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중앙] 특별초대석 | '정치 원로' 한광옥의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고언(苦言)

입력 2022. 5. 25.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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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델라처럼 크게 포용하고 어미 닭이 병아리 품듯 국민 품으시라”

‘내로남불’은 신뢰 상실의 근원, 자신에게 엄격해야
어떤 일 결정할 때 국민 입장 고민했던 3金 배워라

김대중·박근혜 두 대통령을 모셨던 한광옥 전 대통령 비서실장이 월간중앙 인터뷰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성공한 대통령으로 기록되려면 인내하고 포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4선 국회의원 출신 ‘정치 원로’ 한광옥 전 대통령 비서실장. 그는 대한민국은 물론이고,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힘든 ‘두 대통령’의 비서실장이었다. 두 대통령이 그를 곁에 뒀던 건 그만큼 한 전 실장의 역량이나 됨됨이가 인정받았다는 방증일 터.

먼저 그는 국민의정부 2년 차이던 1999년 11월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호출’을 받고 대통령 비서실장을 맡아 2001년 9월까지 근 2년 동안 DJ를 보필했다. 또 박근혜 정부 4년 차이던 2016년 11월 청와대에 들어가 반년 동안 대통령 비서실장직을 수행했다.

월간중앙이 윤석열 대통령 취임 바로 다음 날인 5월 11일 서울 중구 서소문 J빌딩에서 한 전 실장을 만나 국가 최고지도자로서 대통령에게 필요한 덕목에 관해 물었다. “군주민수(君舟民水: 백성은 물, 임금은 배이니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지만 뒤집기도 한다)”라고 운을 뗀 한 전 실장은 “대통령은 국민의 어버이다. 어미 닭이 병아리를 품듯 국민을 품을 수 있어야 성공한 대통령으로 기록될 수 있다”고 힘줘 말했다.

근황이 궁금하다.

“아내가 폐암에 걸린 지 13년쯤 됐다. 정치하는 동안 너무 많이 고생시켰기에, 마음속에 늘 미안함이 있다. ‘수간호사’로서 아내 병간호하면서, 낮에는 정치인 후배들을 만나 이런저런 조언을 해주고 있다.”

정치 원로로서 3·9 대선 결과를 어떻게 해석하나?

“대선전(戰)이 시작되고 보니 걱정되는 게 하나 있었다. 저쪽(더불어민주당)은 프로파간다(선전·선동)에 능한데 이쪽(국민의힘)은 약한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그 벽을 윤석열 후보가 잘 뚫고 나가더라. 그게 (대선 승리에) 큰 힘이 됐던 것 같다. 후보의 결단력과 실행이 국민에게 믿음을 줬다고 생각한다.”

당초 예상보다는 격차(0.73%p)가 작았는데.

“정권 교체 열망이 컸기에 더 많은 표차로 이길 걸로 봤는데 막상 결과를 보니 좀 아쉬웠다. 그래도 정권교체가 됐으니 다행이다. 문재인 정권이 얼마나 위험했나? 만일 정권이 교체되지 않았다면 나라가 더 위태로워졌을 것이다. 소득주도성장, 부동산 문제, 양극화, 국민 분열… 문제가 많아도 너무 많았다.”

1987년 이후 계속되던 ‘보수-진보 10년 집권 체제’가 이번에 깨졌다.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전 정권의 실정이 컸던 탓이겠지. 정치·경제·사회·문화 여러 면에서 잘못이 컸다. 그래서 국민이 ‘5년 이상은 안 되겠다’고 판단한 게 아닐까. 앞서 말했듯이 ‘군주민수’다.”

이 대목에서 한 전 실장은 허균의 ‘호민론(豪民論)’을 거론했다. “백성 중에는 그냥 복종만 하는 항민(恒民), 원망만 하는 원민(怨民), 바꿔야겠다고 나서는 호민(豪民)이 있다. 전 정권의 실정에 실망하고 분노한 국민이 항민과 원민에서 호민으로 바뀐 것이다. 그게 정권 교체 결과로 나타났다.”


文 정권에 분노한 국민, 항민·원민에서 호민으로


2001년 김대중 대통령이 이한동 국무총리, 한광옥 대통령 비서실장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윤 대통령은 후보 시절, “김대중 정신을 잊은 민주당을 호남에서 심판해달라”고 주장했다. 이 발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전적으로 동의한다. 나는 2002년 새천년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을 앞두고 국민경선제를 최초로 도입했다. 일반 국민이 정당 경선에 참여함으로써 판이 커진 것이다. 국민경선제로 후보를 선출했기에 당내 기반이 취약한 노무현 예비 후보가 대통령 후보가 될 수 있었고, 나아가 본선에서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도 이길 수 있었다. 그런데 노 전 대통령은 (자신을 대통령으로 만들어준) 민주당을 깨고 열린우리당을 창당하더라. 당시 민주당 대표가 나였다. 열린우리당은 민주당과 다른 정당이다. 민주당과 열린우리당이 나뉠 때 김대중의 사람들 가운데 끝까지 남아 민주당을 지킨 사람들이 진짜 민주당이다. 민주당이라는 이름은 그 사람들이 가져갔지만 맥(脈)은 엄연히 다르다. 문재인 전 대통령도 노 전 대통령이 만든 열린우리당을 인계한 사람일 뿐이다. 윤 대통령이 잘 지적했다.”

