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제방에 축성했다는 거짓말을 또..한성백제 능멸은 못 참아"..'풍납토성 교수' 이형구의 분노
이형구(선문대 석좌교수·동양고고학연구소 소장)는 지난 3월 ‘문화재청 제작 풍납토성 서성벽 발굴 동영상 배포 중지 탄원’을 김현모(문화재청장)에게 냈다. 문화재청 산하 국립문화재연구원 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가 2020년 12월 7일과 2021년 10월 28일 각각 올린 ‘풍납토성 서성벽 복원지구 발굴’ 영상을 두고 낸 탄원이다.
이형구는 탄원에서 “특정 대학 같은 학과 졸업생들이 경건해야 할 풍납토성 발굴 현장을 무슨 경연장처럼 활동하는 장면을 영상으로 제작해 인터넷과 유튜브상에 배포·공개 유포한다”고 했다. 국가 산하 기관에서 문화재 영상을 만들어 시민들에게 알리는 일은 시비 걸 일이 아니다. 동영상 내용도 무난해 보였다. 서성벽 발굴로 한성백제 축조 기술을 확인했다는 요지의 내용은 오래전부터 풍납토성에 깃든 기술력을 강조한 이형구의 주장을 입증한 일로 환영할 법도 했다.
두 편의 동영상은 왜 ‘풍납토성 교수’의 분노를 촉발했을까. 탄원 요지는 ‘특정 대학 같은 학과 출신 사람들이 한성백제 역사를 왜곡했다’였다. 이 탄원은 한성백제 왕성 즉 ‘하남 위례성’이 풍납토성인지, 몽촌토성인지를 두고 벌어진 역사·고고학계의 첨예한 논쟁과도 맞닿았다. 이형구의 파란만장한 한성백제 발굴 역사와도 이어진다. 탄원 대부분은 풍납토성을 두고 진행한 자신의 학술·발굴사다.
이형구? 한때 ‘풍납토성=이형구’였다. ‘이형구’와 ‘풍납토성’을 빅카인즈와 포털에 검색하면 수백 건의 기사가 뜬다. 상징적인 사건을 담은 사진 하나가 있다. 2006년 11월 21일 풍납동 주민들이 이형구가 피신한 컨테이너 쪽으로 가려다 경찰에게 제지당하는 모습을 포착한 사진이다. 이형구는 이날 4시간 컨테이너에 감금 당했다. 주민들은 이형구의 발굴 활동이 개발을 방해한다며 분노했다. 인형 화형식도 열었다. 고고학자 중에 ‘화형식’을 당한 유일한 인물일 것이다. 수난은 이어졌다. 2007년 6월 8일엔 사비를 털어 마련한 풍납토성 내 백제유적 발견 10주년 기념 학술대회가 주민들의 집단시위 우려 때문에 취소됐다.
강남 도시개발 광풍 와중에 보존·발굴 주장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석촌동 고분 보존부터 몽촌토성을 거쳐 풍납토성 서성벽 쪽의 삼표산업 부지 반환까지 이 일대 유적 역사에서 이형구란 이름은 빠지지 않는다. 1990년대부터 보존·발굴을 주장해왔다. 그때마다 개발 논리와 부딪혔다. 포기하지 않았다. 사비로 현장 실측 조사와 발굴을 시행하고, 학술대회를 열었다. ‘몽촌토성 왕성’ 설을 밀던 학계 주류는 풍납토성이 왕성이라는 이형구의 주장을 배척했다. 이형구는 ‘비서울대’ 출신에다 ‘대만 유학파’라 무시당했다고 여긴다.
계속 공부했다. 한성백제·풍납토성 관련 연구 성과물(논문과 책)만 해도 151건이다. 대학을 떠난 뒤에도 연구를 이어간다. 학계에서 늘 ‘마이너리티’이자 ‘이방인’이다. 이형구는 “나를 능멸하는 건 참을 수 있지만, 한성백제와 풍납토성을 능멸하는 건 용서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인정투쟁’을 계속하는듯했다. ‘탄원서’는 곧 이형구에게는 무엇보다 절실한 ‘말하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달 15일 서울 송파구 풍납토성 현장에서 만났다. 그 뒤 전화와 e메일로 추가 인터뷰를 진행했다. 다음은 전문.
- 동영상 중 뭐가 문제인가.
