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력주의는 정당한가

한겨레 2022. 5. 24.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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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혁의 의학과 서사]김준혁의 의학과 서사(61)
크리스퍼 시대..영화 '가타카'를 보는 두 가지 시선
영화 <가타카>는 비록 전면에 드러나지 않았지만, 장애와 여성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출처: 다음 영화

3세대 유전자 가위인 크리스퍼(CRISPR/Cas9)가 등장하면서 공상과학 속 이야기로, 또는 실현되기엔 아직 먼 이야기로 치부되던 인간 유전자 조작은 성큼 현실에 가까워졌다. 2018년 에이즈 저항성 유전자를 쌍둥이에게 부여하려 했던 허젠쿠이 사태가 있었으므로 현실에 가까워졌다는 말은 여전히 남아 있는 저항감의 표현일 뿐 실제로는 유전자 조작 기술은 지금 여기의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솔직한 일이겠지만 말이다.

유전자 조작을 말할 때, 1997년 영화 <가타카>는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다. 내게 에단 호크, 주드 로, 우마 서먼 등 현재 영화계에서 이들을 빼놓고 이야기하기 어려운 대배우들의 젊음이 담겨 있는 영화로 기억되는 <가타카>는 그 이름값에 무색하게 개봉 당시 흥행에 성공하지 못했다. 공상과학 영화임에도 별다른 특수효과 없이 배우들의 연기에 집중한 영화는, 당시 기준으로도 저예산으로 제작되어 영화의 배경이 되는 유전자 공학, 개인 식별, 우주여행 등의 기술을 미래적인 느낌으로 보여주지 못했다.

오히려 <가타카>는 근미래를 영화의 시간적 배경으로 설정하고 있음에도 인물의 복장이나 건물, 등장하는 자동차와 컴퓨터 등을 상당히 고전적인 (여기에서 고전이라는 말은 말 그대로 ‘고전풍’, 1950년대의 양식이라는 의미다) 디자인으로 제시해 관객이 독특한 시공간에 들어가 있다는 느낌을 받게 만든다. 이 점이 <가타카>를 작품이 나온 지 25년이 지난 지금에도 충분히 볼 만한 작품으로 만드는 요인이 되는 것은 역설적이라는 생각도 든다. 90년대의 미래적 양식으로 영화를 만들었다면, 오히려 지금 볼 때 촌스러워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가타카>는 유전자 조작으로 만들어지는 인간 세계가 어떤 모습일지를 제시하고, 그 안에서 유전적인 차별을 경험하는 주인공이 노력으로 이를 극복하는 모습을 그려낸 작품으로 사람들에게 각인되었다. 이런 선천적 능력 대 후천적 능력의 대결 구도, 즉 모두가 유전자 조작을 통해 뛰어난 신체를 부여 받는 세상에서 노력을 통해 타인을 뛰어넘는 개인의 의지를 강조하는 해석은 영화가 다분히 의도한 방식이기도 하다(특히, 유전자 조작 없이 태어난 주인공과 유전자 조작으로 태어난 동생이 바다에서 수영으로 대결하는 장면이 이를 잘 보여준다). 하지만 <가타카>를 우리가 마주한 유전자 조작의 현실을 사유하기 위한 통로로 사용할 때 이런 능력주의적 구도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런 구도에서 유전자 조작으로 인한 차별을 극복하는 방법은 개인의 끝없는 노력일 뿐이고, 그 노력은 유전자 조작을 받지 않은 인간 사이에서 다시 계층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가타카>를 다른 방식으로 읽어야 할 필요성을 마주한다. 여기에서 살펴보려고 하는 것은 작품을 다른 위치에서 관찰할 수 있게 도와주는 관계와 능력이라는 안경이다. <가타카>의 주인공은 개인의 노력으로 성공한 것으로 기억되지만, 그가 목표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주변 사람들의 도움 때문이다. <가타카>는 개인의 노력과 의지를 강조하고 그것을 통해 넘어야 하는 벽은 부당한 차별인 것으로 그려지나, 실제로 우리가 넘어야 하는 벽은 인간의 능력을 협소하게 정의하려는 사회의 억압이다. 다시 영화로 돌아가서, 다른 눈으로 작품을 살펴보자.

