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6000보씩 걷고 근력운동.. 긍정적 사고와 감사가 불로초"

박현수 기자 2022. 5. 26.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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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8일 서울 명동 퍼시픽호텔에서 가진 문화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신영균 회장은 “긍정적인 사고와 감사하는 태도가 진정한 불로초”라고 강조했다.

■ 100세 시대 名士의 건강법 - 신영균 영화인원로회 명예회장

6시 기상 10시 취침 규칙적 생활

아내가 끓여주는 콩국 매일 마셔

가끔 필드 나가는 골프도 수준급

재산 사회환원 등 베푸는 삶 실천

글·사진 = 박현수 기자

한국 영화 100년의 ‘살아 있는 전설’ 신영균 한국영화인원로회 명예회장(한주홀딩스코리아 명예회장)은 올해 우리 나이로 94세다. 여전히 건강하게 왕성한 활동을 한다. 빠듯한 스케줄 탓에 인터뷰 일정을 잡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지난 18일 서울 명동 퍼시픽호텔에서 열린 영화인원로회 총회에 참석한다는 소식을 듣고 예고 없이 찾아갔다. 그리고 행사를 마치고 나오는 그를 호텔 내 커피숍에서 어렵게 만났다. 그는 “노욕이라고 비판할진 모르겠지만 100세 전에 스펜서 트레이시 주연의 ‘노인과 바다’ 같은 멋진 영화 한 편 꼭 남기고 싶다”며 여전히 배우로서 의욕을 내비쳤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건강해 보였다. 먼저 비결을 물었다. “특별한 건 없어요. 그래도 굳이 하나 들라면, 철저한 규칙적 생활이죠. 일상은 매일 비슷합니다. 단조롭지만 시곗바늘 같은 생활이지요.” 그의 일과는 보통 오전 6시에 일어나 8시 30분에 아침 식사를 하고 10시에 명동 사무실로 출근한다. “출근 전 아내가 끓여준 콩국을 잊지 않고 마십니다. 점심은 조미료를 최소화한 메뉴로 소식하지요. 오후 3시쯤 헬스클럽에서 가벼운 근력운동과 러닝머신을 두어 시간 하고 귀가해 6시 30분 저녁 식사 후 보통 10시에 잠자리에 듭니다.” 헬스장은 한창 바쁘던 배우 시절에도 꾸준히 다녔지만, 80대 이후에는 거의 매일 가고 있다. 오후에 행사가 있어 헬스클럽을 가지 못하면 집에서라도 반드시 실내 자전거 등으로 운동을 한다. “지금껏 건강한 것도 아내의 덕이 가장 크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신 회장은 노년에 가장 알맞은 건강 관리법은 역시 걷기라고 했다. 시간과 장소, 경비에 구애받지 않아 누구나 실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루 평균 6000보 정도를 걷는다”고 한다. 걷기와 관련해 솔깃한 얘기를 들려줬다. 일본에서 조사한 65세 이상 노인들의 걸음 수와 질병의 상관관계를 10년 동안 분석한 결과다.

“매일 4000보를 걸은 사람은 우울증이 없어지고, 5000보를 걸은 사람은 치매나 심장질환이 예방되고, 7000보를 걸은 사람은 골다공증과 암이 예방됐다고 해요. 또 8000보를 걸으면 고혈압과 당뇨를, 1만 보를 걸으면 각종 대상증후군을 막을 수 있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많이 걷는 것이 좋습니다.”

이어 “걷는 것은 만병의 근원이 되는 스트레스 해소에도 최고”라면서 “많이 걷는 것 이상의 보약도 없는 것 같다. 나에게 마음의 양식이 신앙이라면 몸의 양식은 걷기”라고 강조했다.

그가 건강관리에 신경을 쓰기 시작한 것은 30대에 당뇨를 얻으면서다. “잘 시간도 없이 촬영을 강행하다 보니 대기 시간에 초콜릿을 많이 먹었는데, 그것 때문인 것 같다”고 했다. 짧은 시간 안에 피로를 풀고 부족한 에너지를 보충하기 위해서였다. “학창시절 레슬링 대회에서 웰터급으로 2년 연속 우승할 만큼 어릴 때부터 운동을 좋아해서 건강만큼은 자신했기에 충격이 컸어요.” 술을 많이 하지 않고 담배도 평생 멀리했지만, 경고등이 한 번 켜지고 나서는 더욱 신경 써서 몸을 아끼게 됐다고 했다.

