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나의 소설 같은 세상] [163] 호국 보훈의 유월 정신

김규나 소설가 2022. 5. 25.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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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트 쇼팽 ‘데지레의 아기’

오래전에 그의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였다. 그는 편지를 읽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사랑에 감사했다. “무엇보다” 그의 어머니는 이렇게 적었다. “언제나 저는 하늘에 감사하고 있어요. 사랑스러운 아르망이 자신의 생모에 대해 영원히 모른 채 우리와 함께 살아갈 수 있어서 말이죠. 노예의 낙인이 찍혀 있는 신분이지만 제 자식을 끔찍이 아끼는 여자였잖아요.” - 케이트 쇼팽 ‘데지레의 아기’ 중에서

대한민국 헌법에 조만간 ‘오월 정신’이 새겨질 모양이다. 새 정부는 출범한 지 열흘도 되지 않아 총동원령을 내리고 광주행 열차에 올랐다.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하고 ‘오월 정신은 자유민주주의 헌법 정신 그 자체’이며 ‘대한민국 국민 모두는 광주 시민’이라고 선언했다.

아기 때 버려졌지만 양부모의 사랑 속에서 아름답게 자란 데지레는 대지주 아르망과 결혼했다. 흑인 노예에게 가혹하기로 소문난 그였지만 더없이 좋은 남편이었다. 그러나 데지레가 낳은 아기의 피부색이 순수 백인 것이 아니라며 둘을 냉정하게 내쫓는다. 친부모를 알지 못해 혈통을 증명할 수 없던 데지레는 아들을 안고 강에 투신한다. 아르망은 흑인 피를 가진 것은 자신이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는다.

인종차별 문제는 우리와 무관한 것 같다. 그러나 최고의 정치 이슈가 되었다는 점에서, 모든 가치 판단의 기준이 되어 반론 여지를 주지 않는다는 면에서 우리 사회의 좌우 갈등은 흑백 갈등 못지않다. 더구나 새 정부는 ‘BLM(흑인의 생명은 중요하다)’처럼 ‘광주의 뜻이 가장 중요하다’고 선포한 셈이다. 동의하지 않는 국민은 용납할 수 없다는 뜻일까.

중요 문서를 너무 늦게 열면 아르망처럼 소중한 것들을 잃을 수 있다. 정권 교체의 기대를 안고 시작한 새 정부는 5·18 유공자 명단을 공개할까. 오는 현충일과 6·25전쟁 기념일, 호국 보훈의 유월 정신이야말로 ‘피로써 지킨 자유 대한민국의 헌법 정신 그 자체’라고 말해야 하는 게 아닐까. 현충원의 무명용사 묘비를 끌어안고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는 정치인도 볼 수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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