윤석열 정부가 출범했다. 1기 내각을 두고 “인재풀이 너무 협소한 것 아니냐”, “참신성이 떨어진다”는 지적도 있다.

“막 출범한 정부의 인선을 평가하기에는 이른 감이 있다. 최소한 대통령 임기 10분의 1인 6개월 정도는 지났을 때 판단하는 게 도리라고 생각한다. 40여 년 정치를 하며 지켜본 결과 새 대통령은 아무래도 자기와 맞는 사람들을 쓰게 되더라. 그걸 무조건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대통령과 맞는 사람이라고 해서 무조건 쓰는 건 곤란하다. 중요한 건 능력이다. 대통령과 맞으면서 능력도 갖춘 사람이 (내각의) 적임자다.”


“천시는 지리만 못하고, 지리는 인화만 못해”


2012년 10월 26일 서울 국립현충원에서 거행된 고(故) 박정희 전 대통령 추도식에 참석한 박근혜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와 한광옥 전 대통령 비서실장. 한 전 실장의 옆은 김경재 전 민주당 의원.
여소야대 정국에서 새 정부가 출범했다. 대통령에게 어떤 지혜가 필요할까?

“김대중 정부 출범 당시에도 여소야대였다. 그렇다보니 김종필 국무총리의 서리(署理) 꼬리표를 떼기까지 174일이나 걸렸다. 총리 인준부터 여소야대 정국의 실상이 그대로 드러난 것이다. 중요한 건 대화와 인내다. 야당과의 대화를 통해 이견을 좁혀나가되, 대통령은 인내심을 잃지 말아야 한다. 대선 과정에서 보니 윤 후보의 인내심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한 전 실장은 [맹자]의 한 구절을 인용하며 인화(人和)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천시불여지리, 지리불여인화(天時不如地理 地理不如人和: 천시는 지리만 못하고, 지리는 인화만 못하다)라는 말을 기억해주면 좋겠다.”

대통령이 갖춰야 할 자격이라면 어떤 것들이 있을까?

“가장 중요한 것은 균형감각과 국민 통합 능력이다. 국민 통합은 혼자 하는 게 아니다. 많은 사람의 의견을 들어야 통합 능력이 생긴다. 혼자 가면 빨리 갈 수는 있어도 멀리 갈 수는 없다고 하지 않나. 균형감각을 갖추고 다 함께 가야 멀리 갈 수 있다. 그다음으로 소통과 공감 능력 있어야 한다. 물론 그 이전에 건강이 뒷받침돼야겠지. 그리고 욕심을 하나 더 낸다면 ‘상상력’이다. 그렇다고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나라를 만들라’는 게 아니라 진정한 국민 행복을 위한 상상력 말이다.”

‘정치인 윤석열’을 어떻게 보는가?

“사법시험에 합격하기 위해 9수(修)를 했다. 8연패하고도 포기하지 않았다는 건 그만큼 인내심이 있다는 얘기다. 검사로서 여야를 막론하고 엄정하게 수사하는 걸 보면 결단력이 대단한 인물인 것 같다. 인내심과 결단력을 갖춘 분이라고 생각한다. 듣기에는 인간관계도 좋다고 하니, 포용력도 있는 인물로 보인다. 그래도 지금 이렇다저렇다 말하는 건 이르다. 좀 더 지켜봐야 평가할 수 있지 않을까?”


국가 경영자 되려면 국민 신뢰부터 쌓아라


2001년 9월 한광옥 신임 새천년민주당 대표가 김종필 자민련 명예총재의 서울 중구 청구동 자택을 방문해 인사하고 있다.
철학자인 최진석 서강대 명예교수는 저서 [최진석의 대한민국 읽기]에서 “김대중 이후 네 명(노무현·이명박·박근혜·문재인)의 대통령은 국가적 수준의 통치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들은 집권 내내 정치인으로 살았다”고 꼬집었다. 이 지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김대중 대통령이 1992년 세 번째 대선 도전에서 패한 다음 날, 침통한 표정으로 내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한 동지, 내가 대통령이 못 돼서 억울한 게 아니에요. 국민을 위해 준비한 정책을 실현할 수 없는 게 억울한 거지요.’ 이 말씀을 남기더니 김 대통령은 곧바로 영국 유학길에 올랐다. 김 대통령은 앨빈 토플러의 [제3의 물결]을 읽고 정보화 시대를 준비했다. 김 대통령이 정보화 시대를 준비했기에 오늘날 한국이 IT(정보통신) 강국, 반도체 강국이 된 것 아닌가? 이게 바로 국가 경영 능력이다.”