“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는 풍납토성 서성벽을 두고 ‘한강의 충적 대지에 퇴적된 자연제방을 정지한 후 쌓았다’ ‘노동력을 절감하려고, 제방을 깎아 덧씌웠다’고 설명했다. 2000년대 초 ‘풍납토성은 인위적인 축성토가 아니라 자연제방’이라는 주장을 지금도 재탕한다. 왜곡이다. 거짓말이다. 제방이 들어설 수 없는 지형이다. 자연제방이 높이 쌓였다면 덧대든지 보축하면 되지, 무엇 때문에 절토·정지(整地)해서 다시 쌓아 올리나. 강남 풍납동과 강북 구의동 사이 강 흐름을 보면, 자연제방이 형성되기 어렵다. 범람으로 토사가 쌓여도, 홍수나 장마 때문에 퇴적되는 건 불가능하다. 상식적으로 보라. 서울 암사동, 하남 미사동, 춘천 중도 강변에 충적 자연제방이 어디 있나. 황하강이나 인디스강에도 연구소가 동영상에서 묘사한 산처럼 거대한 자연제방을 찾아볼 수 없다. 하늘에서 촬영한 풍납토성을 보라. 자연제방일 수 있는지.”
이형구는 “게다가 동영상(2021년 10월 28일)에 삽입한 모식도(模式圖)를 도용했다. 한국수자원공사에서 만든 것이다. 다른 기관이 자연현상 설명하려 만든 이미지를 거의 똑같이 베껴서 만들었다. 국가 기관이 인터넷에 떠도는 도면을 갖다가 만들면, 그건 국가가 사기 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탄원에서 “어디에도 ‘풍납토성 서성벽 자연제방 형성 모식도’를 참고한 자료 제공처나 참고문헌에 대한 소개가 보이지 않습니다. 고고학이야말로 실사구시(實事求是) 학문으로 발굴조사와 연구를 통하여 고고학적 사실을 구축해야 하는데, 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는 ‘교과서를 비롯하여 기존에 널리 사용되고 있는 자연제방 모식도들을 참고하여 새롭게 제작한 것’이라고 답변했습니다. … 타(他)의 성과물을 무단 전재(轉載)해서 자(自)의 성과처럼 온라인에 공개하고 있다고 하는 사실은 학문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심각한 사회적인 문제입니다”라고 했다.
- 자연제방 설이 왜 폄훼인가
“백제 사람들이 인력으로 이걸 다진 거다. 김포나 한강 하류에서 펄 흙을 가져오고, 인근의 모래와 황토를 섞어 다졌다. 진흙층이 1m 이상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배로 실어와 다졌겠는가. 들어간 흙 양이 8t 트럭으로 20만 대 분량인 154만 t이란 연구 결과도 있다. 자연제방 설은 한성백제를 과소평가하는 것이다. 몽촌토성을 왕성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풍납토성을 자연제방이라고 폄훼한다.”
지금 학계에서 한성백제 왕성을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두곳으로 여긴다. 각각 왕성이라는 설, 또는 둘 다 왕성이라는 설에다 ‘풍납토성-몽촌토성-이성산성-춘궁동 왕성’으로 옮겨다녔다는 ‘이동 설’도 나와 있다. 풍납토성 발굴 이후 풍납토성 왕성 설 쪽으로 기울었다. 국가 주도(추정) 제사 터, ‘대부(大夫)’라는 관직명을 새긴 백제 초기 토기 파편이 나왔다. 석촌동·가락동·방이동 등 백제 고분이 널린 점도 풍납토성 왕성 설의 근거다. 이형구는 “2011년 이후 중·고교 <국사교과서>는 풍납토성을 한성백제 왕성인 하남 위례성으로 공인하고 한성백제사를 서술한다”고 했다.
풍납토성 왕설설이 인정받는 과정은 순탄치는 않았다. 2001년 나온 국립문화재연구소 학예사의 논문 하나는 기와 출토, 15~20평형의 대형 주거지 면적, 정교한 목재, 불로 구운 단단한 점토층 등을 근거로 ‘풍납토성은 월등한 신분자가 주거했던 곳, 혹은 특별한 용도의 공간’이라고 했다. ‘왕성’이란 말은 쓰지 않았다. 풍납토성 왕성 설과 몽촌토성 왕성 설 논쟁 와중에 나온 표현 같았다.
- 어떻게 지었나.
“삼국시대 초기 고구려 국내성이나 백제 풍납토성은 중국 전국시대와 한대의 왕성과 제후성과 같은 기법을 썼다. 강이나 하천을 끼고 충적 평지에 기저를 다지고 판축(版築)으로 축성한 것이다. 전국시대 제 나라의 수도인 산동성 임치 제국고성, 노 나라 수도인 산동성 곡부 노국고성 등지가 예다. 고고학에서 땅 파는 것만 중요한 게 아니다. 문헌도 중요하다. 중국 고고학을 밤새며 공부했다. 석촌동 고분이나 몽촌토성, 풍납토성을 우리만의 생각으로 풀어나갈 수 없다고 깨달았다. 동북아시아 문화 흐름에서 중국을 뺄 수 없다. 그 흐름이 석촌동 고분, 풍납토성까지 이어진 것이다. 1992년 한중 수교 이전부터 중국을 여러 번 갔다. 중국 여러 고대 왕성도 강을 끼고 있다. 풍납토성이 꼭 그런 형이다.”
