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판 미디어텍의 탄생은 영원히 불가능할까? [최원석의 디코드]

최원석 국제경제전문기자 2022. 5. 26.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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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코드(decode): 부호화된 데이터를 알기 쉽도록 풀어내는 것. 흩어져 있는 뉴스를 모아 세상 흐름의 안쪽을 연결해 봅니다.

“바이든이 한국에 착륙한 에어포스원에서 내려서 처음 간 곳은 대통령 집무실도, 미국 대사관도, 주한 미군 기지도 아니었다. 21세기 진짜 전장(戰場)인 수퍼 반도체 공장이었다.(When President Biden arrived on his inaugural mission to Asia on Friday, the first place he headed from the airplane was not a government hall or embassy or even a military base, but a sprawling superconductor factory that represented the real battleground of a 21st-century struggle for influence in the region.)”

지난 20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세계 최대 반도체 공장인 삼성전자 평택 캠퍼스를 방문한 것에 대해 뉴욕타임스(NYT)는 이렇게 규정했죠.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중국의 추격을 받고는 있지만)이자 자유민주주의진영의 수장인 미국의 대통령이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간 곳은, 한국의 한 민간기업이 아니라, 미국이 중국의 도전에 맞서 벌이는 거대한 전쟁의 주전장(主戰場) 그중에서도 최전선(最前線)이었던 겁니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가슴이 벅차오르는 광경이었고, 삼성전자와 한국이 이뤄낸 업적을 증명한 것이기도 했지만, 미국 입장에서 그곳은 21세기 테크전쟁의 최전선이었던 것이죠.

윤석열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20일 경기 평택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을 방문해 이재용 부회장과 함께 반도체 생산라인을 둘러보며 관계자의 설명을 듣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연합뉴스

◇바이든이 방한하자마자 삼성 반도체 공장 간 것은, 미·중 기술패권 전쟁의 최전선이기 때문... 바이든이 한국을 ‘린치핀’이라 말한 것도 미국이라는 마차, 미국 팹리스라는 마차 바퀴의 축을 고정하는 핀 역할을 한국이 해달라는 의미일 수도

대한민국 평택에는 미국의 해외 육군 기지 중 최대·최고인 평택 미군기지(캠프 험프리스)가 있을 뿐 아니라, 전략적으로 중요한 또다른 ‘기지’가 있는 셈입니다. 새로운 형태의 전략거점이 평택 미군기지를 통해 보호받음으로써, 혼돈의 반도체 지정학 속에서 미국과 자유민주주의 진영의 이익을 지켜낸다는 의미도 있겠습니다.

바이든이 한국과 일본의 위치를 규정한 단어도 새겨볼 만합니다. 한국을 “인도·태평양 지역에서의 안보와 번영의 린치핀(linchpin)”이라고 했고, 지난 23일 일본에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가진 미·일 정상회담에서는 “미·일 동맹은 인도·태평양 평화의 코너스톤(Cornerstone·주춧돌)”이라고 말했죠.

코너스톤은 좀 알겠는데, 린치핀은 도대체 뭐냐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린치핀은 마차의 바퀴가 빠지지 않도록 차축에 꽂는 핀입니다. 한국을 린치핀으로 부르기 시작한 것은 바이든이 부통령으로 있던 오바마 정부 때였죠.

한국의 역할·위치가 마차 바퀴가 빠지지 않도록, 바퀴를 차축에 단단히 고정하는 핀이라면 말입니다. 그 핀으로 역할을 해야만 하는 몸통 즉 마차는 무엇일까요? 바이든 말대로, 인도·태평양 지역에서의 안보와 번영이라는 마차가 있겠죠.

하지만 미·중 패권·기술 전쟁의 최전선에 초점을 맞춘다면 어떨까요? 삼성전자 평택캠퍼스라는 린치핀의 역할, 삼성전자가 바퀴를 고정해 맹렬하게 달릴 수 있도록 하는 ‘마차’는 무엇이냐는 거죠.

