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일 아침에] '개딸' '개준스기'가 쌓아 올리는 바벨탑

정민정 논설위원 2022. 5. 25. 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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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사모' 이후 '박사모' 등 팬덤정치 이어져
진영 대결 촉발하며 분열·갈등 확대
양념이 에너지원 되며 영향력 극대화
이견 허용 않는 팬덤은 민주주의 위협
정민정 논설위원
[서울경제]

강한 팬덤은 정치인의 로망이다. 팬덤은 영웅 서사이자 신화다. 신화를 가진 부족, 즉 팬덤으로 무장한 정치인은 강력한 지지가 보장된다. 우리나라에서는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가 원조다. ‘노풍(盧風·노무현 바람)’을 태풍으로 만들었고 ‘노무현 당선’이라는 기적을 일궈냈다.

노 전 대통령 이후 모든 대통령의 당선 뒤에는 열성 지지자들의 팬심이 있었다. ‘명박사랑(이명박)’ ‘박사모(박근혜)’ ‘문빠(문재인)’ ‘윤사모(윤석열)’ 등이다. 지난 20년 동안 좌파 진영은 노사모-문빠-개딸로, 우파 진영은 박사모-태극기부대-극성 이대남으로 이어졌다. 진영 대결이 촉발한 팬덤 정치는 혐오와 분노를 부추겼고 분열과 갈등을 확대, 재생산했다. 특히나 0.73%포인트라는 역대 최소 득표 차를 기록한 20대 대선을 거치며 진보도 보수도 아닌 ‘기형적 팬덤 정치’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대선 직후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총괄선거대책위원장의 지지자들은 포털 사이트에 ‘재명이네 마을’이라는 팬 카페를 만들었다. 2030 여성 지지자들은 이 위원장에게 ‘잼칠라(이재명+친칠라)’ ‘잼아빠(이재명+아빠)’ 등 애칭을 붙이며 ‘개딸(개혁의 딸)’을 자처했다. ‘개이모’ ‘개삼촌’ ‘개할머니’까지 총출동해 일가를 이룬다. 이 위원장은 “세계사적 의미가 있는 새로운 정치 행태”라고 했다. 최근 ‘개딸’들은 박지현 민주당 공동비상대책위원장의 사퇴까지 촉구하고 나섰다. 박 위원장이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을 비판하고 성희롱 논란을 일으킨 최강욱 의원 징계를 주장했다는 이유에서다. 최 의원에게 “앞만 보고 달려. 뒤는 개딸들이 맡는다”고 쓰여진 화환을 보냈고 민주당이 이들의 눈치를 보느라 최 의원에 대한 징계를 지방선거 이후로 미루는 촌극이 벌어지고 있다. 고(故) 박원순 서울시장 성폭력 사건 피해자를 향해 ‘피해 호소인’이라는 희대의 신조어로 부르고 성 범죄자를 추모하는 검은 현수막을 내걸어 2차 가해를 했던 민주당, 여성 단체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비슷한 현상은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 지지자들 사이에서도 목격된다. 이들은 젊은 남성들이 주로 사용하는 인터넷 커뮤니티에 “‘개준스기(이준석 애칭)’를 지켜야 한다” “‘준스기’가 옳았다” 등의 글을 올린다. 이 대표의 장애인 단체 시위 비판에 대해서는 ‘이준석은 어려운 길만 골라 걸었다’며 치켜세웠다.

특정 정치인에 대한 유권자의 호불호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지지자들이 자발적으로 팬덤을 만들어가는 과정도 일종의 정치 행위로 볼 수 있다. 정치 무관심과 무기력증이 팽배했던 2030 청년들이 정치에 새삼 관심을 갖고 참여하는 변화 역시 반갑다. 하지만 극단적 팬덤 정치는 상호 비방과 증오로 치달으며 민주주의를 병들게 한다. 팬덤은 태생적으로 배타성을 내포하고 있다. 적과 아군이 있을 뿐 ‘우리’라는 공동체 의식이 들어설 자리는 없다. 합리적인 토론과 설득을 통한 양보와 타협은 애당초 불가능하다. 민주주의 기본 원리인 공존의 틀을 훼손하는 이유다.

지난 5년 우리는 극단적 팬덤 정치의 폐해를 온몸으로 경험했다. 욕설에 가까운 문자 메시지와 댓글은 신념을 꺾었고 입을 닫게 했다. 이견을 허용하지 않는 팬덤의 득세는 공론의 장을 무너뜨렸다. 양념이 에너지원이 되면서 정치 영향력은 극대화됐고 자정 기능은 작동하지 못했다. “우리 이니(문재인) 하고 싶은 거 다 해”라며 전폭적 지지를 보냈지만 5년 만에 정권을 내주는 운명을 피하지 못했다.

지금 이 순간 ‘개딸’들과 ‘개준스기’ 지지자들도 염원을 담아 탑을 쌓아 올리고 있다. 재료는 문자 폭탄과 댓글, 동력은 선동으로 무장한 강력한 팬덤이다. 그렇게 쌓아 올린 탑이 자신들의 영웅을 정상에 세울 수 있을까, 아니면 신화 속 바벨탑처럼 속절 없이 무너질까. 첨언하면 성경에서는 신의 노여움을 산 인간들이 공통의 언어를 잃고 분열과 갈등의 시대로 치달았다.

정민정 논설위원 jminj@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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