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적] 대통령의 시야
그도 “우스갯소리”라고 했으니, 지금도 누구라고 말하긴 그렇다. 2001년 12월, 민주당 대선 레이스에서 노무현 돌풍이 불기 전이다. 한 경선 주자가 안경 얘기를 꺼냈다. “(당시까지) 윤보선·최규하를 빼면 안경 쓴 대통령이 없었다”고. 모름지기 대통령은 시야가 넓고, 멀리 보고, 역사적 통찰력이 깊어야 한다고 했다. 그가 하고픈 말은 대통령의 눈이 아니라 됨됨이였다. 안경을 빗댄 건 누가 봐도 엉뚱하고 억지스럽지만, 자칭 “개똥철학”엔 뼈가 있었다.
‘대통령의 시야’ 얘기를 20년 만에 다시 들었다. 지난 24일 윤석열 대통령이 국회의장단을 만난 자리였다. 대선 전후의 ‘젠더 갈등’에 유감을 표한 김상희 국회부의장에게, 윤 대통령은 “정치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돼 시야가 좁아 그랬던 것 같은데 이제 더 크게 보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공직 후보자로 검토한 여성의 평가가 약간 뒤졌는데, 한 참모가 “여성이어서 평가를 제대로 받지 못한 게 누적돼 그럴 것”이라고 한 일화도 소개했다. 그러면서 “그때 정신이 번쩍 들었다”고 했다. 능력주의를 표방하며 여성 할당·안배를 하지 않겠다던 것과는 결이 달랐다.
윤 대통령 인사는 ‘서·오·남’(서울대·50대·남성) 세 글자로 평가된다. 그중에서도 여성은 특히 적다. 장관 18명 중 3명, 차관(급) 41명 중 2명, 대통령실 실장·수석·비서관 46명 중 3명에 그쳤다. 세 곳을 합쳐도 여성은 7.6%에 불과하다. 한·미 정상회담 공동기자회견장에서도 “(한국) 내각에는 여자보다 남자만 있다”(워싱턴포스트 기자)는 말을 들었으니, 윤 대통령도 그 치우침의 심각성과 유리천장 문제를 뒤늦게 알았다고 한 것일까. 시선은 낙마한 교육·보건복지부 수장과 여러 공직의 후속 인사에 쏠릴 수밖에 없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우째 이런 일이…”라며 개탄한 게 있다. 취임 초 공직 인사를 하려니, 상위 후보군에 ‘TK(대구·경북) 사람’만 꽉 차 있었다고 했다. 박정희·전두환·노태우 시대 30년간 TK가 고위직을 독점해온 후과였다. 이게 다 능력의 잣대였을까. 군 사조직(하나회)과 ‘육사 순혈주의’부터 깬 개혁도 그 물음에서 시작됐다고 한다. 대통령의 인사는 지역·성·세대 통합에 대한 철학과 의지에 달려 있다.
이기수 논설위원 ksl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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