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곡된 식민주의 진정한 기억 복원.. 韓독자에 울림 주고파"

김용출 2022. 5. 24. 2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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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노벨문학상 압둘라자크 구르나
주요작 국내 출간 기념 화상 인터뷰
"식민 기억 승리자 입맛 따라 변형 일쑤
추함·미덕 모두 그대로 보여주려 노력
동아프리카 역사 넘어 동시대적 화두
내 작품이 한국인 삶 돌아보게 하길"
阿 잔지바르섬 난민 출신 영국 소설가
타국 난민의 삶 연민어린 눈으로 통찰
압둘라자크 구르나는 동아프리카 식민주의와 난민의 기억이 승리자의 입맛에 따라 재구성되거나 변형, 왜곡, 생략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진정한 기억을 복원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문학이란 인간 존재가 단순화와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서 추함과 미덕이 모두 나타나야만 하고, 그렇게 썼을 때 비로소 어떤 아름다움이 나타난다”고 말한다. 문학동네 제공
언젠가 아프가니스탄에서 납치당했던 비행기 한 대가 런던 외곽의 공항에 도착했다. 비행기 안에는 국내선이었던 관계로 현지 복장을 한 아이라든가 노인 등 많은 사람들이 타고 있었다. 그들 중에는 백발 신사도 섞여 있었다. 비행기가 도착한 다음 날, 많은 사람들이 영국 정부에 망명을 신청했다.

“연로한 백발 신사는 왜 자신의 나라를 떠나서 영국에 남기로 결정한 것일까, 하는 의문이 떠올랐고 동시에 또 다른 생각으로 퍼져나갔어요. 그가 떠나온 사회에 대해서 내가 너무 모르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내가 영국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로 한 좋은 이유가 혹시 거기에 있지 않을까.”

난민 지위로 영국에 입국한 사람들을 어디로 데려가고, 어떤 숙소를 제공하는지 등에 대한 공영방송 BBC 보도도 영향을 미쳤다. 특히 그는 BBC라디오 프로그램을 위해 영국에 망명해온 체코 집시들을 인터뷰했다. 이를 계기로 영국 사회 난민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된 작가 압둘라자크 구르나의 머릿속에는 소설 영감이 모락모락 피어났다.

가족 간 갈등도 포개졌다. 누가 집을 가져가고, 부를 둘러싸고 어떻게 대물림이 되며, 이 과정에서 여성들은 어떤 상황을 맞닥뜨리고, 많은 여성들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재산을 빼앗기는 이야기들이 겹쳐졌다. 즉, 1997년 동아프리카 잔지바르를 방문했을 때, 세상을 뜬 이웃이 탐욕스러운 조카를 속여서 자신의 딸들에게 집을 물려준 이야기를 가족들로부터 전해 들었다.
지난해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압둘라자크 구르나의 삶과 사상이 응축된 장편소설 ‘바닷가에서’(문학동네·사진)는 이렇게 세상에서 태어났다. 작품은 2001년 부커상 후보, 로스앤젤레스타임스 도서상 최종 후보에 올랐고, 지난해 노벨문학상 수상자 공식 인터뷰에 이어 세계인들 앞에서 낭송된 그의 대표작이다.

2001년작 ‘바닷가에서’는 ‘샤아반’이라는 가짜 이름으로 영국에 입국했다가 수용소에 억류된 예순 다섯의 잔지바르섬 출신 난민 살레 오마르와, 역시 삼십여 년 전인 십대 때 잔지바르를 떠나서 동독을 거쳐 영국에 정착한 문학교수 라티프 마흐무드가 왜 오마르가 자신의 아버지 이름으로 입국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창문 너머 바닷가가 보이는 곳에서 대면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제1장 ‘유물’은 오마르 시선으로, 2장 ‘라티프’는 라티프 시선으로 각각의 진실을 들려준 뒤, 3장 ‘침묵’에서 다시 오마르와 라티프가 대화하는 방식으로 수십 년 전 망각된 진실과 비극의 전모를 대면하면서 함께 과거로부터 걸어 나온다.

식민주의와 난민 운명을 천착해온 난민 출신 영국 소설가 구르나는 지난해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아프리카 출신 비백인 수상자로는 나이지리아의 월레 소잉카 이후 35년 만이다. 스웨덴 한림원은 당시 구르나를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하면서 “식민주의 영향과 대륙 간 문화 격차 속에서 난민이 처한 운명을 타협 없이, 연민 어린 시선으로 통찰했다”고 평가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 구르나는 어떤 문학 세계를 그려왔을까. 그는 왜 소설가로서 세상에 서지 않으면 안 됐을까. 작가 구르나를 대표작 ‘바닷가에서’를 비롯해 초기작과 최신작인 ‘낙원’(1994), ‘그후의 삶’(2020·이상 문학동네)의 한국어판 출간을 계기로 열린 지난 18일 줌라이브 기자간담회에서 한국 기자들과 함께 만났다.

―난민 문제와 함께 한국민들도 경험한 식민주의를 다뤘는데.