두 동영상엔 풍납토성이 ‘거대 인공 구조물이고, 판축 기법을 썼다’ 같은 설명이 이어진다. 이형구의 주장·분석이 결국 받아들여진 셈이다. 학자로선 기뻐할 일인데, 그는 되레 분노했다. 탄원서에 ‘국가 기관이 일반 학자들의 연구성과를 무시’한다고 썼는데, 자신에 관한 표현 같았다.
- 어떤 무시를 당했나.
“동영상 나레이션에 ‘풍납토성은 총길이 3.5㎞ 이상으로, 고구려의 국내성(2.6km)이나 신라의 월성(2.4km)보다 크다’고 나온다. 내가 1996~1997년 성벽을 실제 측량해 낸 3475m에서 나온 것이다. 무단 전재다. 1997년 1월 4일 내가 단장이던 선문대 역사학과 학술조사단이 풍납토성 내 현대아파트(현재 현대리버빌) 터 파기 공사장에서 왕궁 유적을 발견했다. 내가 당시 국립문화재연구소(국립문화재연구원 전신)에 전화로 이 사실을 통보했다. 공사가 중지됐다. 다음 달인 2월에 연구소가 긴급구제발굴을 했다. 그런데도 동영상엔 연구소가 풍납토성 왕궁 유적을 처음 발견한 것처럼 홍보한다. 2005년 6월17일 방영된 KBS <역사스페셜- 잃어버린 왕국 백제의 풍납토성>에서도 연구소가 발견한 것처럼 선전한다. 민간 노력을 격려하고 포상하는 면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다. 조사 연구는 물론 학술대회도 내 돈으로 해왔다.”
- 문화재청 전문위원을 오래 하지 않았나. 2017년엔 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 주최 ‘백제왕도 풍납토성 발굴 성과와 과제’ 국제학술대회에서 기조 강연도 맡았는데, 국가연구기관에서 인정한 거 아닌가.
“1977년 최연소 문화공보부 문화재전문위원에 위촉됐다. 2007년 문화재청 문화재위원회 문화재위원(사적분과, 2007~2009)으로 위촉될 때까지 만 30년을 장기 근속한 셈이다. 국가기관의 비상근 전문위원으로 최장기가 아닌가 싶다. 국립문화재연구소와 교류를 지속해 오면서 열심히 문화유산을 지키고 연구했다. 2007년 6월 자비로 ‘풍납토성 내 백제왕궁 유적 발견 10주년 국제학술 세미나’를 서울프레스센터에서 열었다. 원래 서울역사박물관에서 개최하려 했다. 풍납동 주민 100여 명이 세미나 장소인 서울역사박물관에 몰려와 방해해 세미나를 시작도 못 하고 광화문 일대까지 저지하는 바람에 바꾼 것이다. 그 뒤에도 여러 차례 자비로 학술대회를 열었다. 국가연구기관에서 이렇게까지 열성적으로 풍납토성을 연구하고 결과물을 내는 모습을 보고 초대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문제는 최근 들어 탄원서에 제기한 비문화적인 일들이 계속 일어나는 것이다.”
- ‘3475m나 3.5㎞’ 실측치가 오래 공인된 거니, 일일이 출처를 안 밝힐 수도 있지 않나. 10여 분짜리 동영상인데.
“일반이 남의 것을 무단으로 게재하면 질타하지 않나. 국가연구기관이 일반 국민의 노고나 연구 성과를 무시하고 폄훼하고, 무단 이용하고 자기들이 시행한 것만 내세우고 홍보하는 건 큰 문제다. 그리고 이번만이 아니다. 동영상에도 참여한 A교수는 자기 논문과 국립대학출판부에서 낸 책에 내 실측치를 그대로 적었다. 1997년 1월 4일 유구와 유물들을 발견한 사실은 큰 사건이다. 이 사실을 자기 책 곳곳에 전개하면서도 주석이나 참고문헌 어디에도 전거를 밝히지 않았다. ‘풍납토성이 위치한 일대는 지대가 너무 낮고, 또 강에 인접해 있어 도성으로는 부적당하다’고 주장했는데도, 풍납토성 왕성을 전제로 하고 진행되는 발굴 동영상에 버젓이 나온다. 다른 등장인물 대부분이 A교수와 같은 특정 대학 학과 사람들이다. 탄원서에 ‘편파적인 행태’라고 쓴 이유도 여기 있다.”
