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춘 손이 다시 움직인 뒤에..'환희의 신작' 빚어낸 도자 명인 윤광조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경주 안강읍 도덕산 산골 자락에서 20여년간 작업하며 국내 최고의 도자기 명인으로 우뚝 선 윤광조(76) 도예가는 아이처럼 웃음 지었다.
"제 작업 보면 아시겠지만, 딱딱한 흙판 표면에 못으로 몇십년간 무늬를 새기는 '각'이란 걸 해왔어요. 오래 하다 보니 어깨에 염증이 번졌어요. '엘보' 같은 거죠. 지난 2년간 흙과 도자 만지던 손을 제대로 쓰지 못했어요. 괴로웠지요. '앞으로 못 만지는구나. 뭘 해야 하나' 고민했어요."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그저 기쁜 거예요. 다시 손을 움직여 주무르고 만질 수 있으니까…. 흙과 불, 물, 그리고 내 몸까지 평생 함께한 것들 모두에 감사한 마음이 생겨났어요. 나도 모르게 환희를 느껴 손바닥을 더듬으며 감사하다고 표시한 것이 절로 작품이 되었답니다!”
경주 안강읍 도덕산 산골 자락에서 20여년간 작업하며 국내 최고의 도자기 명인으로 우뚝 선 윤광조(76) 도예가는 아이처럼 웃음 지었다. 지난 16일 오전 서울 한남동 가나아트 나인원 갤러리 개인전 현장에서 만난 대가는 구석의 각진 분청사기 항아리 한점에 내내 눈길을 내리쏟았다. 회색빛 화장토의 흔적들이 얼룩진 투박한 표면에 온통 손바닥 자욱이 찍힌 새 연작 <환희>였다.
윤 작가는 1973년 홍익대 미대 공예학부를 졸업한 이래 이 땅 전통 유산의 수호자였던 미술사가 혜곡 최순우(1912~1984)의 인도를 받아 자유로운 상상력이 맴도는 현대 분청사기의 길로 들어섰다. 그 뒤로 5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는 동안 흙판을 치거나 마구 주무르면서 거칠게 분청의 세계를 탐닉했다. 이지러지고 톡 튀어나온 모양새의 날 선 분청사기 표면에는 지푸라기나 대나무 꼬챙이, 못을 휘휘 그어 분방한 무늬를 표현했다. 다른 도예가들은 엄두도 내지 않는 형상과 기법으로 세상의 혼란(<혼돈> 연작)과 진중한 산덩어리의 움직임(<산동>)을 유유히 표현해왔다. 이런 그에게 최근 병고를 치른 뒤 새로운 몸의 감각을 입힌 신작이 태어났다는 건 더욱 각별한 기념비적 사건이 되었다고 한다.
“제 작업 보면 아시겠지만, 딱딱한 흙판 표면에 못으로 몇십년간 무늬를 새기는 ‘각’이란 걸 해왔어요. 오래 하다 보니 어깨에 염증이 번졌어요. ‘엘보’ 같은 거죠. 지난 2년간 흙과 도자 만지던 손을 제대로 쓰지 못했어요. 괴로웠지요. ‘앞으로 못 만지는구나. 뭘 해야 하나’ 고민했어요.”
작업의 생명줄인 손이 마비되는 고통을 겪은 그는 눈 질끈 감고 재활 치료를 꾸준히 받았다. 최근 어깨가 풀리면서 영영 회복하지 못할 것 같던 손의 감각이 돌아왔다. 다시 작업장에서 흙덩어리를 만지게 되자 재생의 기쁨에 휩싸였는데, 너무 좋아서 흙과 초벌구이한 도자 덩어리들을 손으로 마구 더듬다가 도자 용기 표면에 손자국을 여기저기 찍는 신작의 형상들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고 한다.
전시장엔 <산동> <혼동> 연작 같은 기존 구작들과 섞여 크고 작은 <환희> 연작 2점이 나왔다. 작가는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신작이 하나 더 있다면서 들머리 쪽 작품 하나를 손짓했다. 허연 화장토 흙물이 폭포수처럼 힘차게 곳곳으로 튀어 나간 표면의 자취들을 배경으로 ‘물을 바라본다’는 뜻의 ‘觀水’(관수) 글자가 또박또박 정자체로 새겨진 ‘관수’병이었다. 고일 때 머무르며, 넘칠 때 약동하는 물의 본성을 표면의 화장토 흔적들로 드러내는 이 작품은 어깨와 손의 아픔에 힘들어하면서도 빚어낸 산물이다. 최근까지 빚어온 <산동> 연작의 끝물에 나온 것으로, 한쪽 방향으로 내달려가는 듯한 산세의 움직임을 형상화하면서도 날카롭고 각이 졌던 이전 작업과 달리 한결 부드럽고 원숙한 형상을 빚어냈다고 작가는 설명했다.
“‘관수’병을 빚는 작업 과정이 제겐 말년 작업의 변모를 가져다 준 계기가 됐어요. ‘관수’의 표면을 보면 알게 됩니다. 물도 고였다가 넘치면서 맑아지고 넓어지듯 몸의 아픔을 겪고 쉬었던 저도 이제 다시 기운을 내어 원만한 관조의 세계로 나아가고자 합니다.”
전시는 29일까지 이어진다.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 한미일 뭉치자, 북중러 반격…동아시아 ‘거대한 체스판’으로 변했다
- 손흥민의 ‘자기 창조력’…치명적 9번 되기까지 7년의 진화
- 이준석, 선거운동원 등록 이어 사전투표도 계양을에서
- 중국 ‘수용소 공안파일’ 해킹됐다…“위구르족 도망치면 쏴죽여”
- 법원 “강용석 빼고 경기지사 후보 TV토론회 방송 안 돼”
- 책상 ‘쾅’ 치고 나간 윤호중…박지현 “이럴 거면 왜 앉혀놨나”
- 한덕수 “중대재해처벌, 국제적 기준에 맞춰야”…법 개정 시사
- 손흥민 만든 아빠, 기본기만 7년 시켰다…완벽한 실력의 바탕은
- 윤핵관이 던진 ‘국정원 인사검증’…국내정보 수집 물꼬 트나
- 코인→주식 전이효과 더 커졌다…‘루나 리스크’ 옮겨올라 촉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