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의 원죄

한겨레 2022. 5. 26. 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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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에 입문하려면 통과해야 할 어려운 교리 관문 가운데 하나가 원죄설이다.

이렇게 난해한 원죄설은 2000살 가까운 나이를 먹었음에도 여전히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가령 갓난아기에게 원죄설을 적용하면 아기는 '죄 없는 죄인'(guilty innocent)이 된다.

사실 이런 상황이야말로 모든 사람에게 켕기는 부분이고, 원죄설이 아직도 살아 있는 이유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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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틱]

<비극>의 저자인 테리 이글턴. <한겨레> 자료사진

[크리틱] 정영목 | 번역가·이화여대 통역번역대학원 교수

기독교에 입문하려면 통과해야 할 어려운 교리 관문 가운데 하나가 원죄설이다. 이것은 아담과 이브의 첫 죄가 모든 인간에게 대대로 유전된다는 교리로, 왜 이것을 받아들이는 게 어려운지는 쉽게 짐작이 간다. 갓난아기도 원죄가 있는가? 이 원죄 때문에 실제로 죄를 지은 일이 없는 갓난아기가 천국에 가지 못하는가? 물론 교리에는 답이 마련되어 있겠지만 초심자라면 으레 말문이 막히는 대목이다.

이렇게 난해한 원죄설은 2000살 가까운 나이를 먹었음에도 여전히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것은 이 교리를 확립한 아우구스티누스의 논리와 위세 때문일 수도 있지만, 그것이 인간의 어떤 어두운 구석을 정확하게 찌르고 들어가기 때문일 수도 있다. 만일 그렇다면 회심하기 전 아우구스티누스의 방종에서 원죄설의 생명력의 원천을 찾을 수도 있을 듯하다. 세상을 좀 겪고 나서 아우구스티누스처럼 ‘인간으로 태어난 죄’를 수긍하고 고개를 숙이는 경우가 적지 않을 테니까. 물론 사람에 따라서는 이것을 ‘동물에서 진화한 죄’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인간의 어떤 현실을 ‘타고난 죄’라고 음울하게 규정하는 여파가 얼마나 클지는 짐작할 수 있는 일이고, 따라서 이에 대한 비판을 찾는 거야 너무나 쉬운 일이지만, 반대로 여기에서 통찰을 건져내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은 듯하다. 가령 갓난아기에게 원죄설을 적용하면 아기는 ‘죄 없는 죄인’(guilty innocent)이 된다. 말장난 같은 모순어법이지만 그 예를 찾을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고전적으로는 아내라고 생각하고 동침한 상대가 알고 보니 어머니이기도 했던 오이디푸스를 들 수 있겠다. 그렇게 멀리 가지 않고도, 선의를 품고 성실하게 개인적 삶을 살려 하지만 결국 그게 자기 집단의 악을 돕는 꼴이 되고 마는 사람은 무수하다. 사실 이런 상황이야말로 모든 사람에게 켕기는 부분이고, 원죄설이 아직도 살아 있는 이유일지 모른다. 어쩐지 비극의 냄새가 나는가?

아닌 게 아니라 이 ‘죄 없는 죄인’이라는 말은 테리 이글턴의 <비극>에서 만난 것인데, 그는 사람들이 이 세계화된 행성에 함께 묶여 사는 상황 때문에 “원죄 의식”이 복귀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이 빽빽한 연결망 안에서 움직이다 보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어딘가에서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그의 원죄 의식이다. 이글턴은 현대에도 이렇게 그리스 비극의 토대가 되었던 작고 긴밀한 공동체와 비슷한 조건이 존재하여, “사회적 질서의 복잡한 밀도” 때문에 “인간이 주는 피해가 장티푸스처럼 퍼질 수” 있다고 본다. 오이디푸스가 알지 못하고 저지른 죄가 공동체를 오염시킨 것과 마찬가지다.

기독교의 원죄가 ‘인간으로 태어난 죄’라면, 이글턴이 말하는 현대의 원죄는 ‘이런 세상에 살고 있는 죄’라고 말할 수 있을 듯하다. 그러나 “장티푸스” 비유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팬데믹 이전에 쓴 것으로, 만일 팬데믹을 겪은 뒤에 썼다면 그의 원죄는 “사회적 질서”를 넘어 생태계까지 염두에 두고, ‘지금 이 지구에 인간으로 살고 있는 죄’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이 죄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원죄와 마찬가지로 후대로 전해진다.

원죄설은 기독교 교리에서 또 하나의 어려운 관문인 기독교적 구원론과 이어진다. 즉 이 원죄 때문에 인간은 자신의 노력으로 구원을 얻는 것은 불가능하고 오직 기독교적 방법으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구원론도 원죄설과 마찬가지로 현대 세계의 은유가 되어야 할까? 인간은 자신의 노력으로는 세계와 자신을 구하지 못하는 걸까? 아니, 구원론으로도 부족할까? 지구에서 이렇게 사는 삶은 지속가능하지 않기에, 기독교적 종말론마저 이 세계의 은유로 복귀해야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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