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남북] 말의 신뢰만 되살려도 성공이다

신동흔 문화부 차장 2022. 5. 24.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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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훈 법무부 장관의 취임식 현장을 담은 유튜브 영상 한 편이 게시된 지 반나절 만에 조회수 100만 뷰를 넘겼다. 학창 시절 교장 선생님 조회사 못지않게 지루할 부처 장관 취임사가 화제가 된 것은 이례적이다. 취임사를 직접 검색해본 사람들도 그 어느 때보다 많았던 듯하다. 구글에 ‘한동훈 장관 취임사’를 입력했을 때 나오는 결과 개수는 688만개(22일 기준)로, 전임자들에게도 동일한 검색어를 넣었을 때 나오는 수치와 비교하면 추미애 전 장관의 71배, 박범계 전 장관의 28배에 달한다. 팬덤에선 뒤지지 않을 조국 전 장관보다도 4배 가까이 많다. 구글 검색엔진이 제시한 추정치일 뿐이지만, 짧은 기간에 상대적으로 많은 게시물이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국민들이 장관·정치인의 말[言]을 일일이 찾아보는 현상을 마냥 반기기만은 어렵다. 그 심리적 기저에는 ‘내 눈과 귀로 직접 확인하겠다’는 일종의 불신(不信)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이는 전임 정부가 남긴 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난 5년간 말과 현실은 번번이 따로 놀았다. “부동산만은 자신 있다” “광화문 대통령 시대를 열겠다” “국민과 수시로 소통하겠다”던 전임 대통령의 후보 시절 공약이나 국민과의 대화 발언 상당수는 지켜지지 않았다.

말과 사실(fact)이 일치하지 않을 때, 허위 사실이 만들어진다. 이 경우 대부분의 사람들은 말을 수정한다. 경제학자 케인스도 “나는 사실관계가 바뀌면 의견을 바꿉니다. 당신은 어떤가요”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하지만, 문 정부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우리 유전자에 사찰은 없다”고 우기거나, 시장과 동떨어진 통계를 제시하며 “집값이 안정되고 있다”는 식의 말을 믿으라고 했다. 일종의 대안적 사실(alternative facts)을 만들어낸 것이다.

대안적 사실은 원래 미국 트럼프 정부를 비판할 때 사용되던 용어인데, 우리나라는 더불어민주당에 적용하면 맞아떨어지는 경우가 많다. 최근 한동훈 장관 청문회에서 벌어진 해프닝은 대안적 사실이 어떻게 작동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김남국 의원은 한 장관 딸이 이모 교수가 아니라 자기 이모(姨母)와 논문을 썼을 것이라는 자신의 머릿속 현실을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제 딸이요?”라고 반문하는 한 장관에게 “그렇습니다”라고 단호하게 답했을 리 없다. 최강욱 의원도 한 장관 딸이 기업에서 협찬 받은 중고 컴퓨터를 자기 이름으로 기부했을 것이라는 믿음을 확인하려다가 망신을 당했다. 2020년 ‘검언유착’ 공방 과정에서 “검찰이 나를 계좌 추적했다”고 떠들다 최근에야 “잘못된 발언”이라고 말을 바꾼 유시민 전 노무현재단 이사장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자신들의 믿음이나 기대에 부합하기만 하면 사실 관계를 확인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지적(知的) 나태함을 드러냈다. 그 부작용으로 이제 국민들이 정치인의 육성(肉聲)을 직접 듣고, 취임사 원고도 자기 눈으로 확인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탄핵 과정에서 이른바 태블릿 PC 논쟁을 빚으면서 말의 권위가 훼손됐다. 거기에 담겼던 연설문 원고 때문이었다. 이를 비판하며 집권한 문재인 정부는 아예 말의 신뢰를 잃어버렸다.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고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던 문 전 대통령 취임사는 그 주술(呪術)적 매력이 사라지자 공허하기만 할 뿐이다.

윤석열 대통령 취임사나 5·18 기념식 연설문에 대해 “(대통령이) 직접 썼다”는 점이 부각되고 있다. 전임자의 과오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의지에서 출처와 귀속을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대통령의 말은 결국 사실에 부합한다는 것을 보여줄 때 힘을 발휘할 것이다. 전(前) 정부에서 일상이 되었던, 현실로부터 유리된 말들에 지친 국민들 마음도 그제야 치유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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