영화 개봉 당시 포스터에 활용되었던 이 사진은 배아(빈센트의 출발점), 타이탄(빈센트의 목적지)을 중첩하고 그 위아래에 주인공 빈센트와 아이린을 배치하여 이들의 상호 관계를 표시한다. 출처: 다음 영화

‘가타카’를 항해하기 위한 열쇠 하나…타인과의 관계와 조력

<가타카>의 주인공 빈센트(에단 호크 분)는 태어날 당시 퍼지기 시작한 유전자 선별 및 조작 기술의 도움을 받지 않고 ‘자연’적으로 태어나, 운이 부여한 신체적 한계들, 작은 키, 근시, 심장질환 가능성 등을 안고 성장한다. 유전자 조작이 당연해진 사회에서 빈센트는 교육과 취업의 기회를 빼앗기고, 심지어 유전자 조작을 받고 태어난 동생 안톤(로렌 딘 분)에게도 열등감을 느낀다. 하지만 그에겐 꿈이 있다. 우주비행사가 되어 우주를 탐사하는 것. 그는 회사의 유전자 선별을 속여 자신의 꿈을 이루기로 결심하고, 완벽한 ‘우등’ 인자를 가지고 태어났지만 교통사고로 다리를 움직이지 못하는 제롬(주드 로 분)의 혈액, 소변, 모발 등으로 선별 장치를 통과한다. 우주 탐사를 보내는 가타카사(社)에서 두각을 나타낸 빈센트는 꿈이었던 우주 탐사를 목전에 두지만, 회사에서 발생한 살인 사건으로 인해 정체가 탄로날 위기에 처한다.

<가타카>의 서사 진행에서 빈센트의 노력이 부각되는 장면은 얼마 되지 않는다. 선별 장치를 속이기 위해 매일 아침 모발과 각질을 말끔히 제거하는 것 정도가 빈센트가 기울이는 노력의 전부다. 물론 회사에서 뛰어난 결과물을 인정받고 우주비행사로 선발되는 것은 노력의 결과물이겠지만, 영화의 시작 시점에서 빈센트는 이미 선발되어 일주일 뒤면 우주로 떠날 예정인 것으로 나오기 때문에 그 노력은 별로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작품의 서사에만 집중한다면 빈센트의 꿈을 이루는 것은 그의 노력보다는 그 주변 사람들의 도움이다. 수사로 인해 정체가 몇 번이나 탄로날 뻔한 빈센트는 아이린(우마 서먼 분)의 도움으로 위기를 무마한다. 또 살인 사건 수사관으로 온 것이 동생 안톤이었다는 점에서 작품은 들키지 않으려던 빈센트의 노력은 사실 무위였음을 알려준다. 처음부터 안톤은 빈센트가 회사에 유전자 위장을 통해 취직했음을 알고 있다. 빈센트는 동생을 알아채지 못하지만, 안톤은 형을 처음부터 알아보았으니까. 하지만 영화 내내, 안톤은 그 사실을 말하지 않고 기다린다.

무엇보다, 제롬의 완벽한 협력이 없었다면 빈센트는 애초에 시도도 할 수 없었다. 영화는 둘 사이의 관계를 우정을 넘어선, 가짜 정체성으로 연결된 어떤 혈연관계 같은 것으로 그려낸다. 게다가 영화를 보신 분들은 모두 기억하시겠지만 작품 마지막 우주선 탑승을 앞두고 회사의 유전자 선별 방식이 갑자기 바뀌어 준비되어 있지 않은 빈센트는 탄로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인다. 하지만 유전자 검사관이 자기 아들 또한 유전자 조작을 받지 않은 ‘부적격자’임을 말하며 그를 통과시켜준다. 처음부터 빈센트가 유전자를 위장하고 있었음을 알고 있다는 암시를 남기며.

이 정도라면 <가타카>는 빈센트의 노력과 의지가 어떻게 꿈을 성취했는지를 그려내는 작품이라기보다는 혼자서는 이겨낼 수 없는 구조라는 드높은 벽을 넘기 위해 주변 사람들에게 어떤 도움을 받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읽는 것이 더 정확해 보인다. 늘 그렇듯, 우리는 주인공에 이입하기 마련이기에 주변 사람들의 조력이 크게 보이지 않는 것일 뿐.