- 탄원서까지 낼 문제인가.
“문화재청이 국가 로고(태극기 음양문) 달고 지금 세상에 내놨잖아. 자연제방 설 같은 왜곡이 어디 있나. 게다가 모식도도 인터넷에서 캡처해서, 캡션을 붙인 거다. 국가가 왜 그래야 하냔 말이다. 국가기관이 진실과 팩트를 갖고 장난쳐도 되나. 특정 대학 출신 5명을 다 출연시킨 동영상을 통해 왜곡된 말(자연제방)을 안방에 알리나. ‘실사구시’가 고고학의 정의고, 역사학의 정의이기 때문에 탄원서를 냈다.”
이형구는 중국의 <대당신서(大唐新書)>에 나오는 고사 ‘활박생탄(活剝生呑)’을 인용했다. 그는 “‘이는 산 채로 껍질을 베기고, 산 채로 삼킨다’는 뜻이다. 남의 것을 그대로 이용하여 조금도 독창성이 없이 자기 것으로 삼으려고 비유해 이르는 말인데, 무단 전재가 딱 그렇다”고 말했다. 인터뷰 중 그는 근거 없이 말하지 않았다. ‘무단 전재’된 다른 책 등 여러 자료를 들고나와 한 장 한 장 보여주며 설명했다. 그러고 보니 그가 문화재청에 제출한 12쪽 짜리 탄원서엔 주장의 근거 등을 밝힌 44개의 참고 각주가 달렸다.
이형구는 몸이 아프다. 8호선 강동구청역에서 만나 현대리버빌 아파트 맞은편 토성 간이벤치까지 800여m를 걸었다. 힘에 부쳐 보였다. 다리도 불편했다. 힘겹게 걷는 걸 보고서야 벤치에 앉자고 했다. 벤치에서 인터뷰를 이어갔다. 바로 1997년 1월 4일 가리개와 차단막을 뚫고 들어간 현대아파트 터파키 공사 현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내가 여기에서 유구와 유물을 처음 발견하고, 발굴을 주장하기 전에 미성맨션이 먼저 완공돼 버렸다. 현대리버빌도 내가 발굴을 주장하며 개발 반대에 들어갔을 때, 이미 울타리치고 펜스치고 이미 상당한 양의 유물을 내다 버린 상태였다. 이 단지 전부가 유적인데….”
공사 중지 뒤 발굴에 들어갔다. “당시 4m 정도 아래까지 터파기했는데, 기와와 전돌, 토기 등 수천 점이 정신 차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나왔다. 백제인 삶의 흔적들을 확인하곤 희열을 느꼈다”고 말했다. 곧 발굴이 중지되고 공사가 재개됐다. 재산 피해를 우려한 주민들 민원을 당국이 받아들인 것이다. 이형구는 “대략 보상비로 2000억 원을 줘야 한다고 그랬다. 1997년 2000억 원이면, 지금 조 단위 돈이다.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이 당시 보상을 하지 않았다. 천추의 한이다. ‘보상하자’는 내 말을 안 들은 것”이라고 말했다.
“내가 한 건 행정적 고발이라기보단, 학문적·학술적 고발이었다. 정부에서 보기에 기분 나빴다. ‘이형구가 어떤 XX냐’고 이런 소리도 전해 들었다. 문화재 관리국도 당시 발굴을 반대했다. 조금만 더 신경을 썼으면, 현대리버빌이 지금 들어설 일이 없었다.”
- 풍납토성은 사적이었는데도, 왜 그리 개발이 진행됐나.
“1964년 서울대학교 고고인류학과(김원룡 교수)가 풍납토성 북쪽 일부를 시굴했다. 백제 유물이 출토되었는데도 유적 보존 조치나 사적 지정이 되지 않았다. 그 뒤로 서울시 도시개발이 시작됐다. 1997년 왕궁유적을 발견했을 때는 1만2000세대 5만명 주민이 살고 있었다.”
- 1996년 실측을 한 이유는.
