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희 칼럼] 불화살 같은 시인을 추억하며

한겨레 2022. 5. 26. 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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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희 칼럼]불화살 같았던 시인 김지하와 함께한 50여년! 부자유와 폭력과 고통의 시대였지만 진정 용기 있는 시인이 있어 외롭거나 부끄럽지 않았다.

문정희

시인 김지하 선생이 81살로 우리 곁을 떠났다. 5월8일 초여름 푸른빛이 눈부신 날이었다. 군사독재의 서슬이 두려워 누구도 입을 열지 못하고 진실을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던 1970년 5월, 담시(이야기시) ‘오적’(五賊)을 발표함으로써 그는 힘없는 시에 천둥번개 같은 힘과 가락을 부여했고 동시에 주눅 든 세상을 크게 뒤집어놓았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바로 그 유명한 담시 ‘오적’이 실린 1970년 <사상계> 5월호에서였다. 문학이 뭔지도 모른 채 문단에 등단한 20대 초반의 내가 처음 청탁받은 잡지가 <사상계>였다. 그런데 나의 시가 실린 <사상계> 5월호가 출간된 날, 당시 편집장 김승균씨로부터 필자용 책을 건네받은 다음날이었던가. 저녁 뉴스를 보다가 나는 그만 큰 충격에 휩싸였다. 김지하 시인과 김승균 편집장이 수사기관에 연행되어 가는 모습을 텔레비전 긴급 뉴스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오적’은 이 땅을 폭풍처럼 타올랐다.

“시를 쓰되 좀스럽게 쓰지 말고 똑 이렇게 쓰럈다./ 내 어쩌다 붓끝이 험한 죄로 칠전에 끌려가/ 볼기를 맞은 지도 하도 오래라/ …/ …뭐든 자꾸 쓰고 싶어 견딜 수가 없으니, 에라 모르겄다/ …/ 내 별별 이상한 도둑 이야기를 하나 쓰것다…” 이렇게 시작하는 ‘오적’은 부패한 권력집단을 통쾌하게 풍자 비판하고 있었다. 짐승스러운 몰골의 다섯 도둑 재벌, 국회의원, 고급공무원, 장성, 장차관을 판소리로 패러디한 전무후무한 시였다. 시인 김지하는 그때부터 생애를 저항과 도피와 체포와 구금으로 살게 되고, 반체제 저항시인의 상징이 됐다. 그가 입은 푸른 수의를 보며 그 시대 지식인이나 작가들은 선망과 부채의식을 동시에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얼마 뒤 감옥에서 갓 출소한 후였던가? 시인 김지하를 조태일 시인 등과 함께 만났다. 시집 <황토> 출판기념회가 열리는 광화문 신문회관(현 프레스센터)에서였다. 그는 한마디로 불화살 같은 이미지로 다가왔다. 축하객보다 정보원이 더 많은 출판기념회에서 박덕매라는 여성 시인이 “… 나는 간다 애비야, 네가 죽은 곳/ 부줏머리 갯가에 숭어가 뛸 때/ …”라며 시 ‘황톳길’을 낭송하자 누가 농담처럼 “애인은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시인은 대뜸 커튼 뒤에 앉아 있는 한 여인을 보여주었다. 초로의 어머니가 단아한 한복 차림으로 앉아 있었다.

그날 밤 집으로 돌아오며 나는 진정 좋은 시인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꽃이 피고 사랑이 어떻고 하는 시가 아니라, 현실을 언어로 투시하는 힘과 그것을 정확하게 표현할 줄 아는 진실로 아름다운 시인이 되고 싶었다. 페미니즘 등의 용어조차 알지 못한 때였지만 나는 그날 진정한 사나이를 본 것 같았다. 미국 기자 님 웨일스의 소설 <아리랑>에 나오는 아나키스트 혁명가 김산의 한 이미지가 겹쳐 떠오르기도 했다. 빛나는 용기의 화신으로 반체제 시인이 되어 그는 국내뿐 아니라 전 세계에 알려져 갔다. 몸은 독방에 갇혀 고통을 치러야 했지만 정신은 저항에서 생명으로, 한(恨)에서 용서까지 생명사상가로 거듭나고 있었다.