빈센트의 성공은 엄밀히 말하면 제롬 때문이며, 작품에서 제롬은 빈센트의 성공을 자신의 성공과 동일시한다. 출처: 다음 영화

‘가타카’를 항해하기 위한 열쇠 둘…협소한 능력주의 벗어나기

영화가 흥미롭게 그려낸 것은 유전자 조작이 일상화된 사회에서 적격자와 비적격자 사이에 형성되는 차별과 위계다.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로부터 이런 유전자 조작을 통한 인간 사회의 위계 형성은 여러 번 그려져 왔지만, 그런 사회의 작동 방식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 작품이 <가타카>이기 때문에 이 구도는 많은 사람의 기억에 남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위계를 놓고 다시 질문을 던져보아야 한다. 작품에서 가타카사가 유전자 조작을 받은 사람만을 입사 대상으로 삼는 것은, 회사로서도 많은 투자가 필요한 우주비행사가 혹시라도 질병 등으로 인하여 임무를 수행하는 데 실패하는 것이 큰 손실을 발생시키기 때문이다. 예컨대 빈센트는 태어나면서 “신경계 질병 60%, 우울증 42%, 집중력 장애 89%, 심장질환 99%” 가능성이라는 성적표를 받아 든다. 다른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심장질환 99%는 위험하다. 빈센트 본인은 괜찮다고 믿으며 유전자 검사를 속여 우주로 나가지만, 그가 갑작스러운 심장 발작으로 임무 도중에 사망한다면 그에게 투자한 회사에도, 그가 얻을 지식을 기다리던 인류에게도 막대한 피해를 입히는 셈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유전자 조작을 받은 사람을 기본으로 뽑는 것은 타당한 선택지가 아닐까. 만에 하나의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심장질환이 발생할 확률이 99%인 사람을 뽑아도 되는가.

여기에서 그러므로 심장질환 가능성 99%인 ‘부적격자’를 뽑아서는 안 된다는 결론에 도달해선 안 되겠지만, 거꾸로 그런 부적격자 중 극히 드문 소수는 확률을 뛰어넘는 성취를 보일 수도 있으니 유전자로 차별해선 안 된다는 결론도 적절하지는 않다. 여기에서 협소한 기준으로 ‘뛰어난 사람’, ‘적격인 인간’을 뽑아야 한다는 전제가 유지되는 한, 선천과 후천 어느 쪽을 선택해도 큰 차이는 없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빈센트로 대표되는 후천적 우월성이든, 나머지 ‘적격자’가 상징하는 선천적 우월성이든 결국 선별의 기준이 특정 능력의 우월함이라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그러나 어떤 일을 함에 있어 특정 기능 또는 능력의 수행이 전부를 차지하는 경우가 얼마나 있을까? 물론 우주비행사는 높은 중력을 견뎌야 하므로 심장에 문제가 있으면 안 된다는 주장은 일견 타당하다. 하지만 그런 상황이 발생하지 않도록 대비하고, 실제 임무 수행의 어려움을 판정하기 위해 훈련과 모의비행이 존재한다. 오히려 우주비행사가 업무를 수행하면서 필요한 능력은 우리가 생각하고 기대하는 것보다 훨씬 다양하다. 보편적으로 볼 때, 특정 직종에서 일반적으로 요구되지 않는 능력이나 경험을 지닌 개인이 그 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그것이 오히려 더 큰 이득을 가져오는 경우가 많지 않은가. 당장 내가 종사하는 의료와 의료윤리만 해도 ‘과학적 능력’만 지닌 의사로는 안 된다는 이야기를 계속 반복하고 있는데 말이다.

물론, 차별의 가능성으로 개인의 우월성 일반을 부정할 수는 없다. 개인에게는 다른 능력이 있고, 그것을 각자 다르게 발휘하는 것은 부정할 수도 없고 부정해서도 안 되는 사실이니까. 그러나 몇 가지의 능력 기준만을 내세워 줄 세우기를 한다면 그 성취 방식이 유전자 조작이든, 노력이든 별로 차이는 없다. 특정 능력만으로 인간을 선별하는 일이 극소수를 위한 것이며 실은 인간 전체의 가능성을 가로막는 일임을 직시해야 한다. 더 나아가, 우리는 다양한 능력의 가능성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단지 ‘다양해야 한다’라는 당위적 주장의 실천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런 다양성의 수용이 실제로 업무의 수행과 더 나은 사회의 구현에 도움을 주리라는 확신 때문이다.

김준혁/연세대 교수·의료윤리학자 junhewk.kim@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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