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의 내부자들과 능력주의

한겨레 2022. 5. 23.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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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생의 청소·경비노동자 노조 고소·고발
건국대와 경희대, 고려대, 성균관대, 서울시립대, 연세대, 이화여대, 인천대, 중앙대, 한국외국어대, 홍익대 대학생들이 2018년 1월8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 정문 앞에서 ‘임금 인상 효과 무력화 시도에 맞선 대학 비정규직 노동자 투쟁지지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학생들은 대학이 청소·경비·시설·주차 등 업무를 맡은 비정규직 노동자를 해고하거나 단기 시간제 일자리 노동자로 전락시키는 등 최저임금 인상 무력화를 시도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왜냐면] 김동수 | 기록노동자·<유령들―어느 대학 청소노동자 이야기> 저자

연세대 학생이 연세대 청소·경비노동자들이 가입한 민주노조를 고소·고발했다. 이 노조가 매일 1시간 동안 쟁의권을 행사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학습권을 침해했다는 것이 이유다. 이 노조의 분회장인 김현옥씨는 노조를 만들고 활동한 15년 동안 처음 겪는 일이라고 했다.

이 학생은 자신이 당한 학습권 피해의 구체적인 죄목으로 업무방해를 거론했다. 대학 안에서 학생의 본업은 학습일 터다. 대학은 학생들에게 다양한 지식서비스를 제공하는 곳이다. 이런 곳에서 ‘시끄럽게 메가폰을 트는 시위’는 학생들에게 전공 시험이든, 공무원 시험이든, 결과적으로 피해를 끼칠 수 있다. 그렇다면 학습을 방해받는 일의 책임을 오롯이 노조에만 전가하는 것이 온당할까? 대학은 책임이 아예 없는가? 학습권과 쟁의권이 충돌하면 어떤 권리가 더 우선돼야 할까? 이런 질문들을 할 수 있는 곳도 아이러니하지만 여러 학문을 연구하고 진리를 탐구한다는 대학이다. 그래서 학문적으로 다양한 이야기가 오갈 수 있지만, 그의 소송으로 이러한 논의 절차는 생략된 채 불법이냐 아니냐의 이분법적 해결 방식만 남았다.

그는 현재 민주노조의 집회가 미신고 집회라는 점을 들어 불법이라는 주장도 했다. 대학은 교육과 행정업무를 제외한 모든 일을 외주화할 만큼 기업화한 지 오래다. 그럼에도 그동안 대학에서는 청소·경비노동자들을 학내 구성원으로 여기는 분위기가 강했다. 그들이 근로‘계약’상 여러 용역업체에 소속된 건 사실이지만, 다른 구성원들처럼 업무 ‘특성’상 대학 안에서 함께 지내기 때문이었다. 그들도 자신을 대학의 당사자로 느끼므로, 신고 없이 집회를 여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연세대생은 이 ‘묵시적 관행’에 제동을 걸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불매는 이윤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 기업의 매출에 타격을 줌으로써 소비자의 요구를 관철시키는 소극적 저항 행위다. 노조를 조직했다는 이유만으로 집단해고당한 엘지트윈타워 청소노동자들과 시민사회가 소비자들에게 엘지제품 불매운동을 제안한 건 빌딩 내부엔 사용자와 대항할 연대세력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소비자라는 ‘외부의 힘’을 빌려 ‘내부의 부당한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실패 가능성도 만만치 않다. 제품 소비자는 다수라는 이점이 있지만, 불특정하다는 한계 탓에 연대의 응집성이 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대학생도 지식서비스의 소비자이지만, 기존의 제품 소비자들과 달리 내부의 구성원이 될 수 있는 독특한 위치에 있다. 등록금이라는 ‘비용’을 지불하고 학위라는 ‘재화’를 얻으려면 최소 4년간 대학이란 공간에 몸담아야 한다. 결국 ‘소속감’이란 유대가 존재하기에 대학 내부에서 발생하는 문제에 관심을 갖기 마련이다. 아무리 대학이 기업화됐어도, 기업과는 다르게 소비자와 노동자 간의 더 적극적인 연대 조건이 마련돼 있는 셈이다. 여기에는 기업화된 대학에서 거의 폐기되다시피 한 지식서비스인 ‘진리’를 탐구하는 자들도 소수이지만 포함돼 있다. 연세대를 비롯한 대학의 청소·경비노동자들이 다른 곳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좋은 노동환경에서 일할 수 있는 이유다.

사실 그의 고소·고발 조치는 지식서비스의 소비자보다 판매자에 더 가까운 모습이다. 그전부터 대학들은 청소·경비노조가 쟁의행위를 할 때 종종 소송을 걸었다. 학습권 침해와 업무방해 등이 그 이유였다. 그들을 불법화해 투쟁동력을 상실케 하려는 작전이었다. 그래야 청소·경비업무 외주화 목적인 비용 최소화를 최대한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 연장선상에서 대학의 모습은 능력주의적 사고와 맞닿아 있다. 쟁의권을 행사하는 청소·경비노동자들이, 능력에 비해 임금과 처우를 너무 과도하게 요구한다고 생각하니 말이다.

그가 소송에 임한 이유가 정말로 학습권을 침해받아서인지, 기업화된 대학에서 신자유주의식 자기계발 서사를 체화해서인지, 20대만의 고유 현상인지 나는 잘 알지 못한다. 그의 소송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도 잘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건 ‘외부자들’의 쟁의권 탓에 학습권을 침해당했다고 생각하는 각각의 ‘내부자’들이 모이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그는 민주노조를 고소·고발한 뒤 대학 커뮤니티 앱에서 이 소송을 함께할 사람들을 모집하고 나섰다. 그 이름은 의미심장하게도 ‘연세대 불법 시위 대책위원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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