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장 칼럼] GC녹십자 '한국의 백신명가' 명맥, 이렇게 끊기나
코로나19 엔데믹(감염병의 풍토병화)과 함께 국산 백신·치료제 개발 광풍도 꺼지고 있다. 개발 중단을 선언하는 제약사가 속출하고 있고, 천정부지로 치솟았던 제약사 주가도 코로나19 이전 수준으로 돌아갔다. 불과 1년 전 임상 허가를 받고 개발에 나선 제약사가 30곳이 넘었지만, 지금껏 제대로 된 제품을 내놓은 곳은 아직 없다.
코로나19 초기부터 전문가들은 국산 백신·치료제 개발은 쉽지 않을 것으로 예상했다. 국내 연구개발(R&D)규모나 기술력으로는 역부족이기 때문이다. 미국 정부가 코로나19 백신 개발에 쓴 예산이 5조원이 넘지만, 한국 정부의 관련 예산은 한 해 1528억~3200억원 수준에 그친다.
하지만 정부 내에선 일말의 기대가 있었다고 한다. 팬데믹(감염병 대유행)에 대응해 성공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 2009년 신종인플루엔자(신종플루)가 유행할 당시 정부와 GC녹십자는 4개월 만에 백신을 개발해 전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았다. 이는 세계보건기구(WHO) 신종플루 대응 우수사례로 소개됐고, GC녹십자는 백신 명가(名家)로 이름을 알렸다.
그런데 ‘녹십자라면 할 수 있다’라는 그 믿음이 깨졌다. 최근에 만난 제약·바이오 업계 원로는 “녹십자가 이번 코로나 팬데믹에서 기여한 게 하나도 없다”고까지 했다. 신종플루 때처럼 녹십자가 코로나 백신 개발의 구원투수로 나설 것을 기대했는데, 그렇지 않아서 실망했다는 것이다. 그는 “한국을 대표하는 백신 회사라면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뛰어들었어야 한다”고도 말했다.
업계에선 허은철 GC녹십자 대표가 백신 개발 사업부 해체를 지시했다는 소문도 돌았다. 허 대표가 경쟁사인 SK바이오사이언스에 밀리느니 ‘아예 사업을 접으라’고 주문했다는 것이다. 녹십자는 최근 확산하는 ‘원숭이두창(monkeypox)’에 대해서도 “백신 개발 계획이 없다”고 못 박았다.
GC녹십자가 코로나19 백신 개발에 헌신하지 않았다고, 신규 백신을 개발하지 않는다고 탓할 일은 아니다. 더욱이 녹십자가 10여년 전 신종플루 백신 개발에 성공해 국제 사회에 박수를 받은 것이 사실이지만, 반대로 녹십자는 경영에서 꽤 큰 손해를 봤다.
정부는 녹십자가 개발한 백신 600만명분을 모두 사주기로 했지만, 엔데믹 상황에서 백신이 남자 예산 낭비 문제가 불거졌고, 녹십자는 수백억원의 개발 비용을 그대로 떠안았다고 한다. 감사원 감사로 담당 공무원은 징계를 받았고, 선대회장인 고(故) 허영섭 회장은 그해(2009년) 11월 사망했다.
허영섭 회장의 차남인 허은철 대표는 당시 녹십자 R&D 기획실 전무였다. 아마 이 모든 과정을 지켜봤을 것이다. 여기에 SK바이오사이언스가 백신 사업에 뛰어들면서 녹십자의 유능한 인재들을 대거 빼갔다. SK바이오 백신사업본부의 주요 인물은 대부분 녹십자 출신이다.
이런 상황에서 경영자가 ‘백신 사업은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는 것은 정상으로 보인다. 손해 볼 장사를 할 회사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산 백신·치료제가 없어서 화이자와 모더나 등 글로벌 제약사에게 읍소했던 경험을 떠올리면 아쉬운 마음이 든다. 신약 개발에 천문학적 비용이 드는 것처럼, 의학 기술은 하루아침에 쌓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미국, 영국 등 선진국은 물론, 대만, 인도, 중국도 자국 코로나19 백신 개발에 성공했다. 국내 생명과학 분야는 가뜩이나 기초가 부족하다는 지적을 받는다. 이런 와중에 60년 역사의 백신 기업이 쌓아 올린 무형의 자산이 깡그리 사라질 수도 있는 위기에 봉착했다. 새 정부는 K-바이오 육성을 국정 과제로 세웠다. 단순히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자고 하기 전에 우리 기업이 가진 자산을 어떻게 활용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지 진지하게 고민할 때다.
[김명지 바이오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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