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성현(원효·설총·일연)이 출현하시니 문화가 꽃피었네

2022. 5. 25. 2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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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6월 고을학교는 <경산고을> ]

[프레시안 알림]
경산고을은 역사적으로 원삼국시대 이전 압량소국(압독국)의 문화가 꽃피었던 곳으로 삼국통일과정에서는 신라의 전략적 요충지였으며, 고승 원효와 그의 아들 설총이 배출되었고 고려시대에는 <삼국유사>를 편찬한 일연이 탄생하였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재지사족을 중심으로 유교문화를 꽃피웠고 일제 강점기에는 기존 경산, 하양, 자인 지역이 통합되어 지금의 경산이 탄생하였으며, 대왕산 죽창의거와 같은 민족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되기도 하였습니다. 관내에는 임당동 고분군, 조영동 고분군을 비롯한 많은 문화유적이 산재해 있는 문화유적도시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자연부락인 ‘마을’들이 모여 ‘고을’을 이루며 살아왔습니다. 2013년 10월 개교한 고을학교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섭니다.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하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삶들을 만나보려 합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제2주산지로 알려진 반곡지. 문체부가 ‘사진 찍기 좋은 녹색명소’로 선정한 곳으로 매년 복사꽃 필 무렵에 절정을 이룬다.Ⓒ경산시

고을학교 제86강은 2022년 6월 26일(일요일) 열리며 이날 오전 7시 서울 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출발합니다. 제86강 여는 모임에 이어,

이날의 답사 코스는 서울-청통와촌IC-하양읍(하양향교/환성사/금호서원/허후허조부자정충각)-압량읍(경산병영유적)-경산시(조영동·임당동고분군/경산향교/점심식사)/경산현사직단/도동서원)-남산면(조곡서원/관란서원/난포고택)-자인면(용계서원/자인계정숲/시중당/한장군묘와사당/제석사/자인향교)-서울의 순입니다.

▲<경산고을> 답사 안내도Ⓒ고을학교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제86강 답사지인 경산고을에 대해 설명을 듣습니다.

삼한시대의 압독국
경산의 지형은 남쪽과 북쪽은 산지를 이루고, 중앙부에는 금호강 유역의 평야와 낮은 구릉지가 발달해 있습니다. 동쪽은 금박산과 용산이 영천시와, 동남쪽은 선의산과 구룡산, 용각산이 청도군과, 서쪽은 동학산과 병풍산, 성암산이 대구광역시와, 북쪽은 팔공산 관봉과 환성산, 초례산 등이 대구광역시 및 영천시와 경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물줄기는 경산시의 중앙부를 동에서 서로 흐르는 금호강이 주류 하천으로 여기에 오목천과 남천이 남에서 흘러와 합류하고, 청통천과 신녕천이 북에서 흘러와 합류합니다.

경산의 연혁을 살펴보면 삼한시대에는 압량소국(압독국)이었으며, 102년(파사왕 23) 신라에 합병되어 642년(선덕여왕 11) 압량주를 설치하여 김유신이 군주가 되었고 750년(경덕왕 9) 1군 2현 설치하여 경산은 장산군, 하양은 화성현, 자인은 자인현에 속했습니다. 고려시대에는 940년(태조 23) 군이 현으로 강등되어 장산현이 되고 1018년(현종 9) 장산현과 하양현이 경주부에, 자인현이 안동부의 속현이 되었으며 1310년(충선왕 2) 장산을 경산으로 개칭했고 1317년(충숙왕 4) 국사 일연의 고향이라 하여 복현되었으며 1391년(공양왕 3) 왕비 순비노씨의 고향이라 군으로 승격되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1395년(태조 4) 경산군이 다시 현으로 강등되었고 1601년(선조 34) 경산현, 하양현이 경주부에서 대구부의 속현이 되었으며 1607년(선조 40) 경산현, 하양현이 복현되고 1637년(인조 15) 자인이 복현되었고 1895년(고종 32) 경산현, 하양현, 자인현이 군으로 승격되었습니다.

임당동 고분군과 조영동 고분군
경산에는 선사시대의 유적인 고분군이 있습니다.