“1963년 풍납토성을 사적(11호)으로 지정해놓고 30여 년이 지났는데, 둘레 같은 재원이 아무것도 안 나왔다. 정부도, 시청도, 대학도 하지 않았다. 성곽은 규모를 먼저 알아야 한다. 백제문화개발연구원에 조사비를 신청했다. 1996년 후반기부터 1997년 전반기에 현황조사와 정밀 측량을 했다. 성벽 규모, 입지 요건, 축조 방법을 보니 왕성이 틀림없었다. 인공 축조한 것이다. 그때 특정 대학 출신 사람들이 자꾸 인공 축조성이 아니라고 했다. 지금도 자연제방이라고 하지 않나. ‘몽촌토성 왕성’으로 논문을 쓰고 학위를 받아서 저런다. 그걸 포기 못하는 것이다. 몽촌토성이 왕성이고, 풍납토성은 거주성이라고 지금도 얘기한다.”
인터뷰 중 자꾸 자연제방 설과 몽촌토성 왕성 설에 관한 이야기로 돌아갔다. 여러 인물 중 A교수에 대한 분노가 깊어 보였다. 이형구는 “2003년 5월 경향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난 기사에서 조롱하는 거야”라고 말했다. 당시 기사는 이렇다. “2001년 어느 날이었다. 기자가 어느 고고학자를 취재하다가 ‘이형구 교수는 이렇게 생각하던데…’ 하고 묻자 그 교수는 한마디 툭 던졌다. ‘이형구 교수가 누구죠?’ 기자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2003년 5월 26일 경향신문 ‘[한국사 미스터리]한성백제 500년 역사 찾아낸 이형구’ 중)
이형구는 따돌림과 무시, 경멸당한 상처를 지금도 떨쳐내지 못하는 듯했다. ‘능멸’이라는 표현도 여러 번 썼다. 그는 풍납토성을 세상을 알린 자부심으로 ‘능멸’을 견뎌내는 듯했다. 그는 “폼페이는 화산이 덮었는데, 풍납토성은 콘크리트가 덮었다. 우리가 여기서 찾아낸 게 더 대단하다”고 말했다. “일생을 살면서 이런 업적을 낼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어요. 모든 걸 바쳤어요. 40년 동안 조사하면서 1년에 지금 화폐가치로 1억원 꼴로 들어갔어요.”
애초 ‘동영상은 무시하고 넘겨도 될 법한데, 왜 이렇게 집착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풍납토성 등 한성백제 연구에 얽힌 이형구의 개인사를 들으면, 그의 분노는 이해 못 할 일도 아니다. 옛 이야기를 물었다.
- 언제 풍납토성에 관심을 가졌나.
“1963년, 대학 2학년 때 스승 최순우 선생(전 국립중앙박물관장)과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인 김영상 선생을 따라 풍납토성 일대를 답사했다. 그해 사적 제11호로 지정했다. 당시는 최 선생도 왕성인지는 몰랐다. 그때 남한산성까지 다 답사했다. 석촌동은 고등학교 때 소풍 다니던 길이다. 그때는 잘 모르고 살았지. 광나루에서 미역감고, 풍납토성에 와 성벽에다 옷을 말렸다. 그러고 전철 타러 뚝섬에 갔다.”
이형구는 “먼저 석촌동 고분 이야기부터 해야 한다”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1981년 연세대 국학연구원에서 ‘고구려의 향당(享堂)제도 연구’를 발표했다. 이듬해 ‘동방학지’ 32집에도 실었다. 중국 주(周)나라는 능묘의 전면에 헌전(獻殿)이라고도 하는 향전(享殿)을 둔다. 유교적인 고려나 조선 때 왕릉은 능묘 앞에 ‘정자각(丁字閣)’이라 하는 제실(祭室)을 설치했다. 동이족이 세운 중국 은나라나 춘추전국시대의 선우중산국의 ‘릉묘’는 능묘 위에 제실 이른바 향당을 뒀다. 고구려 사례를 보면, 장군총이나 태왕릉 같은 데서 기와가 나온다. 백제 석촌동 고분에서도 기와가 나왔다. 이런 걸 비교 조사하러 1981년 10월 귀국하자마자 석촌동 고분을 찾아갔다. 대형고분(제3호분)이 서울시 도로 개설 때문에 파괴된 걸 목격했다. 3분의 1가량을 잘라 도로를 만들었다. 깜짝 놀랐다. 이대로 둬선 안 되겠다, 반듯이 보존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당시 나 혼자 힘으로 안 되고, 학회에서도 잘 안 받아주니까, 잘 아는 언론인들을 대동했다. 보도 내용에 ‘이형구가 조사한다는 말은 빼달라’고 했다. 문제 제기하려면 그래야 했다. 그해 5월 27일 당일 KBS TV 9시 뉴스에 백제 왕릉급의 고분이 파괴되는 실상이 세상에 알려지고, 다음날 조간 경향신문에도 났다.”
