있으면 좋겠다.
인터뷰 내내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그녀가 운영하는 아라벨라 아츠가 걸어갈 새로운 길이 기대된다. 옆 사람까지 웃게 만들어주던 그녀의 크고 밝은 웃음소리를 뉴욕에서 다시 듣게 될 날을 기대해본다.
글=박선민(음악칼럼니스트)·사진=아라벨라 아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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