경산 임당동과 조영동 고분군은 금호강의 지류인 오목천과 남천 사이에 형성된 해발 50~70m 정도의 얕은 구릉에 있는 삼국시대 고분군입니다. 내부 구조는 대체로 청석인 기반암을 파고 안에 목곽을 안치한 덧널무덤이며, 돌무지덧널무덤, 굴식 돌방무덤, 돌덧널무덤, 독널무덤 등도 다수 확인되었습니다. 출토유물은 경주적 양식을 따르는 토기를 비롯하여, 출자형 입식을 가지고 있는 금동관, 새 날개 모양의 장식을 가진 관모 장식, 장식성이 매우 강한 대도(大刀), 허리띠 장식, 금동제 신발 등이 세트를 이루어 부장되었습니다. 경산지역 최초의 정치집단인 압독국 출신 지배자들의 무덤으로 추정되고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전반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며, 경주 대릉원 일원에서 사용되던 돌무지덧널무덤과 동일한 양식으로 압독국과 신라의 관계 및 신라에 편입된 압독국 유력 세력의 존재 양태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학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조영동 고분군은 임당동 고분군과 함께 압독국 출신 지배자들의 무덤으로 추정된다.Ⓒ경산시

경산에는 수도 서라벌을 수호하기 위한 군사시설과 산성이 있었습니다.

경산 병영유적은 김유신이 압량주군주(押梁州軍主)로 있을 때 군사 훈련장으로 사용하였다고 전하는 유적입니다. 642년(선덕여왕 11) 백제의 의자왕이 신라를 공격하여 40여 개의 성을 빼앗았는데 특히 대야성(합천군)을 백제군이 차지한 것은 신라 입장에서 커다란 타격이었습니다. 이러한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김춘추가 고구려의 연개소문을 만났으나 성과가 없었습니다. 한반도에서 고립되어 가던 신라는 수도 경주를 지키기 위해 김유신을 압량주군주로 삼았습니다. 김유신은 이곳에서 군사훈련을 위한 3개의 연병장을 오목천 주변의 구릉 위에 만들고 백제의 공격에 대비하였습니다.

▲경산 병영유적은 사적 제218호로 김유신이 압량주군주(押梁州軍主)로 있을 때 군사 훈련장이었다.Ⓒ경산시

용산산성은 용산(435m)의 정상을 둘러싼 테뫼식 산성으로, 경사가 완만한 동, 남쪽으로는 돌로 쌓았고 경사가 급한 서, 북쪽으로는 돌과 흙으로 쌓았습니다. 남아있는 성의 총 둘레는 1,481m 이며, 성벽의 높이는 약 1.5∼2.5m이고 동쪽의 성벽은 내외 2중 성벽의 형태를 취하였습니다. 4대문 터 주위에는 문루 등의 건물이, 동남쪽의 모서리에는 장대 혹은 망루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삼국사기>에 김인문이 당나라로부터 돌아와서 군주로 임명되었고, 장산성의 축조를 감독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어 ‘장산성’이 지금의 용산산성으로 파악되어 성을 만든 연대가 삼국시대임을 알 수 있습니다.

금성산성은 금성산(430m) 정상 아래에 축조된 테뫼식 석성으로 정확한 축조 시기는 문헌에 전하지 않습니다. 다만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금성은 현의 남쪽 70리에 있다. 석축으로 주위 2,155척인데, 지금은 폐성되었다.”라는 기록과 성안에서 발견되는 토기나 기와 조각들로 보아 삼국시대에 축조된 이래 통일신라, 고려, 조선 시대에 걸쳐 사용된 것으로 추측됩니다. 금성산은 임진왜란 때 의병들이 활동하던 산으로 전해지고 있기 때문에, 폐성된 이후에 다시 수축하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경산현·자인현·하양현에 읍치구역
경산에는 경산현, 자인현, 하양현에 읍치구역이 있었습니다.

경산향교는 1390년(공양왕 2)에 건립되었으며 1550년(명종 5)에 현령 박세린이, 1633년(인조 11)에 현령 박창이 중수하였고,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당시에는 교복 강개명이 대성전에 봉안된 오성의 위패를 성암산(472m) 석굴 속에 숨겨 소실되지 않았으며, 1684년(숙종 7)에는 현령 홍처공이 구교동에서 신교동으로 이건하였습니다. 전묘후학(前廟後學)의 배치를 하고 있고 소설위 향교로, 대성전에는 5성, 송조4현, 동국18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습니다.

▲경산향교는 1390년, 고려 공양왕 2년에 건립되었다.Ⓒ경산시

하양향교는 1580년(선조 13)에 처음 건립되어 영조 때 크게 고쳤고 1803년( 순조 3)에 대성전을, 1862년(철종 13)에는 대성전과 명륜당을 수리했습니다. 대성전, 명륜당, 동재, 서재, 내삼문, 외삼문 등이 남아 있습니다.