1988년 미국 펜클럽 회장으로 방한한 수전 손택과 베를린 국제인권위원회 위원장은 김지하를 크게 거명했고 한국 투옥 작가들의 석방을 강력하게 촉구했다. 오에 겐자부로를 위시한 일본 지식인·문인들이 보내는 존경과 성원도 뜨거웠다. 독일 브레멘 방송국에서 온 시인 미하엘 아우구스틴이 김지하의 목소리를 담아 가기 위해 애쓰는 모습도 보았다. 그에 대한 사랑과 관심은 미국 시인도, 아프리카 시인도 마찬가지였다. 국제적인 명성을 가진 유수의 문학상과 인권상이 그를 주목하고 추앙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참으로 오랫동안, 그의 소식은 수배, 잠행, 도주, 수감, 구금, 사형이라는 단어와 함께 들려왔다. 그렇게 병들고 엄혹한 시대의 어떤 시간을 뚫고 가끔 김지하 시인의 소식을 개인적으로 들을 수 있었던 것은 참으로 기쁘고 슬픈 기억으로 남는다. 주소도 없는 곳에서 난초 수묵화, 혹은 글씨가 그의 본명인 영일(永一)이라는 이름으로 나에게 배달되었다.

한참의 세월이 흐른 뒤 대학로였던가? 다시 만난 김지하 시인은 고문 후유증으로 병이 깊은 노인의 모습이었다. 힘들게 숨을 내쉬는 그의 얼굴에는 저승꽃이 가득했다. “남은 것은 병과 허명(虛名)뿐이다.” 시인은 그런 말을 했다. 늘 쫓기고 고통받는 애비 때문에 놀란 아이들 얘기를 하며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다”는 말도 했다. 하지만 절망적인 정치 현실과 부패한 권력집단을 향해 서릿발 같은 저항으로 일관했던 그의 눈빛만은 여전히 살아 있음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비상한 두뇌를 가진 사람이었다. 종횡무진 동서양 철학과 사상을 설명하느라 차가 식는 줄도 몰랐고, 음식은 거의 손을 대지 않았다.

문학평론가 홍용희는 김지하의 시 세계를 저항에서 생명의식으로, 그리고 죽음의 상상력과 대지적 생명력의 비장하고 절박한 정조를 넘어 애린과 화엄적 자아로 가는 세계라고 했다. 음과 양의 서열 구조가 아니라 여성성으로서의 생명성인 한(恨)에서 눈부신 용서와 화해까지 후천개벽 흰 그늘의 사상이라고 했다.

그런데 최근 한 젊은 시인과 얘기를 나누다가 나는 그만 발걸음을 멈춘 적이 있다. 젊은 시인은 볼멘소리로 그동안 간직한 김지하 선생의 난초 묵화를 찢어버렸다고 했다.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 때부터 화가 났는데, 박근혜 정부로부터 보상금을 받았다는 얘기를 듣고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고 했다. 젊은 시인은 김지하 시인을 진정 깊이 사랑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인을 마지막 본 것은 한국 주재 스웨덴대사관에서였다. 그날 각국의 외교관들 앞에서 그는 해박한 지식과 신념에 찬 말을 쏟아냈다.

김지하 시인의 부고가 전해지던 날, 나는 그의 글씨를 다시 꺼내보았다. ‘영겁천심월(影劫天心月). 마고 소서노 미실 황진이 고판례 …소영(素影).’

그는 유언처럼 내게 말했었다. “시몬 드 보부아르나 케이트 밀릿 같은 서양 페미니스트만 생각하지 말고 우리 역사 속의 여성들을 주목해야 합니다.” 특히 모악산(母岳山)의 교조 강증산의 아내 수부(首婦) 고판례(1880~1935)에 관해서는 여러 일화와 자료를 일러주었다. 남편의 배 위에 발을 얹어 놓고 “사람이 하늘이다. 여자와 남자가 똑같이 하늘이다”를 외치며 인본주의 퍼포먼스를 벌인 이야기였다.

어느 시에서 나를 ‘시 귀신 정희’라 불렀던 김지하 시인! 나는 시성(詩聖)이나 시선(詩仙)이라는 말보다 시 귀신이 몇배나 더 좋다. 그러나 끝내 그 말을 전하지 못했다. 이 시구가 실린 시집 <새벽강>(시학사, 2006)을 최근에야 보았기 때문이다.

불화살 같았던 시인 김지하와 함께한 50여년! 부자유와 폭력과 고통의 시대였지만 진정 용기 있는 시인이 있어 외롭거나 부끄럽지 않았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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