걷기와 헬스클럽에서 근육운동을 하는 것 외에는 주로 골프를 한다. 가끔 필드에 나가는 것도 건강을 유지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몇 해 전까지도 보기 플레이로 80대 후반을 치는 수준급이다.

그는 뒤에서 남의 험담을 하지 않는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15∼16대 국회의원 8년을 지냈지만, 지금까지 그를 비판하는 사람은 들어보지 못했을 정도로 평판이 좋다. 남 험담을 하지 않기 때문에 적도 없다. 최근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와의 인터뷰(문화일보 5월 12일 28면 참조)에서 김 교수의 말이 생각났다. ‘주변에 100세 이상 사는 사람 7명의 공통점 두 가지는 무리하지 않고, 남 험담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끝으로 정기적인 운동도 필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가짐이라고 했다. “긍정적인 사고와 감사하는 태도가 진정한 불로초가 아닐까 싶어요. 남을 도울 수 있다는 것도 큰 행복이지요.”

평생 모은 재산을 남을 위해 선뜻 내놓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신 회장은 2010년 영화 및 예술계 인재 육성을 위해 당시 500억 원 상당의 명보극장(현 명보아트홀)과 제주신영영화박물관을 문화예술계의 공유재산으로 기증했다. 기증 당시 기자회견에서 “국내에 인재가 많은데 적극적으로 뒷받침해 준다면 후배 영화인들이 세계를 지배할 것으로 확신한다”고 했다. 그의 말은 현실로 이뤄졌다.

재단법인 ‘통일과나눔’에도 기금을 기부해 운영해오고 있다. ‘신영균 탈북민 장학사업’이다. 탈북 학생 및 제3국에서 출생한 탈북민 자녀들의 학업과 생활을 후원하고 있다. 나머지 재산도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밝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대표적인 인물로 꼽힌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그의 건강 비결은 4가지로 요약됐다. 규칙적인 생활, 꾸준한 운동, 긍정적인 생각과 감사하는 마음, 베푸는 삶이다.

 ■ 신영균 회장이 걸어온 길

1928년 황해도 평산의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여섯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로 남은 어머니를 따라 남한에 내려와 서울 동대문구 흥인초교를 다녔다. 그 시절, 어머니를 따라 교회에 다니던 그는 우연한 기회에 크리스마스 때마다 하는 성극 무대에 섰다. 작은 역할이었지만 이는 훗날 ‘대배우 신영균’의 탄생을 알린 서막이 됐다. 한성고 재학 시절에도 연극부에서 활동했다. 졸업한 뒤에는 ‘청춘극장’에 입단해 2년 동안 신극 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하지만 경제적으로 너무 쪼들렸다.

생계에 대한 고민으로 잠시 꿈을 접고 서울대 치과대학에 입학했고, 해군 군의관 시절 만난 부인 김선희 여사와 결혼한 뒤 치과의사를 했다. 그러나 연기에 대한 열정을 억누를 수 없어 연극 ‘여인천하’ 무대에 올랐다가 당시 조긍하 감독의 눈에 띄어, 1960년 영화 ‘과부’로 영화계에 데뷔했다. 데뷔 2년 만에 ‘연산군’으로 제1회 대종상 남우주연상을, ‘빨간 마후라’로 제11회 아시아영화제 남우주연상을 받으며 연기파 배우로 자리매김했다. 이후 ‘미워도 다시 한 번’ 등 한국영화사에 주옥같은 작품 300여 편에서 주연으로 활약하며 톱스타로서 1960년대 한국 영화 전성기를 누렸다.

1978년 ‘화조’를 끝으로 배우로서 활동을 중단했다. 배우로 활동하는 동안에도 금호극장, 명보극장을 인수하고, 명보제과를 직접 운영하는 것은 물론, 신스볼링, 한주흥산 등을 설립해 사업가로서도 뛰어난 면모를 보였다. 이후 한국영화배우협회장, 한국영화인협회장,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장 등을 지냈고, 1996년에는 정치에 입문해 제15·16대 국회의원으로 활동했다. 1987년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동백장을, 2011년엔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 은관문화훈장을 수상했다. 2020년 10월 회고록 ‘엔딩 크레딧’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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