최 교수의 지적처럼 윤 대통령이 정치인에 머물지 않고, 국가 경영자가 되려면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

“먼저 국민 신뢰를 쌓아야 한다. 또 자신에게 엄격해야 한다. ‘내로남불’은 신뢰 상실의 근원이다. 국민 신뢰를 바탕으로 우리나라도 더 늦기 전에 산업화·민주화 시대를 넘어 선진화 시대로 나아가야 한다. 그래야 강한 나라, 바른 나라, 안전한 나라가 될 수 있다. 첨단과학을 기반으로 신성장동력을 창출하고, 스마트 과학을 기반으로 강군을 육성해야 풍요롭고 강한 나라를 만들 수 있다.”

정치권의 단골 레퍼토리가 협치인데, 실제로는 대치만 존재한다. 왜 그럴까?

“40여 년 정치인으로 살아왔는데, 요즘처럼 부끄러운 적은 없었다. 모름지기 정치인이라면 나라 걱정을 하면서 살아야 한다. 나라 걱정을 한다면 싸울 때 싸우더라도 협상할 때는 협상하게 돼 있다. 내가 경험했던 3김(김영삼·김대중·김종필)의 공통점이 뭔지 아는가? 그건 바로 국가 걱정, 국민 걱정이다. 요즘 정치인 중에 그런 걱정 하며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가까이에서 본 3김은 어떤 인물이었나?

“YS(김영삼 전 대통령)는 결단력이 대단한 분이었다. 복잡한 일을 단순화시키는 능력도 엄청났다. 크게 눈 한 번 감았다가 뜨면 결론이 났다. DJ는 논리적이고 정책적이었다. 또 인간미가 넘치고 포용력이 바다와 같은 분이었다. JP(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는 문화적·예술적 감각이 특별했다. 그분과 대화하면 늘 배울 점이 있었다. 독서량이 엄청났기에 지식이 풍부했다. 세 분 모두 국민 여론을 매우 중시했다. 어떤 일을 결정할 때 국민 입장이 뭔지 고민했다. 윤 대통령도 그런 자세를 배우면 좋겠다.”


박근혜 도왔던 건 DJ의 ‘국민 통합’ 유지 받들기 위해


2001년 9월 김영삼 전 대통령이 취임 인사차 서울 동작구 상도동 자택을 방문한 한광옥 민주당 대표와 악수하고 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지난해 연말 사면된 데 이어 최근에는 대구에 사저를 마련하고 정착했다.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4년 9개월 동안 수감 생활을 하셨는데, 용케도 잘 이겨내셔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인내심이 대단한 분이다. 이제는 가장 중요한 게 건강이다. 건강 잘 챙기시라는 말씀을 전하고 싶다. 아마도 곧 뵐 날이 있지 않겠나.”

그러고 보니 ‘DJ의 오른팔’에서 ‘박근혜의 비서실장’이 된 사연이 궁금해진다.

“2012년 10월 5일, 새누리당에 입당해서 당시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 선거 캠프에 참여했다. 박 후보가 시대정신으로 제시한 ‘국민 대통합’을 통해 동서 간의 지역갈등을 해소하고, 그 기반 위에서 남북통일의 초석을 마련하기 위함이었다. 대학생 시절에 이어 정치인이 된 뒤로도 민주화 투쟁을 하면서 박정희 대통령의 공과(功過)에 대해 깊이 고민하게 됐다. 민주주의와 인권을 탄압한 건 큰 과오지만, 조국 근대화와 산업화는 큰 업적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됐다. 그러던 중 1999년 5월, 대구를 방문한 김대중 대통령이 ‘박정희 대통령이 이제는 역사 속에서 존경받는 지도자가 돼야 한다’며 ‘박정희 기념 도서관 건립’에 대한 재정 지원 의사를 밝혔다. 이후 내가 비서실장으로 재임하던 2000년 7월 19일 청와대에서 여러 의논을 거친 끝에 서울 마포구 상암동을 기념관 건립지로 결정했고, 지금의 ‘박정희 대통령 기념 도서관’을 세우게 됐다.”

좀 더 자세히 말해달라.

