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종훈의 근대뉴스 오디세이] 한강 철교가 품었던 100년전 이야기들

2022. 5. 25.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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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종훈 19세기발전소 대표·아키비스트

1917년 사람 오가는 최초의 인도교 완공 시민 더위 식히고 남녀 밀회 장소 역할도 통행 편해졌지만 극단적 선택도 이어져 '소년군' 동원… 다리 지키며 사고 예방

1900년 7월 5일 '한강 철교'가 4년여의 공사 끝에 개통됐다. 기차만 다닐 수 있는 철교였다. 이어 한강에 다리들이 잇따라 건설됐다. 다리 위로 수많은 사람과 물건들이 오갔고, 덩달아 갖가지 사연도 생겨났다. 그 사연들을 찾아 100년 전 한강 다리로 가보자.

1922년 6월 15일자 매일신보 기사다. "한강 인도교는 청년 남녀의 결사장이라고도 하나 요즈음은 저녁 바람을 좋아하는 남녀의 납량대(納凉臺)라고도 할 수 있는데, 그 외면(外面)은 강상청풍(江上淸風)에 소요(逍遙)하러 나온 사람들도 있겠지마는 그 내면(內面)에는 학생인 듯도 하고 아닌 듯도 한, 아직 이팔청춘 남녀의 밀회장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한강 인도교는 1917년 10월 완공됐다. 한강 최초로 사람이 오갈 수 있는 다리였다. 노량진과 용산을 이었다. 조선시대 정조가 부친 사도세자의 묘소가 있는 수원 화성으로 행차할 때 놓았던 배다리 행로에 다리를 만들었다. 한강 인도교는 당시 대표적인 랜드마크였다. 시민들이 더위를 식히는 곳이었고, 남녀들의 밀회 장소 역할도 했다.

그로부터 19년 뒤인 1936년, 도선장이 있던 광나루에 광진교가 완공되면서 한강에는 모두 3개의 다리가 놓이게 됐다. 한강 인도교의 경우 1950년 6월 28일 새벽 북한군의 도강을 막기 위해 폭파됐다. 1958년 복구와 함께 이름이 한강대교로 바꿨다.

이렇게 한강에 다리가 놓여져 통행이 자유롭게 됐지만 문제는 자살이 많이 발생한다는 점이었다. 한강 다리에서 몸을 던지는 일이 많아진 것이다. 1922년 6월 5일자 매일신보에 실린 '한강 철교에 또 투신자'란 제목의 기사다. "지난 6월 2일 오후 10시경에 조선 부인 하나가 지나서 한강 철교 옆으로 초연히 가는 것을, 파출소 순사가 보고 몰래 뒤를 쫓아간 즉, 철교 한 가운데에 이르러서 무슨 말인지 중얼거리고 투신하고자 하므로 빨리 구조해 본서(本署)로 동행하였다는데, 그 여자는 경성호텔에 있는 차부(車夫) 최모(崔某)의 처 19세 된 여자인 바, 남편의 학대로 비관한 결과로 판명되어 3일에 그 남편을 불러 설유(說諭)한 후 데려가게 하였다더라."

한강 투신 자살 기사는 이후 숱하게 지면을 장식했다. 자살의 원인은 다양했다. "경성부 내 견지동 118번지에 사는 김원모(金元模, 18)는 이왕직 미술공장의 직공으로 있는데, 그 계모(繼母)되는 여자의 학대가 날로 심한 까닭으로 항상 이 세상을 비관하더니 9일 아침 새벽에 한강 철교에서 몸을 양양(洋洋)한 한강에 던져 돌아오지 못하는 황천(黃泉)의 객(客)이 되었더라." (1922년 5월 11일자 매일신보)

'한강 철교에서 떨어져 자살한 그 면서기'란 제목의 1921년 7월 29일자 매일신보 기사는 박봉(薄俸)을 비관하고 자살한 면 서기를 다루고 있다. "충남 천안군 천안면 면서기 이병국(李炳國, 33)은 지난 24일 오전 0시 50분에 한강 철교에서 투신자살을 하였다는데, 검시(檢屍)한바, 자살인이 가진 물건 중에는 형에게 보낸 유서 한 장이 있는데, 그 뜻은 박봉 생활을 하여 가며 부모를 봉양하기가 여의치 못함을 비관하고, 세상에 살기 싫어서 그같이 빠져 죽은 일이므로, 그 사체는 그 형에게 인도하였다더라."

이에 한강 다리에서의 자살 예방책이 쏟아져 나왔다. 1922년 6월 4일자 매일신보에 실린 '한강 철교의 투신자살 예방책'이란 기사다. "용산 경찰서에서도 한강 인도교 변에 목찰(木札)을 세우고 '죽고자 하는 결심과 생각을 그만 두라'는 선전을 하면 어떠한가…(중략)…수상한 사람이 통행하는 때, 특히 밤중에는 순사가 미행을 하여 감시하는 바, 거년(去年; 작년) 중에 9명을 구조한 일도 있으니…(중략)…당국은 철교 난간을 더 조금 높다랗게 올려 세우고 취체(取締; 단속)를 지금보다 더 엄중히 할 일이라 하겠는바…"

용산 경찰서는 자살 예방용 목패(木牌)에 담을 글을 일반으로부터 모집했다. 전국에서 글들이 쏟아져 용산 경찰서장의 책상에는 응모 편지와 엽서가 산 같이 쌓였다고 한다. 그 중 몇 개를 소개해 본다. '조금 기다려 잠깐 생각하시오' '당신이 자살하면 그 뒤는 어떻게 하겠소, 힘을 더하여 살아보오' '어둡다가도 밝은 달밤이 되오' '기다려! 죽지 않는 목숨이 제일이요' '자살은 개죽음이요' '조금 기다려 죽지 않으면 개화(開花) 결실(結實)하는 성공이 나타나오' '구원하는 신명(神命)이 좌우에 있소' 등이다.

자살을 예방하기 위해 '소년군'(少年軍)이 동원되기도 했다. "철교가 생긴 이후로 안타까운 생명을 이곳에 던져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이 작년의 통계만으로도 14명이라는 놀라운 숫자를 만들었으니, 우리와 모든 운명을 같이 하고자 하는 한강으로서 만일 알았더라면 얼마나 마음으로 아퍼할 것이랴. 그럼으로 시내에 있는 소년군들과 관할 용산 경찰서에서는 각각 소년군과 경관이 철교에 서서 투신자를 말리기 위하여 밤과 낮을 불계(不計)하고 지킨다 한다." (1926년 7월 3일자 조선일보)

투신 자살 사건으로 '아름다운 행동(美擧)'도 생겨났다. '정사(情死)한 익사체를 승출(拯出) 미거(美擧)'란 제목의 1922년 6월 8일자 매일신보 기사다. "경성부의 김태성(金泰成, 26)과 정정숙(鄭貞淑, 21) 두 사람은 지난 5월 28일 새벽 2시경에 수건으로 서로 한데 동이고 한강 철교에 투신자살을 하여 정사(情死)하였는데, 시체를 수색할 도리가 없어서 망연 중에 있는 것을 한강 근처 시흥군 북면 본동리에 사는 김운홍(金雲弘) 등 10여명이 발분(發奮)하여 한강 속을 뒤져 다행히 찾아주고, 또한 음식을 준비하여 찾으러 간 사람을 극진히 대접하였으므로 매우 고맙게 생각한다더라."

철근과 콘크리트로 만든 한강 다리에는 이렇게 삶의 빛과 그림자가 깃들어져 있다. 다리는 우리에게 말한다. 아래를 보지말고 고개 들어 희망을 올려다 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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