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탈적 학술지'를 어찌할꼬

한겨레 2022. 5. 25.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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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결]

게티이미지뱅크

[숨&결] 김준 | 서울대 기초과학연구원 연수연구원

연구자는 새로운 지식을 생산하고, 이렇게 생산된 지식은 논문이라는 형태로 세상에 나온다. 이런 연구는 지금까지 밝혀진 지식을 쭉 들여다보고 아직까지 답하지 못한 질문을 찾는 데서 시작된다. 새로운 기술과 방법론, 관점을 동원해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 새로운 지식을 창출하는 것이다. 이 과정은 논문이라는 결과물로 일단락된다. 이번에 찾아내고 정리한 지식이 어떤 맥락에서 필요한 것이었는지, 기존 지식과는 어떤 차이점을 보이고 어떤 새로운 맥락을 추가했는지 등이 논문에 기술된다.

이렇게 힘들게 완성된 논문일지라도 저마다 수준 차이가 난다. 보통 얼마나 많은 사람이 궁금해했던 질문에 답하고자 했는지, 그 질문에 얼마나 완성도 높게 답했는지 등을 통해 논문의 수준이 달라진다. 그리고 논문 수준에 따라 출판할 수 있는 학술지가 어느 정도 달라진다. 대개 중요한 질문에 짜임새 높은 답을 할수록 유명한 학술지에 출판된다. 물론 좋은 논문이라도 이름 없는 학술지에 나오기도 하고, 반대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그렇다는 얘기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한 연구자가 낸 논문이 얼마나 유명한 학술지에 얼마나 많이 나왔는지 살펴 연구자의 수준을 파악하기도 한다. 유명한 학술지에 논문을 많이 출판한 연구자일수록 좋은 평가를 받는 것이다.

그렇지만 여느 평가체계처럼, 유명 학술지를 통한 평가체계에는 빈틈이 있다. 이 평가체계는 연구자들이 자주 활용한 논문이 많이 실린 학술지일수록 높은 점수를 매기는데, 이를 악용해 논문의 질이 아니라 활용 점수만 높여 학술지 등급을 뻥튀기할 수 있다. 약탈적 학술지는 이런 빈틈을 파고든다. 학술지 두어개가 손을 맞잡고 “우리 ㄱ학술지에 논문을 내려면 ㄴ학술지 논문을 더 많이 활용해주세요”라며 서로 활용 점수를 높인다. 그러곤 활용 점수가 높은 연구 실적을 손쉽게 쌓을 수 있다며, 연구자에게서 한편에 수백만원인 게재비를 받아간다. 동료 연구자에게 평가를 요청해 논문의 완성도와 신뢰를 높이는 전통 있는 학술지와 달리, 약탈적 학술지는 동료 평가 과정을 무마하거나 생략하고 그렇게 학계를 병들게 한다. 전통 있는 학술지가 만든 자매지가 약탈적 학술지로 운용되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 전통 있는 학술지도 ‘약탈적 메커니즘’의 일원이 되기에, 이전 명성에 속아 넘어가는 연구자도 나온다.

이런 문제를 단박에 해결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지만, 평가체계를 바꾸려는 시도는 계속되고 있다. 논문 실적을 더 이상 입시에 적용할 수 없게 되면서 고등학생이 논문에 참여하는 일이 감소했다지 않나. 마찬가지로 연구자 평가체계를 바꿔 약탈적 학술지 문제를 풀어내려는 움직임도 계속되고 있다. 서울대는 약탈적 학술지에 논문을 게재할 때 드는 일부 게재비를 더 이상 지원하지 않고 승진과 재임용 심사에도 관련 내용을 반영하기로 했다. 또 연구자가 발표한 논문 수와 활용 점수뿐만 아니라, 실제로 얼마나 훌륭한 연구를 했는지 반영하는 새 평가체계를 구축한단다. 이런 질적 평가체계는 기존 양적 평가체계에 비해 더 많은 비용과 더 높은 신뢰를 필요로 한다. 그렇기에 쉽지 않은 길이겠지만, 이런 움직임이 학계 전반으로 퍼져나가길 기대한다.

약탈적 학술지를 통한 입시 문제 때문에 연구와 논문에 대한 인식은 다시금 나빠졌다. 논문 쓰고 학위 받는 것이 대수롭지 않은 일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논문을 통해 한 사람의 연구자로 성장하는 일은 때론 고통스러운 과정이지만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중요한 경험이다. 어쩌면 간단하게나마 연구라는 게 무엇이고 새로운 지식을 생산한다는 게 어떤 과정인지, 소득과 관계없이 누구나 경험할 수 있도록 더 많은 경로를 개발하고 제공하는 일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물론 완전무결한 곳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학계에서 자정작용을 계속해 사회의 신뢰를 회복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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