그 마차는 여러 가지를 생각할 수 있겠지만, 하나로 얘기한다면 ‘미국의 팹리스(반도체 설계 전문) 기업’들입니다. 마차가 미국이라면, 미국이라는 마차가 번영을 향해 빠르게 달릴 수 있도록 맹렬한 기세로 돌아가는 바퀴가 미국 팹리스이고, 린치핀이 삼성전자 역할일 수도 있죠. 이미 반도체의 두뇌 역할을 하는 팹리스는 미국기업이 대부분 장악하고 있거든요. 그러나 미국 팹리스 기업들이 문제 없이 지속 성장할 수 있도록 하는데 필수인 요소들, 즉 컴퓨터 연산에 꼭 필요한 기억장치(메모리)와 반도체 수탁생산(파운드리)에서 한국의 역할이 매우 크다는 것이겠죠.

참고로 팹리스는 제조설비(fabrication)에 ‘없다’는 뜻의 접미사(less)를 합성한 말입니다. 대표 기업으로 미국의 엔비디아·퀄컴·브로드컴, 대만의 미디어텍 등이 있습니다. 반도체 산업은 팹리스 외에도 삼성·인텔처럼 설계부터 생산의 모든 과정을 맡는 종합반도체 회사(IDM·Integrated Device Manufacturer), IDM·팹리스에서 위탁받아 제작만 전문으로 하는 파운드리(foundry)로 나뉩니다.

반도체라는 전장(戰場)의 얘기로 다시 돌아가 보면, 이 전장은 눈에 보이는 것과 안 보이는 것으로 나뉘는데요. 삼성전자 평택 캠퍼스처럼, 트럼프 당시 대통령이 헬기를 타고 평택 상공을 날다가 “도대체 저 거대한 빌딩은 뭐지?”라고 물어봤을 정도의 존재감을 자랑하죠.

하지만 반도체는 사실 눈에 보이지 않는 전장이 더 크고 무섭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것이 얼마나 크고 넓고 깊은지 잘 알지 못하죠. 눈에 보이지 않는 전장이 바로 미국이 장악한 팹리스 분야이고요. 설계 위주이기 때문에 공장이 없는 팹리스는 눈에 보이는 무엇을 찾기 어렵습니다. 외국의 첨단 팹리스 내부를 가본 적이 있는데요. 일을 하는 것인지 안하는 것인지조차 알 수 없는 평온한 광경이었습니다. 숲과 정원 사이에 흩어져 있는 건물들, 그 안에서 조용하게 컴퓨터 화면으로 작업 중인 젊은 엔지니어들, 일부는 헤드폰을 끼고 음악을 들으며 일하고 있더군요. 아무튼 그랬습니다.

IC인사이츠(2020년)의 본사 소재지별 반도체 점유율에서 한국은 미국(55%)에 이어 2위(21%)였지만, 팹리스 한정의 세계 반도체 점유율은 1%로, 미국(64%)·대만(18%)·중국(15%) 등과 비교하기 어렵다.

◇팹리스 점유율 1%에 불과한 한국, 메모리는 약하지만 팹리스와 파운드리 모두 초일류인 대만... 작년 세계 반도체 톱10 기업 중 성장률 톱3가 모두 팹리스... 영업이익률 40~50%인 팹리스도 많아

한국은 반도체 전쟁의 보이는 부분에서 압도적 우위에 있습니다. 메모리는 램·낸드 포함해 한국의 세계 점유율이 약 60%. 팹리스가 설계한 반도체를 대신 만들어주는 파운드리에서도 삼성전자의 세계 점유율은 약 20%로, 대만 TSMC(약 50%)에 이어 2위이니까요.

반면 눈에 잘 안 보이는 팹리스 분야에서 한국은 여전히 불모지입니다. 지난 20년간 ‘한국도 팹리스를 육성해야 한다’며 정부·업계가 한 목소리였지만, 20년째 계속 불모지입니다. IC인사이츠(2020년)의 본사 소재지별 반도체 점유율에서 한국은 미국(55%)에 이어 2위(21%)였지만, 팹리스 한정의 세계 반도체 점유율은 1%로, 미국(64%)·대만(18%)·중국(15%) 등과 비교하기 어렵습니다. 미국이 중국 화웨이를 때리는 바람에, 화웨이 산하이면서 중국 최고 팹리스였던 하이실리콘이 주저앉았고, 미디어텍을 비롯한 대만 팹리스가 반사이익을 많이 봤죠. 지금 비교하면 대만의 비중이 20% 이상일 테고, 한국은 여전히 1%일 겁니다.

