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부동산 표류기' [세상읽기]

한겨레 2022. 5. 25.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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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지난 23일 서울의 부동산 중개업소. 연합뉴스

[세상읽기] 손아람ㅣ작가

바이러스의 창궐로 멸망의 공포가 팽배했던 2020년 말. 카페를 장시간 사용하기 어려워져 콘센트 유목민 생활을 청산하고 작업 공간을 따로 구하기로 했다. 이 집의 첫인상은 썩 좋지 못했다. 1층 식당이 대문 앞을 침범해 엘피지(LPG) 가스통을 설치해놓았는데, 그 위로 “폭발 위험! 접근금지”란 문장을 선홍색 페인트로 새겨놓았다. 불청객을 내쫓기 위한 현판처럼. 현관문을 열자마자 곰팡이 냄새가 엄습해왔고, 천장엔 누수의 흔적이 겹겹의 물때로 남아 있었다. 아무도 선택하지 않을 곳. 기회였다.

작은 마당에선 화초를 가꿀 수 있을 것이고, 집 앞 오솔길로 매일 산을 오를 수 있었다. 장점은 바뀌지 않는 조건이었지만, 단점은 바꿀 수 있을 것 같았다. 수리비를 지원받는 조건으로 임대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끊임없이 집을 고쳐나가는 동안 일년이 흘렀다. 그동안 불황을 못 견딘 1층 상가 세입자들은 하나둘씩 떠났고 건물의 공실이 늘어났다. 건물주가 대출이자도 갚지 못할 지경이라고 전화로 하소연할 때는, 재계약할 때 내 협상력이 꽤 올라가겠구나, 하고 내심 미소 짓기도 했다. 착각이었다. 건물주는 은행에서 돈을 더 빌렸다. 전기 배선을 날 잡아 손보던 날, 그는 재건축을 하겠다며 퇴거를 통보해왔다.

빈 건물에 혼자 남아 전쟁을 벌이고 싶진 않아서 계약갱신청구권은 포기하기로 했다. 잠시 내 처지보다 건물주의 사정을 걱정했다. 빚을 갚기 위해 돈을 더 빌린다는 발상은 내 경제관념을 까마득히 벗어난다. 건물을 신축한다고 입지가 달라질까? 차라리 임대료를 낮추는 게 낫지 않을까? 투자금 회수가 가능할까? 그러다 내 현실이 들이닥쳤다. 보증금을 빼서 옮길 집을 찾을 수가 없다. 세입자를 찾지 못한 건물과 전세난이 공존하는 세상이라니.

지난 몇년간 지역 부동산 실거래 시세를 꼼꼼히 살폈다. 빅데이터 전문가는 아니라도 한가지 추세는 분명해 보인다. 집값은 언제나 오르고, 몇년간 가파르게 올랐다. 시중금리로 얼추 계산해보니 아무 은행에서나 돈을 빌려 아무 집이나 골라 샀더라도 이득을 봤을 거란 결론이 선다. 굴레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린다. 이 실거래가를 작성한 매수인들도 모두 같은 판단을 내렸을 것이다. 그들이 모두 같은 판단을 내렸기에 집값이 계속 올랐을 것이다. 집값이 계속 오르기에 내 판단도 같은 방향으로 끌려간다.

그때 오래된 아파트 한채가 눈에 띈다. 매혹적인 가격이다. 직전 거래 가격이 무려 2년 전에 작성됐으니, 단지 전체가 2년 가까이 거래가 한건도 없었다는 뜻이다. 직전 거래가격의 110% 안쪽이라면, 전세보증금에 은행대출을 보태 구입해볼 만하다는 순진한 희망을 품고 부동산으로 달려간다. 팔리지 않은 채 쌓인 매물의 호가가 직전 거래 가격의 150%를 넘어선다는 사실을 듣는다. 150%! 거래 절벽의 비밀이 밝혀진다. 매도인의 셈법은 달랐다. 옆집이 지난봄 내놓은 가격보다는 5% 더 받아야 하고, 옆집은 아랫집이 지난겨울 내놓은 가격보다 10% 더 받아야 하는 것이다. 누군가 덥석 무는 순간 그게 새로운 시세가 될 텐데, 더 이상 러시안룰렛에 낄 사람이 나타나지 않는 모양이다. 나 역시 그렇다. 부동산 중개인이 내 표정을 읽는다. 지난 몇달간 개점휴업 상태라며 중개수수료를 반만 받겠다고 매달리는 그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시선을 위로 높여 본다. 가장 가까운 버스정류장에서 15분쯤 산을 타야 하는 높이로. 장점을 떠올리기 어려운 전셋집은, 전셋값과 같은 가격에 팔겠다는 집주인의 제안과 동시에 매력이 확 올라간다. 세글자가 눈앞에 어른거린다. 갭투자.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 가격구조를 납득하려고 고민해본다. 살고 싶지 않은 집이 사볼 만한 집으로 느껴지는데, 함정이 뭘까? 집값이 전셋값만큼 싼 게 아니니까. 전셋값이 집값을 떠받치고 있는 거야. 흥분을 간신히 진정시키고 돌아선다. 건물주에게 전화를 건다. 갈 곳이 없다는 내 푸념을 듣더니 건물주는 당황한다. 그는 건물 1층 부동산을 통해 조건에 맞는 집을 구해주겠다며 다급하게 호의를 베푼다. 몇시간 뒤, 나는 부동산 가게 소파에 앉아 있다. 중개인은 최선을 다해 집을 찾아보겠다고 약속한다. 나는 그에게 묻는다. 그런데 사장님은 어디로 옮기실 거예요? 졸지에 철거민이 된 중개인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한다. 그것도 최선을 다해 찾는 중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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