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사일언] 일본판 ‘산티아고길’

손장원, ‘건축가의 엽서’ 저자·인천재능대 교수 2022. 5. 24.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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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 전 고교 동창들과 떠났던 대마도 여행에서의 일이다. 부산항을 출발한 배가 한 시간 남짓 지나 대마도 북단 하타카쓰항에 정박했다. 항구 주변 렌터카 업체에서 차를 빌려 안내 지도에 표기된 관광지를 거쳐 이즈하라에 여장을 풀었다. 다음 날 아침 명소 몇 곳을 더 둘러보고 하타카쓰항으로 돌아와 차를 반납하고 나니 배 출발 시간까지 4시간이나 남아 있었다.

시간을 보낼 만한 곳이 마땅치 않아 시내를 한 바퀴 돌아봐도 3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관광지도를 다시 꺼내 찬찬히 살펴보던 중 ‘히타카쓰 88개소 지장보살 순례길(40분 소요)’이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40분을 보낼 소일거리를 찾아 잠시 뒤 ‘풍만사 팔십팔개소 입구(豐滿寺 八十八個所 入口)’라고 쓰인 표지판에 도착했다. 1930년대에 발행된 인천 지도에 표기된 ‘팔십팔개소’라는 글자의 비밀이 풀리는 순간이었다. 나지막한 능선을 따라 1㎞ 남짓한 거리에 작은 석불, 불상 이름을 적은 표지판과 번호가 들어간 고무 도장이 한 조를 이룬 석불 88기가 있었다.

팔십팔개소는 일본 시코쿠(四國)지방에 위치한 1200㎞에 달하는 일본 불교 순례길로 일본판 산티아고 순례길로 이해해도 될 것이다. ‘신시코쿠(新四國)’는 시코쿠 순례에 나설 수 없는 사람을 위해 마을 가까운 곳에 설치한 것이다. 일제강점기 조선에는 서울, 부산, 인천, 창원(마산), 목포, 청진, 주을온천 등지에 신시코쿠가 세워졌다. 외국에 사는 그들에게 영장(靈場) 순례는 더 절실했을 것이다. 목포 유달산 바위에 새겨진 부동명왕과 홍법대사상이 그 흔적이다.

생각지도 못한 짬이 생겨 미완의 숙제를 풀었다. 하루 24시간이 모자라고 일주일이 번개처럼 지나갈 때 가끔 대마도에서의 일을 떠올리게 된다. 여유는 단순한 멈춤이 아니라 삶의 또 다른 모습이다. 여유의 가치를 깨달은 사건이었다.

손장원 인천재능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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