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FT는 미술하고 상관이 없다

한겨레 2022. 5. 23.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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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시장경제 간의 관계를 작업 주제로 삼은 예술가 앤디 워홀(오른쪽에서 세번째)은 자본가인 로버트 스컬(오른쪽에서 두번째)에게 ‘대중의 흥미를 끄는 법’을 가르치기도 했다. Jack Mitchell/Getty Images

[왜냐면] 최나욱 | 전시디자이너·미술평론가

미술 일을 하다 보면 요즘 들어 당연하다는 듯이 ‘엔에프티’(NFT·대체 불가능한 토큰)에 관한 질문을 받는다. 엔에프티란 작품 정보를 비롯한 대상의 고유한 데이터를 블록체인에 저장하는 기술이다. 복제가 손쉽던 디지털 환경에서조차 원본성을 보장하고, 기존 아날로그 방식에서는 추적하기 어려웠던 거래내역 등을 공유한다는 장점이 있다. 새로운 시장인 만큼, 작품성을 인정받은 적 없던 신진 작가들이 새로운 미술 고객에게 어마어마한 가격으로 작품을 판매하는 등 미술 내 지각 변동이 일어나고 있다.

기존 미술작가들도 엔에프티를 도외시할 수 없다. 한국 미술 거장으로 꼽히는 박서보가 “엔에프티로 작품을 판매하지 않겠다”고 발표하고,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시작한 독일 작가 히토 슈타이얼이 기자회견에서 “엔에프티 얘기 듣기 지겹다”고 으름장을 놓은 것조차 미술판에서 그 누구도 ‘엔에프티 담론’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보여준다. 엔에프티는 기존 미술부터 블록체인 시장을 겨냥하는 미술까지, 미술계 전반을 가로지르는 주제로 떠올랐다.

그러나 미술이 지금까지 하나의 키워드만으로 정의된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사람들은 ‘미술계’라는 단일한 세상을 생각하지만, 그 안에서 각자가 활동하는 미술계는 제각각인 탓이다. 단순하게는 미술관 작가와 상업 갤러리 작가, 그리고 에스엔에스(SNS)에서 활동하는 작가는 완전히 다른 직군이라고들 한다. 그렇기에 엔에프티의 장점이 얼마나 많든지 간에, 앞서 소개한 박서보와 히토 슈타이얼처럼 미술사 주류를 겨냥해온 작가들로서는 대응할 필요를 못 느끼기도 한다. 미술을 지탱해온 동력 중에는 명성이나 돈 이외의 다른 가치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박서보와 비플이 함께 전시할 일이 없지 않은가. ‘새로운 시장’이라는 이유로 그들을 한데 묶으려는 건 난센스일 따름이다.

엔에프티가 미술 담론에 끼어든 건 그저 돈 때문이다. 여러 기술적, 예술적 함의를 여기저기에서 주장하지만 실제로 그것을 이야기하는 주체는 기존 예술적 가치에는 관심이 없다. 오랫동안 미술사와 담론장에서 역량을 쌓은 사람들이 엔에프티를 주창하는 게 아니라, 가상화폐로 돈을 버는(혹은 벌고 싶은) 사람들이 그 가치를 얘기하고 있다. ‘가상화폐는 실체가 없다’는 반대 여론에 대응하기 위해, 추상적 가치를 지니는 미술을 방패막이로 삼은 셈이다.

지난 세기에도 비슷한 사례가 있었다. 미국의 신흥 부자들은 문화적으로 합리화하면서 자신이 번 돈을 소비하고 증식하기 위해 미술을 이용했다. 기존 부유층이 소비하는 미술을 어차피 따라잡을 수 없으니, 차라리 새로 등장한 팝아트 시장을 키우는 전략을 세웠다. 택시 사업으로 큰돈을 번 신흥 부자 로버트 스컬의 1986년 <뉴욕 타임스> 인터뷰 기사에는 이런 문답이 나온다. 기자가 ‘미술을 투자와 신분상승을 위해 소비하는 것 아니냐’고 묻자, 스컬은 “맞다. 신분 상승을 위해 다른 것보다 미술을 사용하려고 한다”고 인정한다. 고급 예술과 자본 세력 간의 관계를 조명하는 게 새로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의 차이 또한 확실하다. 당시 앤디 워홀을 비롯한 팝아트 작가들은 신진 자본의 덕을 보는 동시에, 바뀌는 각종 사회 문화를 주제 삼으며 대중과 시장을 이용했다. 그에 반해 오늘날 엔에프티 미술은 여러 투자 상품을 살펴보던 시장과 대중에게 이용되는 것에 가깝다. 전 지구화된 자본주의 체제에도 얼마간 거리를 두고 독립분과로서의 자리를 지키던 미술이 ‘시장 논리’ 아래 복속된다면, 그 미술사적 위상은 다를 수밖에 없다.

19세기 아일랜드 출신 시인이자 극작가인 오스카 와일드는 “자본가들은 식탁 위에서 예술 이야기를 하고, 예술가들은 식탁에서 돈 얘기를 한다”고 말했다. 작가 대부분은 판매 활로가 생긴다고 하니 어쩔 수 없이 엔에프티를 고민하게 되고, 대중은 돈이 되는 투자 상품이라 하니 나도 뛰어들어봐야 할 것 같은 부추김을 받는다. 작품을 보는 안목이나 취향의 자리에 투자 욕심이 대신하고, 그에 따라 작품들이 매매되는 실정이다. 물론 화폐란 애당초 실체가 없는, 사람들 간의 약속이다. 시장과 대중을 이용해 돈을 버는 건 틀리지 않았고, 예술도 여기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실체 없는 것을 실체가 있다고, 예술이 아닌 것을 예술이라고 말하는 게 일상적인 논리가 돼가면서 많은 사기와 기만이 생겨나고 있다. 미술 없는 미술품 거래에 임하고 싶다면, 거기에서의 미술은 미술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또 조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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