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량한 사람들도 빠지는 성차별 함정 [소셜 코리아]

김영미 입력 2022. 5. 25.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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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셜 코리아] 지속가능 사회를 위한 성평등 돌봄분업, 돌봄 제공자 차별금지

한국의 공론장은 다이내믹합니다. 매체도 많고, 의제도 다양하며 논의가 이뤄지는 속도도 빠릅니다. 하지만 많은 논의가 대안 모색 없이 종결됩니다. 소셜 코리아는 이런 상황을 바꿔 '대안 담론'을 주류화하고자 합니다. 구체적으로는 ▲근거에 기반한 문제 지적과 분석 ▲문제를 다루는 현 정책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거쳐 ▲실현 가능한 정의로운 대안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소셜 코리아는 재단법인 공공상생연대기금이 상생과 연대의 담론을 확산하고자 학계, 시민사회, 노동계를 비롯해 각계각층의 시민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열린 플랫폼입니다. 기사에 대한 의견 또는 기고 제안은 social.corea@gmail.com으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기자말>

[김영미]

구조적 성차별은 없다는 말에 문득 3년 전쯤에 기업문화 연구를 위해 인터뷰했던 한 대기업 팀장이 떠올랐다. 그는 자신이 성차별에 반대하며 오히려 여성을 도와주려고 애쓰는 사람이라며 이렇게 말하고 하하하 웃었다.
 
"우리 팀 여직원들한테 항상 이렇게 말해요. '난 너를 여자로 안 봐. 남자로 봐. 나처럼 열심히 하면 승진이든 뭐든 팍팍 밀어줄게.' 그러자 그 여자팀원이 '팀장님 저 그러면 결혼 못해요'라고 울상을 짓더라고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그 팀장이 고마워서 선량하게 웃는 그 모습을 한참 바라봤다. 한국의 젠더 불평등과 초저출생 현상의 뿌리가 같음을 너무나 잘 보여주는 인용구를 제공해준 그 팀장을…

사실 그 기업에서 "여직원들이 일은 확실히 잘 하지만 과장급을 넘어서면 아랫사람을 챙기고 리드하는 건 못한다"라며 진지하게 얘기했던 중년의 남성 이사도 선량해 보였고, "여직원들은 결혼하고 나면 집에 가서 밥해줘야 할 것 같아서 일 시키기가 미안하다"라던 여성 이사도 선량해 보였다. 선량한 그들은 대개 끝에 여자를 차별해서 하는 얘기가 아니라는 점을 덧붙이곤 했다. 이건 차별이 아닐까?

돌봄 책임 때문에 당하는 차별

한국에서는 아니지만 돌봄 제공자 차별 금지가 안착되어 있는 미국과 유럽에서라면 차별이 될 수 있다. 우리에게는 아직 낯선 개념인 돌봄 제공자 차별 금지는 성별을 불문하고 가족을 돌보는 노동자가 돌봄의 책임 때문에 차별을 당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의미한다. 미국에서는 가족 돌봄 책임 차별 금지(FRD)로 부른다.
 
 기업 내 차별은 사실 여성에게 기대하는 성역할, 가족 내에서 양육과 돌봄을 주로 담당하는 돌봄제공자 역할에 대한 차별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 셔터스톡
 
FRD는 2000년대 초 미국에 해당 소송이 처음 등장하기 시작한 후 12년 만에 소송건수가 약 6배로 증가할 만큼 빠르게 자리 잡았다. 임신, 출산이나 육아휴직을 이유로 해고하는 경우, 자녀의 육아부담을 이유로 여성에 대한 승진을 거부하는 경우, 남성 근로자들의 육아휴직 요구를 거부하는 경우 등이 대표적인 차별에 포함된다.

나아가 2007년 미국의 고용평등기회위원회(EEOC)는 "가족 돌봄 책임을 가진 근로자들에 대한 불법적 차등 대우 금지 집행 가이드"를 통해 돌봄 제공자에 대한 고정관념에 기초한 고용주의 판단이나 행동이 모두 차별이라는 점을 확실하게 했다.