하양 육영재는 1823년(순조 23)에 현감 이태승이 세운 향교의 부속학당으로 유림들의 기부금 을 모아 환성사에 있던 안양실을 옮겨 와 세웠습니다. 육영재는 향교에서 선발한 우수한 인재를 양성하여 과거에 응시하게 하고 상급 학교인 성균관에 진학시키고자 건립한 양사재입니다. 양사재는 주로 관청의 주도로 향교 안에 지어졌으나 하양 육영재는 건립비용과 학자금도 관청의 경제적 지원 없이 유림들이 기증한 논밭과 성금을 육영계, 보인계를 통해 충당하였습니다.

자인향교는 고려 공민왕 때 지었고, 조선 명종 때 재건했으나, 임진왜란 소실되었다가 1615년(광해군 7)에 도천산 아래로 옮겼다가 1728년(영조 4)에 지금 있는 자리에 건립되었습니다. 지금은 대성전, 명륜당, 모성루, 동재 등이 남아 있습니다.

자인계정 숲과 한장군 이야기
자인계정(慈仁桂亭) 숲은 천연보호림으로 지정된 자연 숲으로, 자인면의 주산인 도천산(到天山)에서 뻗어 내린 산줄기 끝에 있습니다. 옛날 계정이라는 정자가 있었다고 해서 계정 숲이라는데, 확실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평지에 가까운 구릉에 이팝나무, 말채나무, 느티나무, 참느릅나무 등이 함께 자라고 있습니다. 이곳에는 조선시대 자인현의 정청이었던 시중당과 한장군 묘, 한장군 사당인 진충묘 등이 있습니다.

한장군은 신라 혹은 고려 때 사람이라 전해집니다. 당시 도천산 일대에는 왜구들이 숨어 살았는데 자주 출몰하여 고을 사람들을 괴롭혔습니다. 이에 한장군은 여장을 하고 그의 누이와 함께 커다란 화관을 쓰고 산 아래 버들못 가에서 춤을 춥니다. 그들 주위에는 광대들이 놀이를 벌이고 구경꾼이 모여들어 흥을 돋우자 숨어있던 왜구들이 신명으로 섞여들었고 한장군은 때를 노려 칼을 빼어들어 못 가의 바위에서 왜구들을 참수시켰습니다. 한장군과 누이가 왜구를 유인하기 위해 춘 춤을 여원무(女圓舞), 그들을 참수시킨 바위를 참왜석 혹은 검흔석이라 부릅니다. 1968년 자인중고등학교의 본관 신축 공사를 위해 땅을 파헤쳤을 때 두개골이 든 석실묘가 발견되었고, 사람들은 이를 한장군의 실묘라 확정했으며 이듬해 5월 한장군은 이곳 계정 숲에 모셔졌습니다. 한장군의 묘 옆에는 장군의 위패를 모신 사당 진충사가 있으며 이외에도 경산 곳곳에 한당이 많이 있습니다.

▲자인계정 숲은 천연보호림으로 지정된 자연 숲으로 이팝나무, 말채나무, 느티나무, 참느릅나무 등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경산시

시중당(使衆堂)은 자인현의 정청으로, 무금헌(撫琴軒)이라고도 합니다. ‘시중(使衆)’이라는 명칭은 <대학>의 “자(慈)라는 것은 백성을 부리는 바이다(慈者 所以使衆也)”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입니다. 시중당은 자인현감으로 부임한 임선백이 1637년(인조 15) 관상리에 건립한 후 읍치가 원당리, 북사리 등으로 옮겨질 때마다 시중당도 이건되었으며 현재의 시중당은 1870년(고종 7) 건립된 것입니다. 시중당의 편액은 1763년(영조 39) 자인현감 정충언이 쓴 것입니다. 자인현 지역에 남아 있는 유일한 관아 건물로서 역사적 가치가 높습니다.

원당리 비석군은 조선후기 자인현감들을 기리기 위해 세운 3기의 선정비입니다. 서부리 자인계정 숲에도 19기의 자인현감 선정비가 있는데, 원당리 비석군의 선정비들이 시기적으로 앞섭니다. 1637년(인조 15) 복현된 자인현의 초창기 현청이 원당리에 소재하였기 때문입니다.

