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SK만으론 전쟁서 못 이긴다"..현장의 절박한 호소
오는 2031년까지 반도체 인력 3만명 부족
연간 1만명 필요하지만 졸업생 650명뿐
"반도체 소부장 업체 중요성 커지고 있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반도체 인재 육성을 위해 국내 주요 대학들과 손잡고 계약학과를 잇따라 신설하는 가운데 반도체 소재·부품·장비(소부장)를 생산하는 국내 중소 업계에도 계약학과를 통한 인력 수급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다. 소부장 업체 전문 인력을 키워야 글로벌 경제 안보 경쟁에서 더 경쟁력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반도체 소부장 업체, 계약학과 운영 쉽지 않아
24일 업계에 따르면 산업통상자원부는 최근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에서 국내 반도체 소부장 업체들과 간담회를 열고 소부장 계약학과 신설 방안 등을 논의했다. 간담회에는 원익IPS, 유진테크, 솔브레인, SK머티리얼즈 등 반도체 소부장 기업 관계자들이 참석했다. 이들은 기업별 소부장 계약학과 신설을 위해 컨소시엄 형태로 민간 자금 조성 의지를 내비친 것으로 전해졌다.
산업부가 소부장 업체들과 계약학과 관련 논의를 진행한 이유는 반도체 업계의 경우 2031년까지 3만명의 인력이 부족할 정도로 인력난이 심각해서다. 연간 1만명의 신규 인력이 필요하지만 반도체학과에서 배출하는 졸업생은 연 650명 수준에 불과한 상황. 현행 수도권정비계획법상 수도권 대학은 '인구 집중 유발시설'로 분류돼 정원을 늘릴 수 없게 돼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유수 대학과 함께 정원외모집으로 신입생을 뽑는 계약학과를 운영해 규제를 우회하고 있다. 졸업 후 채용 등 기업이 각종 혜택을 약속하고 입학생을 모집하는 학부 과정이 대표적이다. 계약학과는 기업들이 예산을 전액 부담하는 등 이유로 수도권 정원 규제 예외를 적용받는다. 반도체 인력난에 허덕이는 대기업들은 자금을 들여 계약학과를 운용해 인력을 채용하는 실정이다.
삼성전자는 성균관대, 연세대에 계약학과를 설립한 데 이어 최근 KAIST(한국과학기술원), 포스텍(포항공대)에도 반도체 계약학과를 신설키로 했다. SK하이닉스는 고려대에 이어 올해 들어 서강대, 한양대 등에 계약학과를 신설하기로 했다. 서강대에는 전자공학과를 모체학과로 한 '시스템반도체공학과'를, 한양대에도 공과대학 내 '반도체공학과'를 신설하고 올해 말 첫 신입생을 모집한다.
하지만 자금력이 모자라는 소부장 중소업체들은 계약학과 운영이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일본 수출 규제 이후 정부가 야심차게 소부장 육성에 나서고 있지만 핵심 인재가 부족한 '인력 미스매치' 현상이 심화하는 상황이다. 이를 고려해 소부장 기업들이 운영자금을 일부 부담하면 정부 예산을 매칭해 대기업처럼 계약학과를 운영하겠다는 게 정부의 복안이다. 다만 정부 예산을 투입하는 방식이어서 기존 계약학과 운영 방식과 달라 기획재정부와 산자부, 교육부 등과 협의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박재근 한양대 융합공학부 교수는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만 인력이 필요한 게 아니지 않느냐. 반도체 소부장 업체에 갈 인력도 키워야 한다"면서 "반도체 관련 학부 인력을 더 길러내 다양한 업체에서 일하고 석·박사급 인력으로도 가는 선순환 구조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정부가 대책을 마련하고는 있지만 반도체 업계와 전문가들은 수도권 개발 규제로 대학에서 첨단 기술 인재를 충분히 길러 내지 못하고 있다며 관련 규제를 원천적으로 철폐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주요 인재들은 수도권 대학에 집중되는데 정부는 수도권 집중화를 견제한다며 대학 학과 신설을 가로막다 보면 글로벌 반도체 전쟁이 벌어지는 상황에서 골든타임을 놓칠 수 있다는 우려다.
