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군축, 핵우산 동시 주장은 모순"..G7 정상회의 히로시마 개최를 보는 일본 내 시선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내년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를 히로시마에서 개최한다고 선언하고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지지를 이끌어낸 것은 이번 미·일 정상외교의 성과 중 하나로 꼽힌다. 기시다 총리는 ‘핵무기 없는 세상’을 이끄는 지도자로서 국제사회에 확실하게 자리매김했다. 반면 미국의 핵우산 제공과 핵군축·북한 비핵화를 같은날 말하는 것은 모순이라는 지적도 나왔다.
기시다 총리는 23일 미·일 정상회담 기자회견에서 일본이 의장국을 맡은 내년 G7 정상회의를 히로시마에서 열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그는 “유일한 전쟁 피폭국인 일본의 총리로서 나는 히로시마만큼 평화에 대한 약속을 보여주기에 어울리는 장소는 없다고 생각한다”면서 “핵무기의 참화를 인류가 두 번 일으키지 않는다는 맹세를 세계에 보여주겠다”고 말했다. 요미우리신문은 “기시다 총리의 색깔을 드러냈다”고 평가했다.
미국의 원자폭탄이 떨어졌던 히로시마 출신인 기시다 총리는 핵무기 없는 세상의 실현을 ‘평생을 바쳐 해야 할 일’로 꼽아 왔다. 의회에서도 유일한 전쟁 피폭국인 일본이 세계 핵군축을 주도해야 하며 핵보유국들을 설득해야 한다고 여러 번 강조했다. 지난 3월 브뤼셀에서 열린 G7 정상회의에서는 서방의 우크라이나 지원에 대한 맞불로 핵무기 사용 가능성을 시사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 대한 규탄성명을 주도하기도 했다. 그는 어떤 경우에도 핵무기가 다시 사용되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G7국가 가운데 미국, 영국, 프랑스 3개국이 핵보유국이다.
히로시마에서 G7 정상회의가 열리면 중국을 겨냥한 핵군축 주장에도 명분이 실리게 된다. 스웨덴 스톡홀름 국제평화연구소(SIPRI)에 따르면 중국은 350발의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 러시아(6255발), 미국(5550발)에 이어 3번째로 많은 핵무기 보유국이다. 미 국방부는 2030년 중국이 보유한 핵탄두 수는 1000발을 넘어설 것이라고 보고 있다.
히로시마도 G7 정상회의 개최를 환영했다. 마쓰이 가즈미 히로시마 시장은 “핵무기를 둘러싼 현재의 엄중한 국제 정세 속에서 피폭지에서 (G7 정상회의가) 개최되는 의의는 매우 크다”고 밝혔다. 사쿠마 구니히코 히로시마현원폭피해자협의회 이사장은 “히로시마에서 세계적 핵무기 폐기를 선언하는 것은 훌륭하다”며 “핵보유국 정상들을 만나 피폭 경험을 직접 말할 수만 있다면 마지막 기회가 될 것 같다”고 아사히신문에 말했다.
한편에선 기시다 총리의 핵무기 없는 세계라는 구상이 모순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미·일 정상회담에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일본이 공격받으면 핵 전력으로 일본을 지키겠다는 확장억지를 재확인했다. 핵군축을 이야기하면서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상반된 이야기를 한 것이다. 마이니치신문은 “정상회담에서는 핵무기를 둘러싼 딜레마가 다시 한 번 확인됐다”며 “핵무기가 없는 세계와 안보를 양립시키는 길은 점점 전망하기 어려워지고 있다”고 평가했다.
핵군축 구상이 미·중 갈등 구도에 이용돼 의미가 퇴색될 것이라는 우려도 있다. 아사히신문은 러시아가 2014년 크름반도 합병 이후 주요 8개국(G8)에서 제외된 이후 핵 강국으로서 면모를 과시하기 시작했다며 “러시아의 폭거를 비난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핵 위험의 저감은 대립과 배제를 넘어서야만 가능하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기시다 총리가 방위비 증가와 미국 핵우산을 강조하는 것은 “핵 보유국인 중국·러시아와 핵 개발을 서두르는 북한에 다른 메시지를 보낼 것”이라며 “일·미를 중심으로 한 서방국가의 결속을 노래하는 장소로 피폭지가 쓰일 뿐이라면 의미는 퇴색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박은하 기자 eunha999@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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