자인계정 숲 비석군은 조선 시대부터 개항기까지 경상도관찰사, 경주부윤, 자인현감, 자인군수 등을 지낸 관료 혹은 지역 인물에 대한 총 31기의 선정비 및 공덕비입니다. 자인현이 1637년(인조 15) 복현되기 전까지 경주부의 속현이었던 관계로 경주부윤의 선정비도 남아 있습니다.

사직단(社稷壇)은 지방현에서 관아, 향교와 더불어 중요한 시설이었습니다. 지방의 사직단은 사단과 직단이 있는 도성과 달리 사와 직을 한 단으로 같이하고, 사는 단 위 동쪽 가까이에, 직은 단 위 서쪽 가까이에 두었습니다. 사직단은 일제 통감부가 1908년 칙령으로 폐지시켜 현재 전국에 남아 있거나 복원된 곳은 서울과 대구 노변동, 산청군 단성, 창녕, 남원, 보은군 회인 등 6곳 정도이며 모두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경산현 사직단에 대한 문헌기록은 1871년(고종8)에 간행된 <경산현읍지>에 “경산현 서쪽 7리 위치에 있다(在縣西七里)”는 내용이 있으며, 경산의 고지도에도 사직단이 읍치의 서쪽에 표시된 것이 확인됩니다. 1999년 노변동 고분군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사직단 터가 확인되어 ‘노변동 사직단’으로 지정되었으며 노변동 사직단 발굴 터를 참고하여 2019년 삼성현역사문화공원 내에 새롭게 건립하였습니다.

하양현 사직단은 무학산(하양현 진산)의 남쪽 사면부에 자리 잡고 있고, 방형으로 둘려진 담장 안에 제단이 설치된 형태로 제단의 북서쪽 모서리 부분에는 예감이 있으며, 남쪽에는 문지가 있고, 이외에 보도, 배수로, 외곽담장 등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사직단의 조성 시기는 암거에 사용된 평기와의 문양으로 볼 때 16세기 전후로 추정됩니다. 당초의 모습은 잃었으나 <국조오례의>에 나와 있는 사직단 배치의 전형이 잘 남아 있어 향후 복원의 귀중한 자료가 될 것으로 판단됩니다. 1905년 하양군에서 만든 사직단의 진설도와 홀기(의식의 순서 기록)가 현재 하양향교에 전해지고 있습니다.

설총을 모시는 도동서원
경산에는 재지사족들의 서원과 고택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금호서원(琴湖書院)은 세종 때 좌의정을 지낸 문경공 허조를 봉양하기 위해 1684년(숙종 10)에 건립한 서원입니다. 1724년 사이동으로 이건했다가 1790년 정조 때 준도문(遵道門)이라는 편액을 받았습니다. 서원철폐정책으로 1871년 철거되었다가 1913년 현재의 자리에 다시 건립되었습니다. 허조는 조선 초기 유학자로 세종 30년간을 태평성대로 이끈 조선왕조의 명제상으로 조선의 통치기본 법전인 경제원과 속육전을 수찬했으며, 유교국가의 통치이념인 국조오례의와 사례의를 찬정하고, 석전의식을 개정하였습니다.

조곡서원(早谷書院)은 1794년(정조 18) 탐진 안씨 후손들이 고려의 16공신인 오성군 안우와 세종 때 용비어천가 제작에 큰 힘을 보탰던 문정공 안지를 배향하기 위해 건립한 서원으로 1798년에 사액서원이 되었으나 1868년(고종 5) 서원철폐정책에 따라 훼철되었다가 1934년부터 서원 석채례를 지냈습니다. 다른 서원과 달리 한 집안의 후손들이 선조들의 업적을 기려 국가의 허가와 지원을 받아 건립한 점이 특이합니다. 북쪽에서부터 출입문인 향도문, 동재와 서재, 강당인 상경재, 내삼문인 경앙문, 사당인 충현사가 나란히 위치하고 있는 전형적인 전학후묘의 배치입니다.

관란서원(觀瀾書院)은 회재 이언적을 배향하는 서원으로, 1659년(효종 10) 이승증의 유허지에 건립되어 1715년(숙종 41)과 1743년(영조 19)에 사당을 중수했습니다. 1868년(고종 5)에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10년 맹구대와 삼화당이 있던 자리에 건물을 복원하였습니다. 이언적은 경주 출신으로 1514년(중종 9)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관직은 좌찬성에 올랐으며 1610년(광해군 2) 문묘에 종사되었고, 경주의 옥산서원 등에 제향 되었습니다.