“2004년 8월 12일, 당시 박근혜 한나라당 신임 대표가 인사차 김대중 대통령을 방문해 ‘재임 중에 박정희 대통령 기념 도서관 건립을 결정해주신 데 대해 감사드린다. 아버지 시절 여러 가지로 큰 피해를 입으시고 고생하신 데 대해 딸로서 사과드린다’며 머리를 숙였다. 이에 김 대통령은 ‘내가 가장 성공하지 못한 게 동서화합인데, 박 대표는 이 문제 해결의 적임자이니 수고해달라’고 화답했다. 박 대표가 돌아간 뒤 김 대통령은 ‘한 동지, 돌아가신 박정희 대통령이 눈앞에서 사과하는 줄 알았네. 과거가 눈 녹듯 녹아 내리는구먼’이라며 좋아하셨다. 김대중 대통령을 모셨던 사람으로서 단언할 수 있는 건, 그분의 정치 철학과 유지(遺志)는 ‘동서화합을 통한 국민 통합을 바탕으로 남북통일을 이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새누리당에 입당해서 박 후보를 도와 국민 대통합에 힘썼고, 또 박 전 대통령이 ‘최순실(개명 후 최서원) 사태’로 어려움을 겪을 때, 질서 있는 퇴진을 돕기 위해 섶을 쥐고 불에 뛰어드는 심정으로 대통령 비서실장직 제의를 수락했다. 당시 ‘박근혜 퇴진론’이 엄청나게 거셀 때 아니었나? 그런 상황에서 자리를 탐해서 비서실장을 맡았을까? 그런 식으로 정치하지는 않았다.”


제왕적 대통령 포기는 큰 결심, 잘 유지해야


한광옥 전 대통령 비서실장이 월간중앙 인터뷰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제왕적 대통령을 포기한 건 큰 결심”이라고 평가했다.
지방선거가 코앞이다. 민심의 선택을 어떻게 예상하나?

“얼마 전 민주당의 일방적인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 법안 처리가 변수가 되리라고 본다. 국민은 민주당의 우격다짐 법 개정에 분노하고 있다. 또 하나, 이제 막 새 정부가 출범했다. 나중에 비판할 때 하더라도 일단은 힘을 좀 실어주려고 하지 않을까? 대체로 새 정부가 원하는 결과를 얻을 것으로 예상한다.”

40여 년 정치 인생에서 가장 잘했다고 생각하는 점과 가장 아쉬웠던 점은?

“초선 의원이던 1982년 10월 7일 국회 대정부질문 때 ‘김대중 선생의 석방과 5·18 광주 진상 조사 및 구속자 석방’을 요구했다. 그 일로 나중에 정보기관의 내사까지 받았다. 그런데 2년 뒤인 1984년 동교동으로 인사하러 갔을 때 김대중 선생이 골방으로 부르더니 ‘한 동지, 나와 내 가족 모두 진심으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라고 하시더라. 그리고 얼마 뒤 내게 민추협(민주화추진공동협의회) 대변인을 맡기셨다. IMF(국제통화기금) 사태를 맞았던 김대중 정부 출범 직후인 1998년, 제1기 노사정위원장을 맡아 노조를 붙잡고 설득했던 일도 기억난다. DJP(김대중+김종필) 연합을 통해 수평적 정권 교체를 이루고도 자민련과 끝까지 임기를 함께하지 못한 건 정말 아쉬운 일이었다. 새천년민주당 대표로서 민주당과 열린우리당의 분당(分黨)을 막지 못한 것 역시 안타깝다.”

좌우명이나 가슴에 새기는 문구가 있는지.

“상선약수(上善若水), 해불양수(海不讓水), 그리고 덕치정도(德治正道)란 말을 새기고 산다. 최고의 선은 물이다. 바닷물은 겸손하게 모든 물을 받아들이면서 자신의 정체성인 짠맛은 잃지 않는다. 정치란 결국 바른길을 가는 것이다. 어려운 사람을 돕기 위해 정치를 시작했고, 그렇게 살려고 노력했다.”

새 대통령에게 전하고 싶은 조언이 있다면.

“어려운 시기에 나라를 맡아서 참 고민이 많을 것이다. 그래도 넬슨 만델라 전 남아공 대통령과 같이 인내하고 크게 포용하시라는 말씀을 전하고 싶다. 그리고 국민에게 자연스럽게, 그리고 낮은 자세로 다가가시라고 조언하고 싶다. 청와대에 들어가지 않은 건 제왕적 대통령을 포기하겠다는 건데 진짜 큰 결심이다. 지금과 같은 마음가짐을 잘 유지하시기 바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국민을 크게 품어야 한다. 마치 어미 닭이 병아리를 품듯이.”

- 글 최경호 월간중앙 기자 squeeze@joongang.co.kr / 사진 김경빈 선임기자 kgboy@joongang.co.kr / 녹취 정리 이민준 월간중앙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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