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왜구 경험이 일본 무역발전·군사대국화 토대 이루는 사이, 명나라는 해금정책 고집·조선은 권력다툼으로 쇠락중
1498년에는 포르투갈의 바스코 다 가마가 인도에 도착해 후추 등 향신료 무역을 시작했다. 이들은 1511년 ‘향신료의 섬’인 몰루카 제도에 도착했고, 말레이 반도의 말라카 해협을 거쳐 1512년에는 자바섬에 진출했다. 그런데 1543년 영파로 가던 배가 표류해 규슈의 다네가시마(種子島)에 도착했고, 이때 철포(조총)가 일본에 전달됐다. 1549년에는 에스파냐의 프란시스코 자비에르 신부가 규슈 남부인 가고시마에 도착했다. 포르투갈인들은 1553년 마카오에 진출했고, 1557년 영유권을 얻어 본격적으로 동아시아 무역망에 참여했다. 복건(푸젠), 절강(저장) 등 동남 연해지역에서 현지 상인들과 활발한 밀무역을 전개했으며, 특히 일본의 은을 명나라에 수출하는 일을 했다.
이 무렵 일본에는 포르투갈과 에스파냐의 상인과 선원, 선교사들이 들어가 소위 ‘남만(南蠻)문화’가 발달했다. 의술, 천문학, 조선술 등의 신기술을 비롯해 시계, 조총 등의 서양 물건, ‘빵’ ‘덴푸라’ ‘카스텔라’ 등 포르투갈에서 흘러들어간 음식 문화 등이 유행했다. 천주교가 수용돼 1582년에는 규슈 서부인 오이타(大分)현의 소년 4명이 바다를 건너 리스본에 도착한 다음 로마로 가 교황인 그레고리 13세를 알현했다. 1584년에는 에스파냐인이 규슈 북서부의 히라도에 도착했다. 이처럼 ‘일본의 쇄국’과 ‘조선의 쇄국’은 큰 차이가 있었다. 이 차이를 모르면 일본에 굴복당한 조선처럼 된다.
1588년 전국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왜구를 근절시키는 법령을 발표한다. 결국 왜구는 사라졌지만, 그들의 활동과 경험은 일본의 무역 발전과 군사대국화의 인적, 물적 토대로 변신했다. 일본은 명나라에 다시 은과 우수성이 입증된 일본도 등을 수출했다. 일본은 1560년대부터 매년 3만~5만㎏이라는 막대한 은을 중국에 수출했고, 17세기 전반에는 세계 은 생산량의 3분의 1을 차지할 정도였다. 일부는 동남아시아 지역으로 진출하면서 베트남에 구리와 도자기 등을 수출했고, 베트남 중부의 해안 관광도시인 호이안에는 임진왜란 전부터 일본인들이 거주했다. 심지어는 총까지 수출했는데, 이 무렵 세계에서 조총을 가장 많이 보유한 나라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일본은 변화한 국제환경과 시대적 요구에 부응해 재빠르게 변신하면서 적응했다. 반면에 중화주의에 사로잡힌 명나라는 이런 시대 변화를 무시하고 해금정책을 고집했다. 영락제가 조공 무역권의 부활을 목표로 파견한 정화의 원정대는 1405년부터 1433년까지 16년 동안 일곱 차례에 걸쳐 동남아, 인도, 페르시아만의 입구인 호르무즈, 아프리카의 소말리아와 케냐 해안까지 항해했다.
1차 원정대는 길이 150m 정도인 62척의 보(함)선, 2만7000명의 선원을 동원했다. 중국의 ‘일대일로’ 정책의 ‘일로(One road)’는 이 사업을 모델과 명분으로 삼은 것이다. 이렇게 세계 최고의 기술력과 경제력, 해군력을 갖췄지만 결국 역사 발전에서 실패했고, 왜구의 발호는 멸망의 치명적인 요인이 됐다.
그렇다면 이 시대 조선의 수준 높은 사대부와 실권 없는 임금들은 왜구에 어떻게 대응하고, 급변하는 국제환경을 어떻게 인식했을까? 당시 조선은 약해지고 있었다. 신세력인 사림과 구세력인 훈구파는 명분으로 포장한 채 권력과 세대교체를 놓고 이전투구 중이었다. 1510년 삼포왜란, 1519년 기묘사화, 1544년 사량진 왜변, 1445년 을사사화가 일어났고, 1555년에는 을묘왜변이 발생했다. 점점 본격적으로 동서 분당이 일어나고, 수준 높은 이기(理氣)논쟁이 일어나는 가운데 나라는 망해가고 있었다.
그들의 태도와 인식이 궁금하다. 의지가 박약하거나 없었던 것일까? 아니면 사대국인 명나라의 정책을 부정하지 못했거나 모방한 탓일까? 우리는 수백 년간 수백 번에 걸쳐 왜구들에게 침탈당했고, 일본의 식민지까지 됐다. 일본에 대한 무지와 근거가 희박한 오만을 버리지 않는다면 비극은 반복될 수도 있다. 그게 역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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