이승증은 만년에 경주의 속현이었던 자인현에 삼회당(三會堂)과 어초와(漁樵窩)를 지었으며, 인근에 맹구대와 관란대를 축조하였습니다. 이승증은 이곳에서 자신을 찾아 온 수백 명에 이르는 선비들에게 학문을 가르쳤다고 합니다. 이런 이승증을 기리고자 별업에 원우를 짓고자 하였으나 1653년(효종 4) 자인현이 경주부에서 이탈하여 복현됨에 따라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대신 1659년에 그의 호를 딴 관란서원을 짓고, 1660년에 이언적의 위패를 봉안하였습니다.

용계서원(龍溪書院)은 1700년(숙종 26)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최문병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의사를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가 1712년에 용계서원으로 변경하였고 1868년(고종 5)에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14년 사림의 공의로 복원하였습니다.

용계서원(龍溪書院)은 자인지역 출신의 의병장 최문병을 제향하는 서원으로, 1712년에 충현사로 건립되었습니다. 최문병은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자인지역 의병장으로 추대되어 하양, 영천, 청도 등지에서 활약하였습니다. 관직은 감목관을 지냈으며, 한성우윤에 증직되었습니다. 경내의 건물로는 묘우, 신문, 강당, 전사청, 동재와 서재, 정문, 주사 등이 있습니다.

▲설총 영정Ⓒ경산시

도동서원(道東書院)은 설총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으로, 서원에는 설총신도비와 단소가 있습니다. 설총은 중국의 경서를 훈해 하였고, 이두문자의 창시자 혹은 집대성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도동서원의 이름이 도동(道東)인 것도, 유학의 도가 설총으로 인해 동쪽에 처음 꽃피웠다는 의미를 나타내기 위한 것입니다. 동쪽은 중국의 동쪽, 즉 우리나라를 가리킵니다.
▲도동서원은 이두문자의 창시자 혹은 집대성자로 알려진 설총을 제향하는 사당이다.Ⓒ경산시

난포고택(蘭圃古宅)은 임진왜란 때 전라도도사로 전주를 방어했던 난포 최공철이 1545년(명종 1)에 지은 집이라고 하는데, 건축양식이나 기법으로 보아서 대략 17세기를 전후한 시기의 집으로 보입니다. ‘가경 14년’(1809)이라고 씌여진 막새기와가 발견되어, 1809년(순조 9)에 보수한 것으로 보입니다. 원래는 정침, 아랫사랑, 중사랑, 방아실, 행랑채, 마루 그리고 사당 등이 고루 갖추어진 집이었으나, 지금은 정침, 행랑채, 사당만 남아있습니다.

원효가 창건하고 설총이 자란 반룡사
경산에는 신라시대에 창건된 사찰이 많이 있습니다.

원효는 617년(진평왕 39)에 서라벌 압량군 자인땅 불지촌에서 태어났는데 그곳은 집안이 아니라 불지촌 북쪽 밤나무골의 밤나무 아래였습니다. 밤나무에 남편의 옷을 걸어 가리고 그 속에 누워 해산하여 그 밤나무를 사라수라 하고 그 나무 열매를 사라율이라 했습니다.

▲원효 영정Ⓒ경산시

원효는 출가한 뒤에 살던 집을 희사하여 ‘초개사(初開寺)’를 짓고, 태어났던 밤나무가 있는 곳에 ‘사라사(娑羅寺)’를 지었습니다. 제석사는 사라사 터에 지어진 사찰입니다. 제석사에 남아 있는 석조 좌불과 부서진 탑신, 석등 연화대석 등이 신라말기의 것으로 추정됩니다. 사라사의 사라는 신라의 국호인 사로(斯盧)와 같은 음과 뜻으로, 사라사는 부처님의 재생을 이어받은 신라의 절이라는 의미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반룡사는 원효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고 그와 요석공주의 설화가 전해오며 그 사이에서 난 설총이 자란 곳이기도 하다.Ⓒ경산시

환성사(環城寺)는 신라 흥덕왕 10년(835)에 심지왕사가 창건하였고 고려 말에 화재로 소실되었으며 1635년(인조 13) 신감대사가 새로 지었으며 1897년(고종 광무 원년)에 다시 중창했습니다. 매우 번성하던 사찰이었으나 대웅전 앞에 자라가 살던 연못을 메우고 난후 화재가 나면서 사찰이 쇠락하였다고 합니다.