그런데 세계 반도체 시장은 메모리와 시스템반도체의 비율이 대략 3대7에서 4대6 정도로 시스템반도체가 더 높거든요. 성장률도 더 높습니다. 작년 세계 반도체 톱10 기업 중 전년 대비 성장률 톱3는 대만 미디어텍(60%)과 미국 엔비디아(57%)·퀄컴(51%)으로 모두 팹리스였습니다.

여기서 생각해볼 것이, TSMC나 삼성전자의 파운드리라는 것은 이들 팹리스가 설계한 반도체를 대신 생산해주는 것이거든요. 그러니까 최종제품에 대한 매출은 파운드리가 아니라, 해당 고객사인 팹리스 쪽으로 잡힌다는 겁니다. TSMC나 삼성전자 파운드리는 미국·대만 중심 팹리스의 공장을 수수료를 받고 대신 운영해주는 개념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공정이 너무 어렵고 자본이 많이 들어가는 일이라, 여기서 얻는 이익이 크다는 것이 단순 공장과는 완전히 다르지만 말입니다.

아무튼 한국의 팹리스가 20년째 성장하지 못한 사이에, 특히 대만의 미디어텍은 스마트폰 AP 시장에 뛰어든지 9년 만인 재작년 말 미국 퀄컴을 누르고 스마트폰 AP 출하 대수 1위에 오르는 등 기염을 토하고 있습니다. 미디어텍의 올해 1분기 매출은 전년 동기보다 32% 증가한 6조1200억원, 순이익은 30% 증가한 1조4000억원으로 매출·이익 모두 사상 최대였습니다. 반면에 한국의 팹리스 상위 20개사 매출·이익을 전부 합해봐야 미디어텍의 10분의 1, 100분의 1밖에 안 되는 실정입니다.

그럼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죠. “한국이 메모리와 파운드리 강국인데, 굳이 팹리스까지 키워야 할 필요 있겠어? 선택과 집중이 좋은 거야”라고요. 물론 이 말도 맞는 부분이 있습니다. 또 미국은 반도체 대전략에서 한국은 메모리(파운드리도 일부 포함), 대만은 파운드리, 일본은 반도체 소재·부품·장비, 미국은 (미래 기술산업의 핵심인) 팹리스 등 두뇌 역할로 역할 분담의 큰 그림을 그린 것일 수도 있습니다. 다만 미국 팹리스가 설계한 첨단 반도체를 대신 생산해 줄 시설(파운드리)이 대만·한국이라는 중국과 가까운 지역에 집중돼 있기 때문에, 최근에 대만 TSMC와 한국 삼성전자가 미국에 첨단 반도체 공장을 짓도록 하고 있는 거겠죠.

국내 팹리스 대표단체인 한국팹리스연합, 반도체공학회의 도움으로 팹리스연합 103개 회원사 CEO에게 지난 18~24일 ‘한국에서 미디어텍 같은 대형 팹리스가 나오려면 무엇이 필요한가’를 물었다. 취합된 30개 팹리스 CEO의 답변 내용을 분석했다.

◇미국이 팹리스에 집중투자하는 이유는 첨단 프로세서가 미래 먹을거리이자, 디바이스 차별화의 핵심이기 때문... 팹리스 실력이 첨단 디바이스와 서비스 품질을 좌우하기 때문에, 점점 중요해질 수 밖에 없어

하지만 한국이 앞으로 반도체 분야, 혹은 AI, 메타버스, SDV(Software Defined Vehicle), 자율주행, 차세대 통신 등에서 계속 영역을 넓히고 부를 쌓으려면, 팹리스도 함께 커나가는 것이 훨씬 유리합니다. 미국의 대형 팹리스만큼은 어렵더라도, 한국판 미디어텍의 탄생을 반드시 노려야 한다는 거죠.