“한국 역사에 대해서 조금 아는 바가 있는데, 책 ‘바닷가에서’가 한국에 있는 독자들에게 어떤 울림을 줄 수 있다면, 작가로서 더없이 큰 기쁨이 될 것이다. 그것이 문학이 갖고 있는 즐거운 측면이 아닐까 생각한다. 다른 이야기 또는 다른 나라 이야기를 읽으면서 자신의 상황, 사회와 삶을 돌아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문학이라고 생각한다.”

―소설 속에서 두 사람은 허먼 멜빌의 소설 ‘필경사 바틀비’의 주인공 바틀비 말투를 서로 알고 있다는 사실에서 공감을 하는 등 문학적 장치들도 보인다.

“주인공 가운데 나이 많은 오마르가 영어를 못하는 척하면서도 ‘필경사 바틀비’의 인용구를 써서, 어떻게 보면 굉장히 장난스럽게 게임을 하듯이 단서를 남기고 있다. 창문을 내다보고 까만 벽을 바라보는 소설 속의 장면이 멜빌의 작품에 나오는 것처럼, 어떤 문학적인 단서를 남긴 장치라고 이해해 주면 되겠다. 다른 문학적인 인용이라든지 레퍼런스가 바로 글을 쓰고 또 글을 읽는 즐거움 중에 하나가 아닐까라고 생각해본다. 독자로서 작가로서 재미있는, 어떻게 보면 암호를 해독하는 것 같은 장난스러운 게임에 참여하는 효과도 누릴 수 있게 된다.”

소설은 왜 오마르가 영국에 입국하는 과정에서 샤아반이라는 자신의 아버지 이름을 사용했을까, 라는 라티프의 의문을 따라서 서서히 움직인다. 그런데, 오마르는 왜 라티프 부친의 이름을 사용했을까.

“그는 죽은 사람들, 그중에서도 죽은 아이들의 출생증명서를 종종 손에 넣었고, 누군가가 여권이 필요하다고 하면 나이가 얼추 비슷한 사람, 살아 있었더라면 그 나이쯤 되었을 아이의 증명서를 찾아서 그 이름으로 여권을 신청했습니다. … 그래서 나는 당신 아버지가 되어 그 이름으로 된 여권을 취득했어요.” (392쪽)

‘바닷가에서’와 함께 이번에 번역 출간된 ‘낙원’은 12세 소년 유수프가 작은 호텔을 운영하던 아버지의 빚 때문에 볼모로 잡혀서 상인들과 함께 탕가니카 호수와 아프리카 대륙 깊숙한 곳까지 여행하며 성장하는 이야기를, 가장 최근작인 ‘그후의 삶’은 20세기 초 독일이 동아프리카 일대를 식민 지배한 이후의 삶을 각각 담고 있다.

1948년 영국 보호령이던 동아프리카 잔지바르섬에서 태어난 구르나는 21세이던 1969년부터 소설 습작을 시작한 뒤 거의 20년 만인 1987년에야 첫 장편소설 ‘떠남의 기억’을 펴냈다. ‘떠남의 기억’을 쓴 이래, 그는 ‘순례자의 길’ ‘낙원’ ‘바닷가에서’ ‘그후의 삶’ 등 주로 식민주의와 난민을 주제로 한 장편소설 10편과 많은 단편소설들을 써왔다.

기자간담회 캡처
―기존 아프리카 출신 작가들과의 공통점이나 차이점은 무엇인가.

“저는 무엇보다 동아프리카와 유럽 식민지주의 둘 사이의 조우 또는 만남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이는 위대한 아프리카 작가 치누아 아체베가 풀어나간 주제이기도 하다. 응구기 와 티옹오(Ngugi wa Thiong’o) 작가의 작품 ‘한 톨의 밀알’에서도 이런 주제를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제가 이야기하는 주제는 아프리카에만 국한된 게 절대로 아니다. 아프리카에 있는 사람들이 문화적 또는 종교적으로 전 세계 다른 지역들과 교류를 하면서 수백 년간 많은 역사를 쌓아왔다. 다층적인 측면을 살펴봐 왔기 때문에 단순하게 동아프리카에 대한 이야기라곤 볼 수 없다. 동시에 이 지역이 갖고 있는 역사적인 이야기뿐만 아니라 그것이 갖고 있는 어떤 동시대적인 중요성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싶었다.”

비록 화상 인터뷰는 영국 현지 자택에서 이뤄졌지만, 구르나의 작가적 시선은 세상 곳곳으로, 우리들 마음 깊숙한 곳으로도 향할 것이다. 인간과 세상의 부당함과 함께 인간 자체의 다양한 삶의 결을 살려내기 위해. 인간과 세계에 대한 단순화와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기 위해.

구르나의 작가적 도전 역시 예상할 수 없는 세상의 굴곡과 삶의 상처 속에 놓인 이들 앞에서 쉼없이 시도될 것이다. 식민주의와 이주를 재검토하면서도 인물들의 가식과 거짓, 전략적 기만을 교차시키면서. 단순한 세상과 평면적 삶을 넘어서 수천수만의 이야기를 품은 사람들과 사건, 역사들을 교차시키면서. 그리하여 그의 서성이는 눈길은 수백만 외국인들이 생활하는 한국에까지 미칠지도. 아니, 그곳에서 서성이는 눈길을 가진 사람이라면 우린 모두가 구르나인지도.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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