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이 투쟁이던 '승복 색깔 잿빛' 인생
[손호철 서강대학교 명예교수]
60. '박사보다 높은 밥사, 술사'
'뜨링'
매일 새벽 4시면 적지 않은 사람들은 카톡 소리에 잠을 깬다. 원경스님이 2000여 명의 지인들에게 보내는 <산사의 편지>다(원경은 수 십 년 전부터 눕지 않고 앉아서 잠을 잤고 새벽 1시면 일어나 참선을 하거나 <산사의 편지>를 정리해 보냈다).
그 내용은 불교의 선으로부터 인생의 지침, 현대 과학, 건강법, 한국현대사, 빨치산 이야기 등 풍부하기 짝이 없다. 이 같이 다양한 주제의 글을 쓰고 2000여 명의 지인들에게 보내는 일은 초인적 열정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다. 원경스님은 최근 들어 눈이 나빠져 핸드폰에 글을 쓰기 어려워질 때까지 매일 새벽 1시면 일어나 이 같은 일을 했다. 그 결과가 800쪽짜리 책 6권으로 출간한 <산사의 편지>다. 무려 4800쪽이고 글의 꼭지 수만도 1000개가 넘는다.
정말 놀라운 것은 다양한 주제에 대한 그의 지식이다. 역사에 대한 지식은 박정희와 좌익 경력으로부터 남로당과 좌파운동, 빨치산의 역사에 대해 많은 것을 가르쳐 준다. 개인적으로 빨치산이 그 당시는 '야산대'라고 불렸다는 것을, 보도연맹의 비극에는 남로당의 오류도 있다는 것을 그의 글을 보고 배웠다.
'이칭 행동대, 인민유격대, 빨치산, 미군정기 남조선노동당이 투쟁을 벌이기 위해 만든 조직이다. (…) 1946년 대구에서 촉발된 10월 인민항쟁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10월 항쟁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 미군정의 비호를 받는 우익세력과의 대결에서 밀려나 투쟁을 계속하기 위해 산으로 들어갔는데 이들을 산사람이라고 불렀다.'('야산대', 5권 752쪽)
'일부 박헌영의 측근에서는 이 때(여순사건 등 48년 당시-인용자) 지하선을 남겨 놨어야 했는데 전부 입산시킨 것은 증대한 과오라고 판단을 했던 것이다. 덕분에 6.25가 터졌을 때 (…) 후방을 교란시킬 지하세력이 없어서 할 만한 일을 못하고 전멸했던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전향한 좌파조직인 보도연맹 학살사건에서 연맹원은 지하세력 남로당 유격대와 아무런 연결고리가 없었고 군과 경찰에 체포되어 처형을 당하게 된다. 오히려 살아남은 보도연맹원들은 남하한 북의 인공 통치 시절에 배신자라며 인민재판을 받고 동지들의 손에 처형되기도 했다.('야산대의 역사', 1권 250쪽)
건강에 대한 그의 지식은 상식을 뛰어넘고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우리 속담에 냉수 먹고 속 차려라 (…) 아무 생각 없이 시원하게 냉수를 마시는데, 냉수는 폐질환의 원인이 됩니다. 냉정히 따지면 흡연보다 더 폐에 나쁜 것이 냉수입니다.'('온생, 냉사'. 5권 351쪽)
'조금 짜게 먹고 물을 자주 마시면 몸 안 독소가 빠진다. 음식 운동으로 몸을 따뜻하게 하자. 소금을 적게 먹으면 혈액이 썩는다. (…) 당뇨병은 소금만 충분히 먹어주면 충분히 고칠 수 있다. (…) 의사들의 저염식 권장은 절대 옳지가 않다. 문제는 어떤 소금을 먹느냐는 것이다. (…) 옛날 우리 조상들은 광 시렁 위에 소금가마니를 재어 넣고 3년이 된 것부터 먹었다. (…) 엄청난 지혜 아니었던가? (…) 소금은 생명의 핵이며 생명 그 자체이다.'('싱겁게 먹는 것은 대재앙', 3권 475쪽)
한국 최고의 선승인 송담스님의 맞상좌답게 선에 대한 지식도 놀랍다. 여러 선사들에 대한 이야기로부터 선 자체에 대한 글들에 이르기 까지 많은 지식을 알려준다.
'좌선(坐禪)이 깨침의 형태라면 깨침이 좌선의 내용이다. 좌선과 깨침은 다른 것이 아니며, 이것을 지관타좌(只管打坐)라고 한다. 오직 앉아있을 뿐이라는 뜻이며, 앉아 있는 것이 깨침 그 자체이기 때문에 앉아 있다는 사실이 다름 아닌 그대로가 깨침으로서의 좌선이다.'('묵조선(黙照禪)', 6권 720쪽)
인생에 대한 지침도 애정과 지혜가 넘쳐난다.
