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회사 임금피크제도 무효? 대법은 4가지 조건 내밀었다

하남현 입력 2022. 5. 26. 13:25 수정 2022. 5. 26.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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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리적인 이유 없이 정년을 앞둔 직원들의 나이만을 기준으로 임금을 깎는 성과연급제(임금피크제)는 현행 고령자고용법상 차별 금지 규정을 위반해 무효라는 대법원의 판단이 나왔다. 임금피크제를 시행하는 대다수 기업이 고령 직원들의 인건비 감축 목적으로 제도를 운용하는 상황에서 이번 무효 판결로 일선에서 혼란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다만 대법원은 “다른 기업이 시행 중인 임금피크제 효력은 사안 별로 다르게 판단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합리적인 이유’만 있다면 임금피크제 운용 자체는 가능하다는 것이다.

중앙포토

“경영 제고 목적인데 왜 나이 많은 직원 임금만 깎나”


대법원 1부(주심 노태악 대법관)는 퇴직자 A(67)씨가 자신이 재직했던 옛 전자부품연구원(한국전자기술연구원)을 상대로 “임금피크제를 적용해 삭감했던 임금 차액을 지급하라”며 낸 소송 상고심에서 원고 일부 승소로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고 26일 밝혔다.

A씨는 1991년 연구원에 입사한 뒤 2014년 명예퇴직했다. 연구원은 노조와의 합의를 통해 2009년 1월에 61세 정년은 유지한 채 55세 이상 직원을 대상으로 임금피크제를 도입했고, A씨는 2011년부터 적용 대상이 됐다.

A씨는 임금피크제로 인해 직급이 2단계, 역량등급이 49단계 강등된 수준으로 기본급을 받았다며 2014년 퇴직하면서 임금 차액을 청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이번 사건의 쟁점은 연구원의 임금피크제가 임금이나 복리후생 분야에서 합리적 이유 없이 연령을 이유로 노동자를 차별하지 못하게 한 고령자고용법 4조의4를 위반했는지 여부였다.

1심과 2심은 “고령자고용법에 위반돼 무효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판정했다. 대법원도 동일한 판단을 내렸다. 회사측은 판단의 대 전제인 차별금지 조항이 권고사항이라는 주장도 폈지만, 대법원은 '강행규정'이니 꼭 지켜야 한다고 못박았다.

그러면서 대법원은 임금피크제를 도입하는 경우에도 연령 차별이라고 볼 수 없는 '합리적인 이유'에 해당하는 지를 판단하는 조건 4가지를 제시했다. ⓵도입목적이 타당해야 하고 ⓶불이익이 너무 심하지 않아야 하며 ⓷불이익에 상응하는 적절한 조치(근로시간 감소 등)를 취해야 하고 ⓸임금 깎은 돈이 본래 목적대로 사용돼야 한다는 것이다.

대법원은 이를 두고 “정년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일정 연령 이상 근로자의 임금을 삭감하는 형태의 임금피크제 효력에 관한 판단 기준을 최초로 제시한 판결”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대법원은 “이 사건의 임금피크제는 연구원의 인건비 부담 완화 등 경영 제고를 목적으로 도입된 것”이라며 “이러한 목적은 55세 이상 직원들만을 대상으로 한 임금 삭감 조치를 정당화할 만한 사유로 보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또 “51세 이상 55세 미만 정규직 직원들의 실적 달성률이 55세 이상 정규직 직원들에 비하여 떨어지는데 오히려 55세 이상 직원들의 임금만 감액됐다"고 부연했다.

이밖에 업무 성격과 목표, 일하는 시간도 그대로여서 임금을 줄인 것에 상응하는 조치도 없었던 만큼 법에 금지하는 차별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지난해 6월 서울 종로구 경노사위 사무실 앞에서 공공운수노조 주최로 열린 기자회견에서 참가자들이 공공기관의 일방적 임금체계 개편 중단과 임금피크제 지침 폐기를 촉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다른 기업 시행 임금피크제…개별 사안별로 다르게 판단”

다만 대법원은 “다른 기업이 시행 중인 임금피크제 효력은 개별 사안 별로 다르게 판단될 수 있다”고 했다. 일단 조건을 제시한 것 자체가 모든 임금피크제를 인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문제는 개별 기업이 네가지 조건을 충족했느냐인데, 결국 사건마다 법원이 판단하겠다는 것이다. 앞으로 유사 소송이 쏟아질 수 밖에 없게 됐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이번 판결로 임금피크제를 시행하는 일선 기업들의 입장에선 혼란이 불가피해졌다. 임금피크제는 지난 2003년 신용보증기금이 처음 도입한 이후 2015년 모든 공공기관에 적용됐다.

일반 기업이 도입한 사례도 늘어 300인 이상 사업체 중 임금피크제를 운영하는 곳이 54.1%(2019년, 고용노동부 자료)에 이른다.

이에 재계에선 이번 판결에 대한 아쉬움의 목소리가 나온다. 한 기업 관계자는 “임금피크제는 고용 유지뿐만 아니라 신규 일자리 창출 문제와도 궤를 같이하고 있어, 기업 입장에서는 여러 측면에서 종합적인 고려가 필요한 사안”이라며 “기업들은 향후에도 이어질 임금피크제 소송 및 그에 대한 사법부 결정을 예의주시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다른 기업 관계자는 “임금피크제는 고령화 비율이 높아지고 있는 상황에서 중장년층의 퇴직과 실업에 대한 문제를 감소시킬 수 있는 대안”이라며 “이번 법원 판단으로 제도 운용에 대한 혼란이 더 커지지 않을까 우려된다”고 말했다.

반면 노동계는 이날 판결을 반겼다. 한국노동조합총연맹은 이날 논평에서 “지금 같은 방식의 임금피크제는 지속돼서는 안 된다”며 “대법원 판결은 당연한 결과로, 적극적으로 환영한다”고 밝혔다. 이어 “오늘(26일) 판결을 계기로 노동자들의 임금을 깎는 현장의 부당한 임금피크제가 폐지되기를 바란다”며“노조 차원에서 임금피크제 무효화 및 폐지에 나서도록 독려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서울 서초구 대법원 모습. 뉴스1

“임금피크제 ‘합리적 이유’ 불명확”


관심은 향후 예상되는 추후 유사한 소송의 결과다. 임금피크제의 유형은 정년유지형, 정년연장형, 고용연장형 등으로 다양하고 사업장별로 도입 형태가 다를 수 있다.

이번 사건의 경우 원래 정년이 61세인 기업(연구소)였지만, 상당수 기업들의 경우 2013년 60세 정년이 법제화 되는 과정에서, 이전보다 정년을 늘리는 대신 해당 기간에 임금피크제를 적용한 경우가 많다. 이 경우에도 같은 조건이 해당하는지도 아직 명쾌하지 않은 상황이다.

이와 관련 법원이 제시한 ‘합리적인 기준’이 다소 모호한 만큼 결국 판례가 더 쌓이기 전에는 일부 혼선이 불가피할 거란 전망이 나온다.

김성희 고려대 노동대학원 교수는 “이번 판결로 공공기관은 물론 임금피크제를 운용 중인 일반 기업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며 “대다수 기업이 주로 나이를 기준으로 임금피크제를 운용하는 상황에서 대법원이 제시한 ‘합리적인 이유’에 대해 기준이 다소 불명확해 향후 다른 소송의 결과를 봐야 ‘합리적인 이유’의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남현 기자 ha.namhy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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