핏빛도 욕망도 없다… ‘순한맛’ 박찬욱 신작에 2300여명 기립박수

칸/김성현 기자 2022. 5. 24. 2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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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 영화제 초청작 ‘헤어질 결심’
핏빛 폭력·도발적 욕망 없이 고전적이고 우아한 영화로 변신
가디언 “히치콕 스타일의 걸작”
올해 칸 영화제 경쟁 부문 초청작인 영화 ‘헤어질 결심’의 첫 공개를 앞두고 주연 배우 탕웨이(왼쪽부터)와 박찬욱 감독, 배우 박해일이 23일 뤼미에르 대극장 앞 레드 카펫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AFP 연합뉴스

박찬욱 감독의 신작 ‘헤어질 결심’이 처음 공개된 23일(현지 시각) 저녁의 칸 뤼미에르 대극장. 스크린에 종영(終映)을 알리는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고, 극장의 조명이 환하게 켜지고, 대형 스크린을 가리는 천까지 모두 내려왔지만 관객 2300여 명의 기립 박수는 멈출 줄 몰랐다. 8분여간 환호가 계속되자 1층 객석의 박 감독은 주연 탕웨이·박해일과 투자 배급을 맡은 이미경 CJ그룹 부회장을 얼싸안은 뒤 마이크를 잡았다.

올해 칸 영화제 경쟁 부문 초청작인 영화 ‘헤어질 결심’의 첫 공개를 앞두고 주연 배우 탕웨이(왼쪽부터)와 박찬욱 감독, 배우 박해일이 23일 뤼미에르 대극장 앞 레드 카펫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EPA 연합뉴스

“이렇게 길고 지루하고 구식(舊式)의 영화를 환영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감독 특유의 겸손함과 장난기가 섞인 인사말이 현장에서 프랑스어로 통역되자 객석에서는 폭소가 터져 나왔다. 그 뒤 그는 출연 배우와 작가, 제작 스태프의 이름을 일일이 부르면서 감사를 표했다.

박찬욱 감독이 24일 75회 칸 영화제 포토콜에서 주연 배우 탕웨이(오른쪽),박해일(왼쪽)과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AFP 연합뉴스

‘칸느 박’이 돌아왔다. ‘칸느 박’은 2004년 ‘올드보이’로 칸 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받은 뒤 한국 영화계에서 붙은 별명. 2009년 ‘박쥐’로 심사위원상을 받았고 2016년에도 경쟁 부문에 초청 받았다. <그래픽> 2017년에는 심사위원을 맡아서 한국 감독 중에서도 유독 칸 영화제와 인연이 깊은 편이다. ‘헤어질 결심’ 역시 올해 경쟁 부문 초청작이다. 이번 신작도 해외 192개국에 판매되어 세계 개봉을 앞두고 있다.

하지만 막상 영화의 뚜껑을 열자 의외의 반전이 속출했다. ‘올드보이’의 핏빛 흥건한 폭력도, ‘아가씨’의 짙은 성애(性愛)도 찾기 힘들었다. 박찬욱 특유의 얼얼한 ‘매운 맛’이 사라지고 ‘순한 맛’으로 변한 것 같았다고 할까. 상영 전날 칸 현지 간담회에서 박 감독은 “다행히 이번에는 관람 도중에 나갈 영화는 아니다. 제 이전 영화에 비하면 덜 자극적이고 심심하다고 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24일 프랑스 칸에서 공식기자회견을 하는 박찬욱 감독/AFP 연합뉴스

다음 날 현지 공식 기자회견에서도 박찬욱의 변신, 혹은 ‘변심’의 계기에 대한 질문들이 쏟아졌다. 박 감독은 “어른들을 위한 어른들의 이야기라고 하니까 엄청난 섹스 장면이 나올 듯한 기대를 낳길래 반대로 가야겠다고 결심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저는 본래 액션 장면 연출에 관심이 많은 감독은 아니다. 정교하고 힘이 느껴지는 방향보다는 인물 감정의 표현 수단으로 액션을 활용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영화는 산 정상에서 추락한 중년 남성의 변사 사건을 수사하던 형사 ‘해준’(박해일)이 사망자의 중국인 아내 ‘서래’(탕웨이)를 의심하는 미스터리 형사물의 구조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잠복 수사와 신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둘은 가까워진다. 박 감독은 시나리오를 완성하기 이전부터 탕웨이를 염두에 두고 작업했다. 그는 “완성된 대본 없이 캐스팅부터 한 것도 처음”이라고 했다.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는 형사와 용의선 상의 여성 사이에 감정적 연결 고리가 생긴다는 설정은 고전 누아르 영화를 닮았다. 박 감독은 스웨덴 범죄 소설 ‘마르틴 베크’ 시리즈와 영국 고전 영화 ‘밀회’ 등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밝혔다.

상영 직후 외신들의 호평이 쏟아졌다. 영국 가디언은 별 다섯 개 만점과 함께 “이전에 히치콕 감독의 영화를 보지 않았던 사람이 만든 것 같은 히치콕 스타일의 영화”라고 극찬했다. 뉴욕타임스의 카일 뷰캐넌은 트위터에서 “박찬욱 감독이 걸작을 만들 수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가 조금 더 작고 누아르적인 로맨스에서도 충분히 화려하고 재미있다는 걸 알게 됐다”고 말했다.

24일 공식기자회견에서 기자들에 둘러쌓여 있는 박찬욱 감독./AFP 연합뉴스

“박찬욱의 탐정물은 올해의 가장 로맨틱한 영화”라는 인디와이어의 평처럼, 전반의 누아르는 후반으로 가면서 조금씩 로맨스로 장르 변신을 꾀한다. 1967년 김수용 감독의 영화 ‘안개’ 주제가를 가수 정훈희가 부른 노래 ‘안개’가 흐르는 가운데 감독의 의도도 조금씩 모습을 드러낸다. 영화 ‘안개’의 원작 소설이었던 김승옥의 ‘무진기행’처럼 결국은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그제야 “언제나 내 영화는 ‘로맨틱 코미디’라고 말했는데, 이번에는 조금 더 전면에 드러난 것”이라는 박 감독의 말이 실감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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