'석사, 박사보다 높은 학위는 밥사랍니다. 까칠한 세상, 내가 먼저 따뜻한 밥 한 끼는 사는 마음이 석사, 박사보다 더 높다고 합니다. 밥사보다 더 높은 것은 술사라고 하네요. (…) 술사보다 더 높은 것은 감사라고 합니다. (…) 감사보다 더 높은 것은 봉사라고 합니다. (…) 공자맹자순자노자장자보다 더 훌륭한 스승은 웃자라고 합니다. (…) 웃자보다 더 좋은 스승은 함께 먹고 함께 살자라고 합니다.'('밥사', 1권 461쪽)
'삶을 뜻하는 생(生)은 소 우(牛)자와 한 일(一)이 합쳐진 것으로 소가 외다리를 건너는 형국입니다. 소가 외다리를 걸어가는 것은 위기의 연속이라는 뜻입니다. 아슬아슬하고 때로는 두렵지만 건너야만 합니다. 사람 인(人)자는 두 사람이 서로 기대고 서 있는 형국입니다. 서로 기대고 격려하면서 돌아올 수 없는 외다리를 함께 건너가는 것이 인생입니다.'('인생이란?', 1권 183쪽)
'이탈리아 영화배우 안나 마리냐가 늙어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 사진사 양반 절대 내 주름살을 수정하지 마세요. 사진사가 그 이유를 묻자 안나 마리냐가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그걸 얻는데 평생이 걸렸거든요.('눈물이 없는 눈에는 무지개가 뜨지 않는다', 1권 479쪽)
'강물이 느리게 흐른다고 강물의 등을 떠밀진 마십시오. 가속 액셀레이터도 없는 강물이 빨리 가라고 한다고 속력을 낼 수 있겠습니까? 달팽이가 느리다고 달팽이를 채찍질하지 마십시오. 우주의 법칙에서 달팽이는 느려도 느리지 않습니다. (…) 나를 찾아가는 여행 그것이 인생입니다. (…) 죽음이 언제나 우리에게 닥쳐올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겸손해질 수 있습니다. 죽음은 우리 인생의 가장 큰 스승이며 가장 큰 공부입니다. 산자의 그리움은 족쇄와 같아서 살아있는 사람이 내려놓지 않으면 망자는 떠날 수가 없습니다.'('산수', 1권 25쪽)
61. 원로회의 부의장
"원경 대종사, 감축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2017년 12월 원경은 조계종 원로회의의 부의장에 선출됐다. 원로회의 부의장은, 정치로 이야기하자면, 국회부의장에 해당되는 자리로, 조계종 3인자가 된 것이다.
원로회의 부의장 자리에 오르자, 67년 전 아홉 살의 어린 나이에 살기 위해 구례 화엄사에서 머리를 깎아야했던 기억으로부터 빨치산들을 만난 연곡사와 피아골, 인천상륙작전 후 다시 피난길에 올라 관음암에서 홀로 무서움에 떨었던 동해 삼화사, 한산스님을 기다리며 천자문을 뗀 단양 구인사, 이현상 아저씨를 다시 만난 무주 원통사, 남부군 야전병원에서 부상당한 산사람들의 신음소리를 들었던 함양 벽송사 등 한국전쟁 때 거쳐 갔던 수많은 사찰들, 전쟁 후 공부했던 김천 청암사, 멸치를 탕국에 넣었다가 쫓겨난 해인사, 아버지의 죽음을 안 예산 대련사, 성인 되어 불교에 귀의하기로 결심하고 전강스님을 수계자로 수계를 받고 송담 스님의 상좌가 된 인천 용화사, 처음으로 어머니를 만난 예산 수덕사의 정혜사, 삶을 비관해 음독했던 원주 영천사, 절의 현판을 도끼로 부수고 감옥을 가야 했던 상주의 현판소동, 제주도에서 자신이 중건했던 봉림사, 이와 관련해 잡혀간 국토건설단, 처음으로 주지가 됐던 여주 황왕사, 황왕사에서 겪은 기이한 절도사건, 수원포교원에서 다른 스님들의 도움으로 만든 가호적, 포교원에서 있었던 보안사 납치사건, 용주사 주지 내정설로 동료들의 질시로 들어야 했던 '빨갱이 새끼 중' 소리, 이 같은 소동 속에 귀양 가듯이 떠난 안성 청룡사, 운동권의 사랑방으로 사람들이 들끓었던 신륵사 주지 시절 만기사에서 보낸 지난 이십 여 년 등 60여 년 간의 절집 생활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한 때 송담 스님의 총애를 질시한 도반으로부터 '빨갱이 새끼 중'이라는 색깔론에 시달리기는 했지만, 이후 원경은 '빨갱이의 두목인 박헌영의 혼외자'라는 출신에도 불구하고 조계종 내에서 입지에 성공했다. 2014년에는 조계종의 최고의결기구인 원로회의 의원으로 추대됐고, 2015년에는 조계종의 최고법계인 대종사에 서품됐고, 2017년에는 원로회의 부의장에까지 오른 것이다.
