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의 숨은 명산] 평야에 우뚝 솟은 나주의 수문장

글·사진 김희순 광주샛별산악회 산행고문 2022. 5. 24.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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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 금성산 450m
현재 정상엔 군사시설 주둔..시민의 품으로 돌려주기 위해 도립공원화 추진 중
장원봉 팔각정에서 보는 조망. 멀리 무등산이 가까이 보인다.
나주는 남도의 ‘곳간’이다. 350리 굽이굽이 흐르는 영산강은 황금 곡창지대 나주평야를 적시며 전라도 사람들의 생활을 풍요롭게 만들어 주었다. 이런 까닭에 영산강 유역을 중심으로 마한과 백제의 역사가 번성했고, 문화의 꽃을 피웠다.
나주 반남면 신촌리 고분 금동관(국보295호), 나주 정촌 고분에서 발견된 백제 금동 신발로 미루어 볼 때 이 지역에 살던 고대사회 세력의 주류들은 왕도에 버금가는 힘이 있었다고 추정된다. 그 힘의 바탕은 아마도 비옥한 옥토에서 나오는 경제력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다.
조선시대 세금 납부 1위 나주
나주의 번영은 완도 청해진淸海鎭의 흥망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장보고張保皐(?~841)는 막대한 부와 군사력을 바탕으로 신라-당나라-일본을 잇는 해상무역을 독점해 ‘해상왕국’을 형성했다. 그러나 841년경 장보고가 암살된 이후 청해진 또한 851년에 해체되었고, 나주는 자연스럽게 목포에서 영산포 위쪽까지 이어지는 뱃길을 통해 해상교통과 무역의 중심지로 번영을 누렸다.
부를 축적했던 나주지역 호족들은 903년 왕건과 견훤의 패권 싸움에서 왕건에게 재정을 지원하는 등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다. 훗날 장화왕후가 된 ‘완사천 러브스토리’의 주인공 오씨 처녀의 아버지 ‘오다련’이 호족들을 규합하는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고 전해진다.
한수제공원에서 장원봉으로 오르는 구간은 완만한 숲길이다.
고려 건국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나주는 역사의 무대에 화려하게 등장한다. 왕건과 장화왕후 오씨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고려 2대왕 성종이다. 983년 성종 2년, 목牧이라는 행정 구역을 편제하고, 전국에 12목(양주, 광주, 충주, 청주, 공주, 해주, 진주, 상주, 전주, 나주, 승주, 황주)을 두었다.
12목 중 하나가 된 나주는 조선시대에는 전국에서 가장 세금을 많이 낼 정도로 오랫동안 번영을 누린다. 조선 후기인 1897년, 목이 폐지될 때까지 천년고도 목사골에는 300여 명의 목사牧使가 있었고, 명실상부 호남의 경제, 문화, 군사, 행정 중심지였다. 나주 객사 금성관錦城館(보물 제2037호)은 조선시대 객사 중 제일 큰 규모를 자랑한다.
나주는 ‘소경小京’, 즉 ‘작은 한양’이라 불릴 정도로 인구가 많고 물산이 풍부했다. 북쪽으로는 금성산錦城山이, 남쪽으로 영산강이 있어 큰 도시가 발달하기에 좋은 배산임수背山臨水 지형이다.
금성산의 이름은 나주의 옛 지명인 ‘금성錦城’에서 유래한다. 평야지대 한가운데 우뚝 솟아 있는 금성산은 사방으로 시야가 트여 있고 물길과 맞닿아 있어 관측과 방어에 유리하다. 군사적 요충지답게 지금도 정상에는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어 산행 시에는 주변으로 우회해야 한다.
한수제공원 입구 항일독립투사 나월환 장군 동상 뒤쪽부터 등산로가 시작된다.
의향의 고장 나주
금성산 산행은 한수제공원에서 출발해 장원봉~월정봉을 지나 원점회귀하는 것이 수월하다. 반대로 한수제공원에서 월정봉으로 곧장 오르면 처음부터 가파른 경사를 각오해야 한다. 크게 4개의 봉우리인 장원봉(261m)~낙타봉(430m)~두꺼비봉(뚜껑봉, 369.1m)~월정봉(217.8m)을 오르내려야 하기에 체력 소모가 큰 편이다. 다행히 약수터에서 한수제로 곧장 내려가거나, 오두재에서 한수제로 내려가는 탈출로가 있다.
장원봉에 있는 2층짜리 팔각정에서는 영산강의 S라인 물줄기와 나주평야, 무등산이 한눈에 보인다. 산 아래쪽에 동신대학교와 김천일 의병장을 모신 경렬사, 동쪽으로는 나주읍성의 4대문인 동점문, 영금문(서성문), 남고문, 북망문도 볼 수 있다. 영금문은 1894년 전봉준과 당시 나주목사 민종렬이 담판하던 역사적인 장소다. 동학농민군은 전라도 53개 고을을 모두 함락시켰지만 유일하게 나주성은 접수하지 못했다.