대만이 메모리 강국은 아니지만(난야라는 글로벌시장에서 활약하는 업체가 있긴 합니다만), 파운드리는 세계 1위, 팹리스는 아시아 1위입니다. 그리고 파운드리와 팹리스는 사업의 성격이 완전히 다르면서도 결국은 한 세트이거든요. 대만은 자국 내에 초일류 파운드리와 팹리스를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이 서로에게 시너지를 내는 게 많습니다. TSMC 입장에서 미디어텍은 항상 자신들에게 일감을 주고 더 높은 과제로 채찍질과 협업을 주는 고객사이고요. 미디어텍 입장에서 TSMC는 자신들의 머릿 속에만 있던 아이디어를 물리적인 제품으로 구현해주는, 아무리 어려운 도전과제를 줘도 결국은 해내는 믿음직한 일꾼이죠.

따라서 한국에 크고 뛰어난 독립 팹리스가 나온다는 것은 한국의 파운드리 경쟁력도 더 높일 수 있고, 앞으로 더 커질 반도체 시장에서 더 안정적이고 꾸준한 이익, 더 높은 부가가치를 낼 기회가 커진다는 얘기입니다. 유재희 홍익대 전자전기공학부 교수는 “한국이 미래에도 반도체 주도권을 잡으려면 더 늦기 전에 대형 팹리스가 계속 나와줘야 한다”며 “팹리스는 다양한 분야의 통합이 중요하므로 (우리나라의 발달한 공정기술을 바탕으로) 정부와 기업을 아우르는 컨트롤타워와 국내외 생태계가 절실하다”고 말했습니다.

이와 관련해 국내 팹리스 대표단체인 한국팹리스연합, 반도체공학회의 도움으로 팹리스연합 103개 회원사 CEO에게 지난 18~24일 ‘한국에서 미디어텍 같은 대형 팹리스가 나오려면 무엇이 필요한가’를 물었는데요. 취합된 30개 팹리스 CEO의 답변 내용을 분석한 것이 아래의 내용입니다.

국내 팹리스 CEO들은 ‘극복해야 할 문제’(이하 복수 응답)로 ‘인재 부족(86.7%)’을 가장 많이 꼽았습니다. ‘규모의 경제 안됨(73.3%)’ ‘글로벌 진출 못함(66.7%)’ ‘정부 지원 부족(56.7%)’ ‘자금 조달 문제(53.3%)’ ‘스타 제품 부재(46.7%)’가 뒤를 이었고요.

‘인재 부족’의 해결책으로는 ‘비싸게 인수되거나 상장으로 돈 버는 모델이 나와야 한다(73.1%)’가 가장 많았습니다. ‘전공생 늘리고 교육과정도 업그레이드(53.9%)’ ‘비전공 학생의 재교육 늘려야(38.5%)’ ‘의사·대기업·공무원으로 몰리는 환경 바꿔야(30.1%)’ ‘해외 인재 영입(7.7%)’이 다음이었습니다.

‘규모의 경제’를 이룰 방법으로는 ‘대기업 중심으로 팹리스 수요 늘려주는 생태계 조성(68.2%)’이 가장 많았습니다. ‘정부가 팹리스·IT 특화한 투자펀드 만들어야(40.9%)’ ‘대기업이 팹리스 인수하거나 전략·장기적 투자(40.9%)’ ‘팹리스 간 M&A(40.9%)’ ‘대기업의 해외 팹리스 인수(4.6%)가 뒤를 이었습니다.

이와 관련해 왕성호 한국팹리스연합 사무총장(국내 팹리스 중 한 곳인 ‘네메시스’의 대표)은 “대형 팹리스가 나오려면 M&A가 필수”라면서 “대기업이나 중견 팹리스가 기술력은 있으나 글로벌 마케팅능력이 없는 중소팹리스를 인수하면, 규모의 경제와 효율성 향상은 물론, 피인수 기업 임직원이 현금을 받아 엑시트(Exit)할 수 있다”면서 “이런 사례가 몇 개만 나와주면, 젊은 인재가 팹리스에 모이거나 팹리스를 거쳤다가 다른 도전적 스타트업에 합류하게 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글로벌 진출’에 대한 답으로는 ‘팹리스와 동반성장의 중요성을 고객사 경영진이 인식해야(55.0%)’와 ‘칩·소프트웨어 토털 솔루션으로 서비스 강화(50.0%)’가 가장 많았습니다. 다음으로는 ‘우선은 국내에서 사줄 고객 필요(30.0%)’ ‘팹리스도 고객사도 단기 성과에만 매몰되는 구조 바꿔야(20.0%) ‘국내 대기업 고객에만 의존 말고 세계시장 개척(20.0%)’ 순이었습니다.