이는 우리시대 최고의 선승인 송담 스님의 맞상좌라는 이력과 자신의 뛰어난 법력, 리더십과 친화력 등 원경스님이 갖고 있는 여러 장점들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네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항상 조심하고 살아야 한다"는 한산스님의 충고, "살아남아 아버지의 전집 등을 만들어 아버지가 명예 회복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주는 것이 너의 책무"라는 한산스님의 유지에 따라, 조계종 내에서도 그는 조심하고 '보수적'으로 행동해 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우리 사회의 '주변인 중의 주변인'이지만 조계종에서는 '주류'로 살려고 노력했고 그렇게 살아왔다.
"송담 큰스님을 잘못 보필한 저희의 허물을 참회하오니, 탈종을 거둬주십시오."
원경의 은사이자 인천 용화선원장인 송담 스님은 조계종의 돈 선거 등 세속화에 불만을 가져 오다가 2014년 자신의 문중이 관리하는 제2교구 본사 용주사 주지자리를 놓고 제자들이 대립하자 조계종을 떠난다는 탈종을 선언했다. 이는 조계종, 나아가 우리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줬다. 그러자 48명의 상좌들도 송담을 따라 탈종했다.
'송담대종사지탑'. 만기사 언덕에 세워진 '박헌영지탑' 옆에는 이 같이 쓴 탑이 세워져 있다. 원경스님이 아버지의 해원탑을 세우면서 자신의 스승(은사)인 송담스님을 위해 미리 마련해 놓은 사리탑이다. 원경스님은 송담의 맞상좌이고 송담 스님을 위해 이처럼 사리탑까지 만들어 놓았지만 스승을 따라 탈종하지는 않았다.
"이 싸움은 이길 수 없습니다."
몇 년 전 조계종의 개혁을 위해 명진스님 등 의식 있는 승려들이 일어섰을 때, 불교 개혁운동을 돕고 있는 몇 교수가 그를 찾아가 도움을 청하자 원경스님은 먼 산을 바라보고 말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이 운동을 '옳다 그르다'가 아니라 '승패'의 관점에서 이야기했다는 사실이다. 그의 예측대로 조계종 개혁운동을 실패했고, 조계종은 명진스님 등을 제명했다.
이상주의자로, 불같은 혁명가로 살았던 박헌영과 달리, 원경은 박헌영의 이들로 이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 '현실주의자'로 살았다. 특히 자신의 존재기반인 불교계에서는 그러했다. 아니, 정확히 이야기해, 이상주의자 박헌영의 꿈을 복권시키기 위해, 그는 현실주의자로 살아야 했다. 그를 처음 대중에게 알린 <시사저널> 박상기 기자의 표현대로, "아버지 박헌영의 생애가 지칠 줄 모르고 타오르던 불꽃이었다면, 아버지가 남긴 잿더미에서 시작한 그의 삶은 승복 색깔의 잿빛"일 수밖에 없었다.
1980년대 유학시절 제3세계의 저항음악들을 연구한 적이 있다. 연구 결과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모든 저항음악들이 우리가 알고 있는 전형적인 운동가요처럼 비장하고 슬픈 음악인데 반해 남아프리카의 저항음악은 쾌활하기 짝이 없고 삶의 즐거움을 칭송하는 노래들이 대부분이었다. 극단적인 인종차별주의로 세계 어느 나라보다 억압적인 남아프리카에서 운동권 음악이 신나고 삶을 찬양하는 음악이라는 것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아 알아보니 그 이유가 충격적이었다. 그 이유는 아파타이트라는 인종주의 아래서는 '살아남는 것 그 자체가 최고의 투쟁'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절망이 아니라 희망을, 삶의 슬픔이 아니라 삶의 희열을 노래하는 것이 진정한 투쟁가요라는 것이다.
대한민국이라는 광기의 반공주의 사회에서 박헌영의 아들이 할 수 있는 최고의 투쟁은 '살아남는 것 그 자체'였는지 모른다.
<계속>
[손호철 서강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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