정부도 대통령직인수위원회 '국정과제 이행계획서'에 담긴 소부장 중소·중견기업을 위해 졸업생 채용을 연계하는 계약학과 운영을 지원하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중소·중견기업이 예산을 일부 내면 정부 예산을 매칭해 교육 재원을 마련하는 방식이다.
반도체 소부장의 중요성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한국을 대표하는 반도체 기업으로 중심 역할을 해왔지만 이제는 소부장 중소업체의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TSMC를 앞세운 대만의 약진과 미국, 일본, 중국, 유럽 등이 앞다퉈 반도체를 경제 안보의 핵심 부품으로 지정하면서 한국도 반도체 소부장 역량 강화의 필요성이 증대되는 상황이다.
재계도 힘을 보태고 나섰다. 전국경제인연합회는 전날 반도체 글로벌 공급망 이슈에 대응하기 위해 '경제안보태스크포스(TF)팀'을 구성했다. 전경련은 미중 간 경쟁 격화로 인한 경제안보 시대가 도래했다며 TF팀을 통해 글로벌 공급망 확보, 특히 반도체 자원·부품의 안정적인 공급, 산업 기술 유출 방지 대책 마련 등 관련 이슈에 대해 재계 차원의 대책을 마련해 나가기로 했다.
또 공급망 확보 방안으로 해외 소부장 기업의 한국 투자 유치를 위한 해외 투자설명회(IR)를 개최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주요 기업들과 반도체 등 핵심 분야의 부품·소재 품목을 점검해 유치 대상 목표 기업을 선별한 뒤 맞춤형 투자 유치 방안을 마련하기로 했다.
윤석열 대통령 역시 지난 20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삼성전자 평택캠퍼스를 둘러보고 난 뒤 가진 연설에서 미국 반도체 소부장 기업의 한국 투자 독려를 요청했다. 윤 대통령은 "바이든 대통령의 평택캠퍼스 방문은 반도체가 갖는 경제·안보적 의미는 물론 반도체를 통한 한미 '글로벌 포괄적 전략동맹' 의미를 되새길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며 "반도체가 우리 미래를 책임질 국가안보 자산이라 생각하며 과감한 인센티브와 필요한 지원을 아끼지 않을 계획"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바이든 대통령도 우리 반도체 기업의 미국 투자에 대한 각종 인센티브 제공뿐 아니라 미국 첨단 소재·장비·설계 기업의 한국 투자에도 큰 관심 가져주시길 부탁드린다"고 했다.
"인력 뽑아도 곧바로 실전에 투입 불가능"
미국 반도체 소부장 기업들의 한국 투자를 위해선 한국 내 소부장 생태계 강화가 급선무라는 지적이 나온다. 관련 인력 양성이 전제되지 않는 한 '그들만의 리그'로 끝날 가능성이 높고 결국 한국 반도체 생태계에 실익이 없을 것이라는 업계 우려가 가시지 않고 있다.
한 반도체 소부장 업체 관계자는 "인력을 뽑아도 곧바로 실전에 투입할 수가 없다. 최소 2~3년은 회사에서 따로 더 교육을 시켜야 하는 상황인데, 교육을 시켜놓으면 보수나 완성업체 갑질 등의 이유로 대기업 혹은 해외 소부장 업체로 떠나는 경우가 많다"며 "중소 업체의 돈으로 교육 시켜 남 좋은 일만 계속 해오고 있다"고 하소연했다.
반도체 대기업에 종사하는 한 엔지니어는 "국내 반도체 대기업 경력을 가진 인재들이 과거에는 하청업체나 소부장 업체의 임원으로 이직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지금은 분위기가 바뀌었다"며 "소부장 업체 자체 경쟁력을 키워야 국내 반도체 생태계가 건강해진다"고 말했다. 이어 "반도체 전쟁은 삼성만으론 안 된다. 소부장 업체 인력 양성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강경주 한경닷컴 기자 qurasoh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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