‘칩·소프트웨어 토털 솔루션으로 서비스 강화’에 대해 김용석 성균관대 전자전기공학부 교수는 “토탈 솔루션을 제공하려면 칩과 소프트웨어의 전체 시스템을 기획하고 상위 개념설계를 할 수 있는 시스템 아키텍트(Architect·아키텍처를 만드는 사람)를 길러야 한다”면서 “지금이라도 장기 육성 계획을 세울 때”라고 말했습니다.

‘정부 지원 부족’의 해결책으로는 ‘지원 기업·종목을 판단하는 인력의 전문성과 업무 연속성을 높여야(76.5%)’가 가장 많았습니다. 이윤식 반도체공학회장(울산과학기술원 교수)은 “담당부처 실무자가 2년마다 바뀌기 때문에 전임자 과제가 흐지부지되고 다시 새 과제가 덧입혀지는 악순환”이라며 “공무원이 여러 부서 돌며 승진하는 코스만 만들지 말고, 인사·시스템을 보완해서라도 업무의 전문성·연속성을 훨씬 더 높여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다음으로는 ‘정부의 세금감면·투자지원 절대액 늘려야(47.1%)’ ‘정부 출연기관 지원 줄이고 민간기업 비중 늘려야(41.2%)’ ‘정부과제가 사업으로 얼마나 연결되는지 끝까지 추적해야(41.2%)’ ‘행정절차·규제에 대한 공무원의 서비스 마인드 높여야(23.5%)’라는 답이 나왔습니다.

‘자금조달’에 대해선 ‘팹리스 펀드 늘리고 스테이지·기간 별로 균형 투자(81.3%)’ ‘융자->회사인수->시너지->자금회수의 M&A 펀드(62.5%)’ ‘반도체에서 거둬들인 세금 일부를 팹리스 육성기금으로(25.0%)’ ‘해외투자 유치(25.0%)’ ‘해외 IR 행사(6.3%)’ 순으로 답했습니다. ‘스타 제품이 나올 수 있는 분야’는 ‘틈새시장용 반도체(64.3%)가 압도적이었고, ‘AI 반도체(28.6%)’ ‘메모리·이미지센서와 협업 반도체(21.4%)’ ‘PC·스마트폰용 CPU·AP(14.3%)’ ‘자율주행용 고성능 프로세서(7.1%)’가 그다음이었습니다.

아시아 최대 팹리스인 대만 미디어텍 건물.

◇국내 팹리스 CEO 30명의 속내 들어봤더니 “한국판 미디어텍 기대하려면, 대기업이 팹리스를 장기 전략 파트너로 여겨야”... 정부는 정책 담당자의 전문성과 업무 연속성을 획기적으로 높여, 자원 배분의 효율만 올려도 소임 다할 수 있어

설문 마지막에 팹리스 CEO들에게 국내 대형 팹리스 탄생을 위해 꼭 필요한 것 하나만 더 꼽아달라고 부탁했는데요. 익명을 전제로 그들의 속내를 들어봤습니다.

한 팹리스는 “미디어텍이 약진한 이유는 미디어텍 고객사는 미디어텍의 팹리스 사업과 경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기술 변곡점에서 새 아이디어를 갖고 더 많은 고객을 만족시키면서 고객사와 함께 성장했다. 우리도 대기업(고객사)이 팹리스를 장기 전략 파트너로 여긴다면, 한국판 미디어텍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물론 수요 대기업도 사정은 있죠. 글로벌 시장에서 싸워야 하기 때문에, 검증된 해외 팹리스 칩을 쓰는 게 안전합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국내 팹리스와 연계하는 게 개발 속도를 높이고 국내 이익을 지키는데 유리할 수 있거든요. 해외 팹리스는 한국만큼 빨리 대응해주지 못하고, 의존이 지나치면 국내 기술기반 약화와 수익원 붕괴로 이어질 우려도 있기 때문입니다.

