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국의 아포리아]반(反)정치 시대의 정치

김남국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2022. 5. 25. 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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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아포리아는 그리스어의 부정 접두사 아(α)와 길을 뜻하는 포리아(ποροσ)가 합쳐져 길이 없는 막다른 골목, 또는 증거와 반증이 동시에 존재하여 진실을 규명하기 어려운 난제를 뜻하는 용어. '김남국의 아포리아'는 우리 사회가 직면한 여러 문제에 대해 지구적 맥락과 역사적 흐름을 고려한 성찰을 통해 새로운 해석과 대안을 모색한다.

김남국 교수

정치의 세계에서 사람들은 탈진실 시대 이전에도 객관적 사실보다 개인의 감정과 신념에 더 영향을 받았다. 정치인은 사람들의 환상에 따라 행동하고 그들이 믿고자 하는 강하고 위대한 어떤 것을 대리해 제시한다. 정치적 선택은 사실에 관한 것이 아니라 어느 길로 갈 것인가라는 방향에 관한 것이다. 그러니까 정치의 세계에서 오가는 말들에 대해 그것이 진실인가라고 묻는 것은 의미가 없다. 오히려 그 말들로 인해 결과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에 초점을 맞춰 그 의미를 추적해야 한다.

다시 말해 정치적 담론은 참이나 거짓을 따지는 진리의 가치와는 상관없이 발언 자체가 역할을 하는 수행성을 특징으로 한다. 정치인은 자신의 비전에 대해 강한 확신을 갖고 그곳에 이르기 위해 준비가 돼 있는 인물이라는 이미지로 지지를 끌어모으고 그 비전을 자기실현적 예언으로 만들어간다. 이렇게 보면 정치에서 말들은 현재의 사실보다 미래를 향한 약속이다. 누군가 하는 약속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이 약속을 듣는 사람이 있어야 하고 말을 듣고 이해하는 '책임 있는 해석자'로서 시민들이 있어야 한다.

진실 대 거짓의 선명한 대비를 통해 세상의 방향을 찾아가는 방식은 애초 정치세계에 존재하지 않은 허구일 수 있다. 진실만을 전달할 것이라고 기대한 통로가 진실과 거짓을 모두 전달하는 통로로 활용됨으로써 언어적 소통경로가 혼란해지자 시민들은 더 어려운 선택에 직면한다. 그러나 정치적 담론은 전통적 구조와 정해진 절차를 벗어나 과거와 단절함으로써 새로운 현실을 창조한다. 거짓이나 진실로 나뉜 화자의 의도가 담론을 힘 있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관습을 파괴하는 말의 수행성이 새로운 현실을 만드는 힘을 갖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최근 등장한 대통령 취임사의 '자유'는 공허하다. 화자의 의도가 개념을 압도하는 현실이 원인일 수 있고 이 말이 어떤 악습의 타파를 통해 무슨 해방적 변화를 가져올지 아직 알 수 없는 것도 이유일 것이다. 정치인이 철학자가 되지 말라는 법은 없지만 추상적인 언어로 평등과 진보 같은 도달 불가능한 목표를 제시하면서 결국 기득권을 대변하는 고상한 거짓말이나 늘어놓는 좌파의 허위의식을 끔찍이 싫어하던 우파가 이런 표현을 쓴다는 것도 역설적이다.

예컨대 낙태를 합법화한 1973년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뒤집으려는 최근 미국의 논쟁을 보자. 정치철학자 수전 오킨은 인류의 대부분 문화가 남성에 의한 여성의 억압과 통제를 목표로 하고 특히 성적이고 생물학적 재생산과 관련된 사적 영역에서 여성의 구조적 차별이 심각하다고 보았다. 그러니까 낙태 합법화는 가정이라는 이름 아래 가려져 있던 사적 영역에서 여성이 자신의 몸에 대해 결정권을 가질 자유를 신장시킨 역사적 사건이었다. 즉 낙태의 핵심은 종교와 과학의 대결이 아니라 여성의 자유와 억압을 둘러싼 문명과 야만의 대결인 것이다.

자유는 추상적인 언어가 아니라 역사적으로 누적된 구조적 억압과 지배를 철폐하려는 일상적인 투쟁 속에서 진전한다. 우리의 몸을 둘러싼 억압에 저항하는 것이 공포로부터의 자유라면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 사회안전망을 구축하려는 노력은 결핍으로부터의 자유다. 새로운 대통령의 등장은 기존 정당정치의 역할에 대한 부정이자 민주화 이후 35년 정치에 대한 국민들의 총체적인 반정치적 심판이다. 자신들의 존재가 부정당하는 현실 앞에 여야는 통렬히 반성해야 한다. 말의 수행성이 스스로를 삼키는 정치의 비극 앞에서 현재의 방향이 유효하지 않음을 인정하고 파괴와 단절을 통해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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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국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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