예컨대 여성들이 돌봄 책임 때문에 업무에 몰입하지 못하며 무능하다고 가정하는 것, 돌봄 책임이 있는 여성들은 직장에서 일하는 시간보다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을 선호하거나 그래야 한다고 가정하는 것, 남성들은 돌봄 책임을 지지 않거나 져서는 안 된다고 가정하는 것이 모두 돌봄 제공자에 대한 고정관념이며 이에 기초한 판단이나 행동은 차별이라는 것이다.

오늘날 기업조직에서 나타나는 차별은 사실 여성에게 기대하는 성역할, 가족 내에서 양육과 돌봄을 주로 담당하는 돌봄제공자 역할에 대한 차별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이른바 모성 벌칙이다.

"누가 이런 차별을 하는가" 하는 질문은 크게 의미가 없다. 우리 모두가 조금씩 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어떤 조건에서 이런 차별이 더 두드러지게 나타나는가 하는 것이다.

돌봄 부담이 없는 사람, 그래서 24시간 365일 회사에 헌신할 것으로 기대되는 사람을 표준으로 설정한 채로 업무를 나누고 평가의 규칙을 정하는 조직 문화 또는 과노동이 일상화된 조직 문화에서 돌봄 제공자에 대한 차별이 쉽게 나타난다. 그리고 그 결과 조직 내 성별 다양성은 제로에 가까워진다. 조직 문화와 일하는 방식을 바꾸기 전에는 해소하기 어려운 문제다.
   
 무급 돌봄노동에 대한 사회적 인정을 위해서는 성별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성평등한 돌봄분업을 추구할 필요가 있다. 육아휴직 중인 남성 노동자.
ⓒ 김지현
 
무급 돌봄노동에 대한 사회적 인정 필요

그런데 돌봄 제공자에 적대적인 조직이 오래도록 번영할 수 있을까? 더 중요하게는 돌봄을 경시하는 사회가 지속가능할까?

지난 팬데믹 2년간 돌봄 경제, 돌봄 민주주의 등 재생산과 돌봄을 중심으로 대안적 사회를 그리는 작업들이 많은 주목을 받았다. 문제의 핵심은 돌봄의 가치가 오랫동안 그리고 여전히 사회적으로 제대로 인정받지 못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현재 우리 사회가 경험하고 있는 두 가지 커다란 사회 문제, 젠더 불평등과 초저출생 문제와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모성 벌칙은 아기 벌칙이기도 하다.

<소셜 코리아>에 실렸던 글 "돌봄노동, 제값 치르지 않으면 죗값 치른다"(2022. 1. 26)는 유급 돌봄 노동자들의 저임금화를 막고 돌봄 노동의 시장가치를 재평가하자는 제안을 담고 있다. 매우 중요한 제안이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유급 돌봄 노동의 가치평가와 더불어 가족이 제공하는 무급 돌봄 노동에 대한 사회적 인정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지만 돌봄이 여성의 몫이라는 성별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성평등한 돌봄 분업을 추구하고, 돌봄 제공자들에 대한 차별 금지를 시도해볼 수 있다.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 열풍 속에서 사회적 지속가능성을 고민하는 기업이라면 적극적으로 호응하지 않을까.
 
 김영미 / 연세대 사회학과 부교수·소셜 코리아 운영위원
ⓒ 김영미
 
*필자소개: 이 글을 쓴 김영미 연세대학교 사회학과 부교수는 연세대 젠더연구소장, 고등교육혁신원 혁신교육센터장을 맡고 있으며, <소셜 코리아> 운영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관심있는 연구 분야는 노동시장과 기업조직 내 젠더불평등, 불평등과 인구변동입니다. 그밖에 젠더관점의 사회혁신 교육에 관심이 있으며 다양성과 포용성 전문가네트워크 구성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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