나주사람들은 ‘의향義鄕’이라는 자부심이 크다. 나라가 어려울 때 목숨을 내 걸고 선봉에 서는 결기가 있다. 임진왜란 당시 호남에서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킨 김천일 의병장을 비롯해 죽봉 김태원 장군 등이 나주에서 나고, 나주가 광주학생독립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던 것도 우연이 아니다.
나주역은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시발점이 된 장소다. 1929년 10월 30일 광주에서 출발한 호남선 통학열차가 나주역에 도착했다. 그런데 열차에서 내린 일본 학생 무리가 두 명의 한국 여학생의 댕기를 당기며 희롱했다. 이를 목격한 한 여학생의 사촌동생인 박준채 학생과 일본인 학생 사이에 큰 싸움이 일어났다.
약수터 인근에는 시원한 암반계류가 있어 탁족을 즐길 수 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대규모 항일 시위가 일어나게 되었고, 그해 11월 3일 광주학생독립운동으로 확산되었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은 3.1만세운동, 6.10만세운동과 함께 ‘3대 독립운동’의 하나로 평가받는다.
장원봉을 지나고 야생녹차가 많이 자라는 ‘행복의 문’에서 갈림길에 주의해야 한다. 산림욕장 방향으로 내려서면 약수터를 지나 오두재로 향한다. 반면, 낙타봉 방향으로 올라서면 군부대 입구에서 정상을 우측으로 크게 돌아가는 길로 들어서게 된다. 약수터에서 오두재까지 1.8km 정도 등산로 구간에는 대전차 철조망이 담장처럼 둘러쳐져 있고 ‘과거 지뢰 지대’ 표지가 있어 지정된 등산로를 벗어나지 않도록 주의한다.
금성산은 도립공원화를 추진하고 있다. 정상을 시민들에게 돌려주기 위한 첫 관문으로, 1970년대 말까지 정상 주변에 매설되었던 지뢰 1,853개를 제거하고 있다. 현재 70여 개의 지뢰가 남아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오두재삼거리. 금성산은 산악자전거 마니아들이 즐겨 찾는 ‘MTB 메카’다.
독특한 고산지대 분위기 ‘한국의 하이랜드’
오두재 삼거리에서 우측으로 0.5km 정도 더 가면 울음재에서부터 출발해 옥산(336.2m)~병풍산(265.4m)으로 이어지는 병풍지맥이 일직선으로 뻗어 있다. ‘한국의 하이랜드’라 불릴 정도로 독특한 고산지대의 분위기가 느껴지는 곳이다.
오두재에서 두꺼비봉을 거쳐 월정봉까지는 3km 정도 거리다. 월정봉에서 오른쪽 저수지 너머로는 정도전이 유배되었던 백룡산(347.2m)이 보인다. 월정봉에서 내려다보는 한수제와 나주읍, 영산강의 풍경은 한 폭의 그림이다. 한수제 전체를 걷는 둘레길(경현길)에는 예쁜 카페와 글램핑장, 맨발걷기 코스, 포토존, 목재데크가 설치되어 있어 시민들이 산책하러 즐겨 찾는다.
산행길잡이
 한수제공원~장원봉(금영정)~산림욕장(약수터)~오두재~두꺼비봉(뚜껑봉)~떡재~ 월정봉~한수제~한수제공원(약 11.3km, 약 4시간 30분 소요)
 한수제~장원봉(금영정)~산림욕장(약수터)~낙타봉~울음재~매봉~옥산~이별재~ 계량재~병풍산~불교사~송학동(약 17km, 약 6시간 소요)
교통
서울 용산역에서 나주역으로 가는 KTX를 타는 것이 가장 편하고 빠르다. 첫차 05:50, 막차 17:45. 고속버스를 이용한다면 서울 센트럴시티터미널에서 광주종합버스터미널로 간 후 나주시외버스터미널까지 가는 시외버스로 갈아탄다. 나주시외버스터미널에서 한수제까지는 1.6km 거리로 택시를 타면 기본요금이 나온다.
봄은 만물이 시작하는 계절이다. 그중 대표 만물을 꼽자면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꽃을 부를 것 같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그 꽃 중에서도 대부분은 벚꽃을 꼽을 것이다. 벚꽃의 매력은 꽃 한 송이보다는 나무 한 그루 전체의 형상에서 진가를 느낄 수 있다. 또 한 그루보다는 군락이 더욱 더 화려하다.
산은 계절마다 매력을 품고 있다. 봄철 산행의 묘미는 아마도 꽃구경이라 할 수 있다. 봄이 내뿜는 화려함과 흐드러짐을 만끽하려 벚꽃 산행을 찾아봤는데, 우연히 진달래가 절정을 이루고 있다는 거제의 대금산을 발견하게 되었다. 신라 때 쇠를 생산해 대금산大金山이라는 명칭을 받았지만, 산세가 순하고 비단 폭 같은 풀이 온 산을 뒤덮고 있어 크게 비단을 두른 산이라 하여 대금산大錦山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비록 집에 비단 옷은 없지만, 비단을 밟아 보는 호사를 누리는 산행은 어떨까 하는 마음에 대금산으로 향했다.

본 기사는 월간산 2022년 5월호에 수록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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