1983년 5월28일자 경향신문 제목은 ‘백제 고분 크게 훼손-서울 석촌동 도로공사로 기단 잘려-묘역엔 무허건물 10여 채’다. “사적 243호인 백제 초기의 피라미드형 왕릉이 훼손되고 있다”로 시작한다. ‘서울 강동구 석촌동 77일대에 있는 4기의 고분 중 제3호분은 서울시가 올해 들어 도로 확장공사를 하면서 기단 부분의 폭 10여 m를 파괴했다’ ‘보호 철책이 부서져 있고 봉분 윗부분은 완전히 헐려 나갔으며, 현재 흔적만 남아있는 자리에도 집을 짓거나 밭을 일구고 있는 실정’이라고 썼다. 다른 여러 신문사가 이어받았다. 조선일보가 29일자에 ‘석촌동 공사 중단’이라는 제목의 단신 속보를 내보냈다.
이야기는 다시 석촌동 고분으로 돌아갔다.
“언론보도가 나오니 당시 문화공보부(현 문화체육관광부) 허문도 차관이 ‘부른다’는 연락이 왔다. 어느 젊은 연구자가 자꾸 (도시 개발을) 훼방 놓으니까 누구냐고 수소문했겠지. 당시 내가 일하던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은 청와대 소속이었다. 국가에서 녹을 먹는 연구자가 그러니까, 주의를 주려나 했다. 허문도랑 맞짱을 떠야겠다고 각오하고 부랴부랴 갔다. 허문도를 조금은 알았다. 조선일보 주일 특파원 할 때 ‘임나일본부’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 뒤 사회부장인가 하다가 5공화국에 들어갔다. 만나자마자 강남 지구 석촌동 백제 유적이 말살되면 임나일본부는 영원히 반박할 수 없다, 석촌동 백제 유적이 살아야 임나일본부설을 저지하고, 사실이 아니라는 걸 주장할 수 있다고 했다. 1분도 안 되서 내 말을 저지하더니 ‘네 알았습니다. 뭘 도와드릴까요’ 하더라. 지금까지 언론이 도와줬는데, 세미나 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했다. 그 길로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원장(류승국)한테 전화해 내(이형구)가 원하는 대로 도와주라고 했다.”
- 임나일본부설을 반박할 수 없다는 게 무슨 이야기인가.
“백제 역사 678년 중 한성백제가 493년 근 500년이다. 부여와 공주는 합쳐도 185년이다. 하남위례성을 3세기 말에 쌓았다는 주장은 역사 왜곡이다. 3세기 말 백제 건국은 일본 주장이다. 그거야말로 식민사관이다. <삼국사기> ‘백제 본기’는 건국을 기원전 18년으로, 기원 전후 절대왕권을 갖춘 것으로 기록한다. 이 기록을 허구라고 비판하며 백제의 역사를 3세기 중반 이후부터 인정하는 이병도 주장을 따르는 문제와도 이어진다. 이병도 설을 따르면, 연인원 수십만 명을 동원한 풍납토성 토목 공사를 설명할 수 없다. 1999년 국립문화재연구소가 풍납토성 발굴 유물을 탄소 방사성연대 측정을 했는데, 토성의 중심 연대는 기원전 1세기∼서기 1세기였다. 제일 중요한 건 백제 678년 역사의 전반기 역사를 복원하는 것이다. 경주나 공주, 부여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해서 그렇게 보존하면서 여기는 이렇게 소홀히 한다. 연구도 잘 안 하고…. 민간보다 뒤늦게 국가가 발굴하면서 왜곡된 내용을 유튜브에나 올리고….”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은 석촌동 고분 파괴를 다룬 첫 보도가 나온 한달 여 뒤인 1983년 7월 ‘한강 유역 백제전기 수도유적 보존 문제’라는 주제로 학술 연찬을 열었다. 이형구가 당시 ‘한강 유역 백제 수도 유적의 현상과 보존 문제’를 주제 발표했다. 김병모(한양대)가 ‘한강 유역 고분의 고고학적 가치’, 차용걸(충북대)이 ‘한강 유역 백제도성 유적 보존 문제’를 발표했다. 학술 연찬 참석자 일동 명의로 건의서를 작성해 청와대를 비롯해 관계 기관에 제출했다.
‘유적 분포 지역 개발 중지’ ‘원상 유지 유적은 보존’ ‘복원 가능 유적은 고증 거쳐 복원’ ‘석촌동 사방 1km 보존’, ‘석촌동 일대 재발굴 및 역사공원 지정’, ‘사적 11호 풍납토성 보존 복원 대책 강구’, ‘박물관 건립 및 사적공원 조성’, ‘방이동 고분군 공원 면적 확대’, ‘몽촌토성 원형 복원 및 토성 내 일체 시설 불허’ 등이다.