대웅전은 환성사의 중심 건물로 앞면 5칸, 옆면 4칸 규모이며,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꾸몄으며 공포는 다포 양식입니다. 1976년 낡은 목재를 갈아내고 단청 무늬와 퇴색된 색채에 비슷하게 보수하였으며, 바깥쪽 단청은 새로 칠하여 옛 것과 새 것의 색이 섞여있는데 건물의 구조나 단청이 대체로 예스러움을 지니고 있는 건축물입니다.

대웅전 수미단은 불교에서 세계의 중심에 있다고 여기는 상상의 산인 수미산을 본떠 만든 불상을 모신 대좌를 말합니다. 내부의 일부 부재에는 묵서가 남아 있고 극락정토에 사는 상상의 새인 가릉빙가를 비롯하여 다양한 동물과 새, 꽃 등이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습니다. 제작된 시기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대웅전이 1635년에 고쳐지어진 점과 조각장식이 영천 은해사 백흥암 수미단과 비슷한 점을 근거로 17세기 전반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환성사 장방형석조는 자연암반을 이용하여 제작되었는데 주변이 땅에 묻혀있어 외곽 형태와 규모는 알 수 없고 노출된 외벽의 두께는 약 21㎝ 안팎, 내부 깊이는 38㎝이며 동남쪽 바닥 모서리에 직경 7㎝의 배수구가 뚫려 있고, 그 상단에 물이 가득 찼을 때 밖으로 배출되도록 직경 6㎝의 반원형 출수구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이 석조는 그 형태나 제작방식으로 미루어 환성사의 창건시기인 통일신라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환성사 주형석조는 자연 암반을 이용하여 배 모양으로 만든 석재 수조로 종이를 제작하는데 활용되었습니다. 조선후기 모든 사찰에 다양한 형태의 사역(寺役)이 부과되었는데 이에 따라 환성사는 조선 후기에 공납용 종이를 제작하게 되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제지용 수조는 나무로 제작하였으나, 한 번에 많은 양을 처리해야 할 경우 내구성이 강한 돌로 제작하기도 하였는데 닥나무를 불리고 쪄서 껍질을 벗기는 작업에 유용했기 때문입니다.

불굴사(佛窟寺)는 690년(신문왕 10)에 창건한 사찰로 삼층석탑과 석조입불상이 있으며, 원효가 수련한 석굴이 있습니다. 삼층석탑은 높이 7.5m로 2단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전형적인 신라석탑의 양식을 따르고 있으며 탑 전체의 비례가 돋보이고, 조형적으로 수작이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일연 영정. 경산고을은 그와 함께 원효, 설총의 탄생지이다.Ⓒ경산시

반룡사(盤龍寺)는 구룡산 자락에 위치한 사찰로 660년(문무왕 1)에 원효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임진왜란 때 소실된 뒤 중건돼 5개의 암자와 25개의 당우가 세워진 거대사찰이었으나 1916년 화재로 완전히 소실된 것을 1920년에 운학이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반룡사에는 원효와 요석공주의 설화가 전해오며, 그 사이에서 난 설총이 자란 곳이기도 합니다. 당시 무열왕 내외는 딸과 손자를 만나기 위해 지금의 반룡사 뒷산을 넘어왔는데, 때문에 이 길을 왕재라고 한다.
▲갓바위 부처님은 팔공산 남쪽 관봉(冠峰)의 정상에 모셔진 좌불상이다.Ⓒ경산시

갓바위 부처님은 팔공산 남쪽 관봉(冠峰)의 정상에 병풍처럼 둘러쳐진 암벽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좌불상으로 관봉을 ‘갓바위’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그것은 이 불상의 머리에 마치 갓을 쓴 듯한 넓적한 돌이 올려져 있어서 유래한 것입니다. 투박하지만 정교한 두 손은 무릎 위에 올려놓았는데, 오른손 끝이 땅을 향한 항마촉지인과 유사한 손모양은 석굴암의 본존불과 닮았으나 불상의 왼손바닥 안에 조그만 약 항아리를 들고 있는 것이 확실해서 약사여래불을 표현한 것으로 보입니다. 풍만하지만 경직된 얼굴, 형식화된 옷 주름, 평판적인 신체는 탄력성이 배제되어 8세기의 불상과는 구별되는 9세기 불상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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