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으라, 낮은 자들의 목소리를

한겨레 2022. 5. 23.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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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결]

차별금지법제정연대가 지난 17일 국회 앞에서 지방선거 전 법 제정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숨&결] 강병철 | 소아청소년과 전문의

나는 기고만장했다. 병원은 연일 만원이었다. 평생 짓눌려왔던 돈 걱정에서 풀려난 것만도 날아갈 것 같았는데, 환자들의 사랑까지 듬뿍 받았다. 부모님을 모시고 3대가 함께 사는 집안은 항상 웃음이 넘쳤다. 2005년 말, 영국 소아과 의사 면허를 받았을 때는 하늘을 나는 기분이었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니 세상이 조그맣게 보였다. 도시빈민으로 자라 누구의 도움도 없이 내 힘으로 일군 성과였다. 삶이 힘들다는 말은 무능하고 노력이 부족한 자의 잠꼬대가 아닐까?

추락은 삽시간이었다. 교통사고를 당해 몸이 크게 망가졌다. 외상후스트레스증후군으로 수면제 없이 잠을 이루지 못했다. 설상가상 아이는 끔찍한 왕따를 당했다. 학교를 쫓아가도, 병원을 데려가도, 상담치료를 받으러 가도 가족에 문제가 없는지 캐묻고, 은근히 부모를 비난하는데 미칠 지경이었다. 모든 걸 내려놓고 캐나다로 건너왔다. 마음에 불덩어리를 안고 숲속을 몇시간씩 헤맸다. 어느 날 그만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 바닥에 누워 올려다보는데 숲이 그렇게 넓고 아름다울 수 없었다. 아하, 낮은 곳에서 보는 세상이 진짜였구나.

장애에 관한 책을 번역한 인연으로 많은 장애인과 그 가족을 만났다. 모두 낮은 곳에서 세상을 보아야 한다는 이치를 깨친 분들이다. 그때 비로소 고통받는 이웃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장애인, 비정규직, 여성, 노인, 외국인노동자, 다문화가정, 성소수자 모두 나와 똑같은 인간으로 존중받아야 함을 마음속 깊이 느낀다. 삶은 내가 잘나 독주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관심과 친절을 나누며 합주하는 것이다. 자신이 이룬 성과라고 자신만의 것일 수 없다. 나는 여자 동기들보다 경쟁에서 더 유리했으며, 외국인노동자가 생산한 농산물을 먹고, 수많은 비정규직 노동 덕분에 안락함을 누렸다.

여기 낮은 자들의 목소리가 있다. 서로 차별하지 말자는 것이다. 사회적 약자가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아가려면 네가지 문제를 극복해야 한다. 자신의 수치심과 죄책감, 사회의 무지와 편견이다. 모두 차별의 자식이자 어미다. 차별에 의해 생겨나, 또 다른 차별을 낳는다. 차별당한다고 느끼는 사람은 모든 건강지표가 악화한다. 코로나 사망률은 기저질환보다 사회적 계급과 더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연구도 있다. 차별을 공중보건의 문제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다. 차별은 당하는 사람은 물론 가하는 사람의 삶까지 옥죈다. 차별하는 다수 역시 도덕적 타락을 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차별금지법은 우리에게 특히 의미가 있다. 갈등 없는 사회는 없다. 어떻게 푸느냐가 문제다. 다양한 담론과 성찰이 나오고, 공감과 합의로 문제를 해결한다면 사회는 성숙한다. 그러나 우리는 주로 희생양을 만들어 문제를 덮어씌운 뒤 없애버리는 식으로 대처해왔다. 희생양은 항상 사회적 약자였다. 파업 노동자에 대한 비난이나 호남 차별을 생각해보라. 차별금지법이 제정된다면 우리의 차별 구조를 성찰하고, 갈등을 생산적으로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낮은 사람들은 돈도 권력도 없기에 눈물과 연대로 싸울 수밖에 없다. 활동가 둘이 무기한 단식으로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하다가 한분은 실려 갔다. 목숨을 걸고 호소하는데도 법을 제정해야 할 국회의원들의 여유로움(?)은 초현실적이다. 2007년 발의 뒤 일곱차례 제정이 무산되었고, 현 21대 국회에도 법안 네건이 발의됐지만 2024년에 다시 보잔다. 이제야 민주당에서 25일에 공청회를 연다는데, 그때면 혼자 버티고 있는 미류 활동가의 단식은 45일을 넘길 것이다. 국가인권위원회 조사에서 대다수 국민이 지지한 법안조차 이 모양이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자들이 본디 그렇다. 다행히 지방선거를 앞둔 시점이다. 의원들에게 문자를 보내 압박할 수 있다. ‘차별금지법 제정 촉구 문자행동’으로 검색하면 전화번호가 나온다. 회초리를 내리친다는 기분으로 문자 한통씩 보내주시기를 간곡히 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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