이형구는 “그 세미나가 없었다면, 지금의 한성백제가 없다. 그래서 석촌동 살고 풍납토성 살고, 몽촌토성 다 산 거다. 내년이 학술 연찬 40주년이라 행사를 하고 싶은데, 아무도 안 하려고 한다. 그것도 또 내 돈으로 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 당시 건의서 효과는 있었나.
“물론 그 파급력이 컸다. 첫째는 석촌동 사방 1㎞ 보존은 실패했지만 석촌동 고분군의 면적이 7배나 확장됐다. 도로는 지하화했다. 도로공사로 파괴된 3호분은 지상에 복원 정비했다. 그 일대를 발굴하여 오늘날 같은 사적공원이 됐다. 1985년 1월 올림픽대교가 풍납토성을 관통하도록 설계되면서 한성백제 왕성이 파괴될 뻔했다. 이 건의서가 풍납토성이 파괴되는 것을 저지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하게 된다. 문화재관리국과 서울시가 재심의를 촉발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지금처럼 아산병원 쪽으로 우회시켜 1990년에 완공된다. 1994년 9월 ‘서울 백제 수도 유적 보존회의’ 학술 세미나를 자비로 광화문 한글회관에서 개최했다. 한성백제 유적 보존 활동과 현재 문제점을 짚고, 대책 등을 논의하는 자리였다. 그때도 건의서를 청와대와 관계기관에 제출했다. 서울시도 건의서를 접수했는데, 1995년 5월 17일 송파구청장(김성순) 명의로 공문 하나가 왔다. 아산 사회복지사업재단(이사장 정주영)에서 신청한 송파구 풍납동 388번지의 현대아산병원 기숙사 건축을 허가했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이병규 아산재단 부이사장이 ‘와서 한번 의논하자고 했다. 답사 뒤 ‘발굴해야 한다, 놀이터도, 주차장도 아무것도 안 된다. 100m 떼어야 한다고 했지. (법적 규정대로 성벽 하부로부터 50m 떼어 건축) 한양대 박물관 김병모 관장이랑 합동으로 1996년 5월 오늘날 문제가 되는 풍납토성 서성벽 남측 인근 지역 발굴에 들어갔다.”
- 풍납토성은 왜 몽촌토성에 비해 보존·복원이 잘 안됐나.
“이미 5만 명이 주거하고 있었다. 1964년 10월 서울대 고고인류학과 조사단이 풍납토성 내 북쪽 지점을 시굴했다. 조사단이 백제 중요 유적을 확인하고도, 내부 유적을 보존하려는 노력을 포기하고 방치·폐기한 것이다. 그래서 도시개발로 이어졌다. 1960년대 이후 주류 학계는 몽촌토성 왕성설을 주장했다. 김원룡·최몽룡 교수 등 모두가 몽촌토성이 왕성이라고 그랬다. 2000년대 이후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부분 시굴한 200여 군데 발굴했다. 한 군데도 빠짐없이 다 백제층이 나왔다. 내가 한 삼사십 년 내다 본 거다. 하나도 틀린 게 없다. 그걸 무시하고 그러니까…. 다른 학교 사람들도 대동소이했다.”
- 왜 이렇게 풍납토성 등 한성백제에 수십 년 매달렸나.
“혼신의 힘을 다해 투신하는 건 좌우명 때문이다. ‘역사의 진리가 그곳에 있기에’다. 2017년 12월 1일 서울시 주최로 개최된 국제학술회의에서 발표한 자료 제목도 ‘풍납토성 백제 왕궁 유적 발견과 왕도 유적 보존-역사의 진리가 그곳에 있기에’다. 여생도 이 모토를 위해 소진할 것이다.”
이형구는 1966년 홍익대를 졸업했다. 육군사관학교 박물관에서 군 복무를 했다. 제대하고 잠시 사회생활을 하다가 1975년 국립대만대에 유학 갔다. 1978년 이 학교 대학원 고고인류학과 석사, 1987년 역사학과 박사 학위를 받았다.
- 왜 대만대에 갔나.
