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사진·편집·디자인 아우른 '이지누 스타일 인문학' 그리워요"

한겨레 2022. 5. 23. 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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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신이의 발자취][가신이의 발자취] 고 이지누 기록작가를 보내며
2017년 9월 영국 하드리아누스 방벽 답사를 하고 있는 고 이지누 작가. 사진 김진의씨 제공

올해 초 장문의 문자 메시지 한 통을 받았다. 발신인은 작년 봄 뵙고 난 이후, 연락이 닿지 않던 이지누 선생이었다. 지난해 가을 건강이 심하게 망가져서, 그간 편집장을 맡아온 잡지 <보보담> 을 더 이상 만들지 못하게 되었으나, 건강을 회복해서 다시 일할 거니 성원을 부탁한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선생은 지난 8일 끝내 우리 곁을 떠났다. 향년 63.

이지누 선생을 한마디로 규정하기란 쉽지 않다. 우선 그는 1980년대 후반부터 구산선문의 유적과 엄혹한 분단의 현장을 기록해오고 전국의 폐사지와 마애불, 한강 등 한국의 문화와 자연을 인문학적 시선으로 촬영해온 사진가였다. 또 <우연히 만나 새로 사귄 풍경>과 <절터, 그 아름다운 만행>, <마음과 짝하지 마라, 자칫 그에게 속으리니> 등의 폐사지 답사기 연작을 통해 이 땅의 사람과 문화, 역사와 자연을 대상으로 해박하면서도 유려하고, 스스로를 드러내는 글쓰기로 독자들을 매료시킨 작가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그는 20여 년 전 계간지 <디새집>과 최근 수년간 엘에스(LS) 네트워크에서 펴내는 인문사외보 <보보담> 의 편집장을 맡아, 한국의 문화를 주제로 기획력과 세련된 편집 감각을 뽐냈던 눈 밝은 에디터이기도 했다.

지난 5월8일 지병으로 별세한 고 이지누 작가의 빈소. 유족 제공

그는 1990년대부터 작가와 사진가, 편집자라는 서로 다른 영역을 넘나들며 ‘이지누 스타일’ 의 매체를 다양하게 발표해왔다. 그는 언제나 전시장이 아니라 출판물의 형태로 자신의 이야기를 쓰고 독자와 만나고자 했다. 작업의 주제는 넓었고 시선은 그윽했다.

그의 깐깐한 고집과 인문학적 성찰, 기획자로서의 역량이 총동원되어 나온 책이 바로 잡지 <디새집>이었다. 질박함과 세련미가 공존하는 편집디자인, 취재원과 오래 관계를 맺고 인터뷰하고 촬영한다는 잡지의 편집원칙, 토박이말로 기록한 촌로의 목소리부터 작가 박완서의 글이 함께 공존하는 잡지를 만드는 이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다. 그가 이끌던 ‘우리땅 밟기’ 답사여행에서 처음 알게 된 것들도 많았다. 경남 산청에 자리한 600여 년 된 정당매의 고즈넉한 향기를 처음 맡았고, 경주 남산의 신선대와 탑골바위에서는 시시각각 빛에 따라 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마애불의 아름다움을 마주하였다. 그는 독자들이 이 땅의 빛과 바람이 만들어내는 순간을, 폐허의 미학을 스스로 느끼도록 이끌던 순정한 안내자였다.

나는 선생과 20여 년간 인연을 이어오면서 함께 일을 하기도 했다. <경향신문>에서 기자로 일하던 시절에는 2006년 여름부터 1년간 ‘한강을 걷다’라는 연재원고를 받았고, 선생이 <보보담> 편집장을 맡으신 이후에는 필자로서 원고를 쓰기도 하고 1년간 객원편집자로 잡지를 만들기도 했다.

가까이 일하면서 새삼 놀란 사실은 그는 숱한 자료사진을 확보하고 있음에도, 언제나 다시 현장을 찾아 답사하고 촬영을 하고 이를 바탕으로 글을 써왔다는 사실이다. 한국문화를 아우르는 시선과 해박한 지식, 기획력은 인문학을 공부하는 나로서도 쉽게 따라가기가 어려웠다. 기획회의를 할 때면 선생의 눈은 반짝거렸고, 그 취지와 맥락을 설명하는 목소리는 들떠 있었다.

고 이지누 작가가 글을 쓰거나 사진을 찍거나 편집해 출판한 다양한 저작물들. 유족 제공
고 이지누 작가가 말년까지 편집장을 맡아 펴낸 엘에스(LS)네트워크의 계간 인문사외보 ‘보보담’. 유족 제공

선생은 지독한 완벽주의자, 미학주의자이기도 했다. 그는 언제나 글과 이미지, 편집과 디자인의 관계를 고민하고 형식적 실험을 지속해왔다. 깐깐한 성격에 높은 안목, 청년보다 더 끓어오르는 열정과 스스로를 성찰하는 태도는 수십년간 ‘이지누 스타일’이 유지될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 동시에 그의 건강을 해치는 적이기도 했던 것 같다.

선생은 10년 전 간암을 이식수술로 회복했는데, 지난해 가을 혈액암이 또 발병해 내내 앓았다. 그러나 끝까지 생의 의지를 잃지 않았다. 지난 3월에 뵈었을 때, 곧 회복하여 촬영을 다니고 책을 쓰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내보였고 그 사이 새 카메라도 장만했다. 근육이 빠져 뼈만 앙상한 다리를 보며 그의 건강을 염려하다가도, 그의 말대로 여름이 지나면 가을날 단풍 지는 경주 남산 자락의 절터를 함께 거니는 기대섞인 상상을 하곤 했다. 그러나 이제 그와 우리땅을 밟기란 불가능해졌다.

선생의 빈소에서 그와 함께 잡지와 책을 만들었던 여러 출판계 인사들도 별세했다는 소식을 뒤늦게 들었다. 한 시대가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오래 묵힌 글과 사진을 그리 좋아하고, 유명을 추구하는 구도자들이 없어서 좋다며 숨어 있는 폐사지를 널리 알리는 일에 힘쓰더니, 그의 공부방 컴퓨터에 폐사지처럼 잠들어 있는 숱한 사진과 원고는 이제 어찌 불러내야 할까?

병환으로 인해 선생과 인연이 끊겼던 지인들도, 왜 책날개에 찍힌 다음 책은 나오지 않는지 궁금해하며 기다리던 독자들도, 생전에 그를 몰랐던 분들에게도 부탁드린다. 부족하나마 이 글을 계기로, 그가 생전에 진력했던 한국문화를 기록하는 작업의 가치를 되새기고 이지누 선생을 함께 추모하기를.

윤민용/한국예술종합학교 강사· 미술사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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