반도체 설계의 큰 변화, AI·자율주행, 차량의 통합전자제어(스마트폰화)가 시작되는 지금이야말로 토종 팹리스 성장의 적기라는 의견도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최종제품을 만드는 대기업 고객사가 이에 대한 장기적인 기술의 지형과 자체 로드맵을 확실히 그리는 겁니다. 그에 따라 내부에서 할 것과 팹리스 등에 맡길 것을 구분하고, 팹리스와 함께 장기적으로 가는 성장하는 관계를 만들어나가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런 그림을 그리고 효율적으로 역할분담을 시킬 수 있는 중량급 CTO가 절실히 필요할 겁니다. 대기업이 팹리스까지 지원하고 키워야 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하지만 정부는 팹리스를 지원하고 싶어도, 이들의 일감(고객)까지 만들어줄 수는 없거든요. 그건 대기업이 그려주고 정부에 이런 그림이 있으니, 이에 필요한 것들 해결해야 할 문제 등에 대해 정부에 도와달라고 하는 것이 순서일 거라는 겁니다. 그게 된다면 대기업(수요기업)·팹리스·정부의 삼각 공조가 잘 이루어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격변하는 반도체 기술의 맥을 잘 찾고, 성공 가능성 있는 기업·종목에 선택·집중을... 대학 교육과 기존 인력 재교육의 업그레이드도 절실

“국책과제 상당 부분이 팹리스·대학·국가기관에 나눠주기식이고 사업화 검증은 뒷전. 유니콘 팹리스 가능성이 있는 곳에 집중해야 한다” “신규인력 양성에만 초점을 맞추는데, 기존 반도체 인력의 재교육이 절실하다. 회사 다니면서 파트타임으로 필요분야 석·박사 학위 취득할 길이 많이 열렸으면 좋겠다”는 얘기도 팹리스 CEO분들 사이에서 많이 나왔습니다.

한국이 파운드리 강국인데 파운드리에 대한 불만도 꽤 나오더군요. “팹리스 경쟁력은 기승전·파운드리다. 팹리스에 필요한 공정의 국내 파운드리를 제대로 쓸 수 있게 정부가 지원해 줬으면 좋겠다” “삼성이 파운드리에 공들이고 생태계 조성에도 힘쓰지만 주로 해외 팹리스 위주. 국내 중소 팹리스도 언젠가 퀄컴·엔비디아 같은 고객이 될 수 있음을 생각해 달라” “국내 파운드리가 자사 이익 극대화만 몰두한다. 해외 주문이 늘면 기존에 배정된 국내 팹리스의 웨이퍼 물량 줄이고 가격도 임의 인상. 팹리스로 살아남기도 어려운데 파운드리 물량마저 줄어 동료를 내보내야 했다. 메모리·AP가 다가 아니다. 이대로면 수많은 시스템반도체가 중국으로 넘어갈 것 같다” 등의 얘기도 나왔습니다.

정리하자면, 아무리 어렵더라도 한국판 미디어텍이 나오도록 하는 일을 포기해선 안 된다는 겁니다. 물론 미디어텍은 대기업이 강하지 않는 대만을 기반으로 했고, 중국의 전자회사 등 수요기업을 키울 수 있었고, TSMC라는 뛰어난 파운드리가 내부에 존재했다는 각종 이점을 갖고 있었을 겁니다.

한국의 독립 팹리스의 상당수가 이미 경쟁력을 잃었고, 지원 등으로 연명하는 수준이라는 것도 아주 틀린 얘기는 아닙니다. 안되는 기업까지 전부 끌고가야 한다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하지만 지금이 어쩌면 한국이 대형 팹리스, 글로벌 경쟁력을 가진 팹리스를 키울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지 모르거든요. 반도체와 관련된 하드·소프트웨어 기술 양쪽에서 혁명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한국이 이미 쌓아올린 반도체산업의 시스템과 국가자원, 전략적인 기회 등을 잘 활용한다면, 가능성이 전혀 없지는 않다고 봅니다. 국내 팹리스를 일괄 지원해야 한다는 얘기가 아니라, 격변하는 기술의 맥을 잘 잡아서, 그 맥을 따라 성공 가능성이 있는 기업·분야에 대한 선택·집중의 지원과 시스템 개선이 필요해 보입니다. 메모리·파운드리 강국인 한국도 충분히 자랑스럽지만, 팹리스 강국 한국의 미래도 기대해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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