“서울대 고고학과보다 반 세기가량 앞섰다. 베이징에서 온 이제(李濟), 석장여(石璋如), 고거심(高去尋) 교수 등 세계적인 노학자들이 많다. 이분들이 날 아끼며 가르쳤다. 미국의 하버드대학 장광직(張光直) 교수도 이분들의 제자다. 우리 문화재 공부하려면, 고조선이나 고구려를 하려면 대만에 가야겠다고 했다. 당시 ‘자유중국’ 정부의 장학금 제도에 선발됐다. 대만대학 문리대학에 들어갔다. 아내는 대만대학 의과대학에 들어갔다. 약사인데, 의학대학 소속이었다”
날이 어두워졌다. 이형구는 만류에도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다음 장소로 데리고 갔다. 주민들로부터 감금 당한 컨테이너가 있던 자리다. 보존과 개발이 첨예하게 부딪힌 상징적인 공간이다. 이곳은 지금 소공원이다. ‘역사보전지구’라는 팻말이 붙었다.
“강금 당한 곳도 유적 자리야. 네 시간이나 감금됐다. 그때 귀가 먹어서 병원에 입원했어. 사람들이 몽둥이로, 컨테이너를 계속 치는 거야. 여기서 많이 맞았다. 우산으로 찌르기도 하고. 그분들은 보상받고 나갔지. 지금 여기 사시는 분들은 폭행 사건 같은 걸 잊어먹고 잘 모르고.”
- 소회는 어떤가.
“주민들이 얼마나 저를 때려죽이고 싶었겠나. 심지어 내 인형을 만들어 화형식까지 했다. 2001년 3월 21일이다. 그날을 잊을 수가 없다. 한편으로 지금은 주민들한테 미안한 마음도 든다.”
당시에도 비슷한 마음이었다. 재산권 때문에 고통받는 주민들이 마음에 걸렸다. 그는 2005년 송파신도시(현 위례신도시) 건설 계획이 나온 뒤 풍납동 주민들은 보상 차원으로 신도시에 이주하는 방안까지 제안했다. 고고학자가 주민 보상까지 고민해야 할 정도로 마음의 고통을 크게 겪은 것이다. 그가 이어 말했다.
“풍납토성 등에 돈을 많이 썼다. 나한테 재산이라곤 대만대학, 북경대학에서 공부할 때 모은 문헌과 국내에서 모은 자료뿐이다. 별로 돈 안 되겠지만 모두 귀한 자료들이다. 3만 권(건)이나 가지고 있다. 풍납토성 쪽에 도서관이나 박물관 계획이 실현되면, 기증하려 한다. 주민들을 위해서. 한성백제 역사 복원을 위해 그동안 자비로 5차례 걸쳐 학술 세미나를 열었다. 발표 자료를 모아 ‘학술논문 총서’를 만들어 당시 세미나에 참석한 분들에게 증정해 드려야 하는데, 지금 (경제 사정 등) 형편으로는 어렵게 됐다. 아쉽다.”
힘겨운 기색이 역력해 택시를 잡아주려 했는데도 서남쪽 성벽 자리의 삼표레미콘 자리까지 봐야 한다며 기자를 이끌었다. 올림픽대로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올림픽대로 계획은 원래 풍납토성을 관통하는 거였다. 동서 성벽을 각각 100m, 50m씩 자르려고 했다. 설계 변경을 촉구했는데, 언론·문화계가 호응해 줬다. 1985년 문화재위원회가 올림픽대교 풍납동 램프를 풍납토성 남벽 밖으로 이전하는 걸로 의결하고, 서울시가 재설계에 들어가 파괴를 피했다”고 말했다.
풍납토성 일대 역사에서 이형구가 끼지 않은 데가 없다. 삼표레미콘 풍납공장 부지 문제를 두고도 대전고등법원에 탄원서를 제출했다. “대전에 본청이 있다. 몇십억인지 몇백억인지 보상받아야 나간다. 늦어지긴 하는데, 이제 끝났다.” 이형구는 2008년 삼표레미콘 자리를 ‘서남문지’로 추정했다. 2017년 국립문화재연구소 발굴 때 이 부지에서 실제로 서남문지가 발굴됐다.
삼표레미콘(삼표산업 풍납공장)에서 수십 미터 떨어진 곳에서 서성벽 발굴 현장이 시작된다. 이형구가 유튜브 영상을 촬영한 지역을 가리켰다. “동영상 촬영은 여기서 한 거야. 여기에 자연제방이 있었다는 거지. 그냥 눈으로 봐요. 어떻게 이게 자연제방일 수 있어. 충적 대지지.”
발굴 현장은 펜스에 둘러쳐져 있다. 문화재청은 펜스에 설명 그림판들을 붙였다. 그중 하나엔 ‘풍납토성은 토목, 건축 기술과 대규모 노동력을 동원할 수 있는 국가의 힘을 잘 보여줘요. 건축 기술과 크기 등으로 유추해 봤을 때 연인원 138만 명이 필요했을 것으로 예상해요’라고 적었다.
김종목 기자 jo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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