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모른다는 것에서 시작하라

한겨레 2022. 5. 22. 1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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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0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 잔디마당에서 열린 제20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취임사를 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세상읽기] 김만권 | 경희대 학술연구교수·정치철학자

아테네 재판정에서 도시가 소크라테스에게 요구했다. 모순 없이 사유하고 질문하는 삶, 즉 ‘성찰하는 삶’을 그만두라고. 그러면 처벌을 면할 것이라고. 당시 아테네에 소크라테스란 존재는 참으로 골칫거리였다. 원래 아테네는 상업도시에다 민주정치가 발전한 곳이라 도시인 모두가 경제와 정치를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는 곳이었다. 게다가 당시엔 스파르타와의 패권전쟁 때문에 더욱 분주한 삶이 요구되었다. 그런데 소크라테스가 그런 분주한 삶을 멈추고 자신을 성찰하는 삶을 살라는, 반도시적인 유행을 만들고 있었다. 아테네인들의 눈에는 앞으로 이 도시를 지탱할 젊은이들이 분주히 움직이는 대신 성찰하는 삶에 몰두하는 것은 무엇보다 심각한 문제였다.

재판에서 소크라테스는 성찰하는 삶이 도시를 위협하지 않을 뿐 아니라, 우리가 제대로 된 지식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여 오히려 진정한 앎 위에 도시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 주장했다. 그 예로 소크라테스는 도시에서 최고로 추앙받는 시인, 정치가, 기술자를 만나 봤지만 그들이 정작 시가, 정치가, 기술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다고 폭로했다. 소크라테스는 또 부정확한 지식에 근거한 행동이 불의를 만든다고, 진정한 ‘앎’이 있고 그 ‘앎’과 ‘실천’이 일치하는 도시야말로 진정 정의로운 곳이라고 항변했다.

도시는 이 항변을 거부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에게 서로 다른 두 선택지가 있다고 보았다. 첫째는 도시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고, 또 하나는 도시에 끝까지 남아 성찰하는 삶을 거부하는 도시의 선택이 잘못되었음을 설득하는 것이었다. 첫번째 선택지는 불의였기에 그의 선택은 두번째였다. 후대 학자들은 앎과 실천이 일치하는, 성찰하는 삶의 가치를 말로 설득할 수 없었던 소크라테스가 목숨을 거는 행동을 통해 도시인을 설득했다고 해석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아는 것을 실천하지 않으면 모르는 것’이라는 ‘지행합일’은 이런 맥락에서 나왔으며 이는 오늘날까지 ‘삶의 방식으로서 철학’으로 ‘지성주의’의 모델이 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반지성주의가 민주주의를 위기에 빠뜨리고 있다고 했다. 이에 맞서 합리주의와 지성주의를 내세웠다. 좋은 말이다. 그런데 돌아보면 윤 대통령은 후보 시절이던 지난 1월 지지율 하락세를 겪자 일종의 반전 카드로 젠더 이슈를 건드렸다. 이를 위해 에스엔에스(SNS)에 ‘여성가족부 폐지’라는 단 일곱 글자만을 남겼다. 어떤 이유도 설명하지 않았다. 더해 경북 포항 유세에선 “우리 정부가 성인지 감수성 예산이란 걸 30조원이나 썼다고 알려져 있다”며 그중 일부만 떼어내도 북한의 핵 위협까지 안전하게 막아낼 수 있다는 발언을 했다. ‘성인지 예산’을 ‘성인지 감수성 예산’으로 착각한 것은 그렇다 치자. ‘성인지 예산’도 실제로 편성·집행하는 예산이 아니라, 국가사업 중 성평등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고 분류한 예산을 모두 합해 부르는 말이다.

취임사에서 세계시민을 호명했던 대통령은 후보 시절 페이스북에 이런 요지의 글도 올렸다. ‘국민이 잘 차려놓은 밥상에 숟가락만 얹는 외국인 건강보험 문제를 해결하겠다.’ 이 글은 “외국인들이 우리가 40년간 피땀 흘려 만들어낸 소중한 자산”인 건강보험 체계를 갉아먹고 있다는 비난을 담고 있었다. 그런데 알고 보면 2017년부터 2020년까지 4년 동안 외국인 대상 건강보험 재정수지 흑자는 1조5996억원에 이른다.

지행합일은 그냥 제쳐두자. 내가 아는 한 지성주의의 시작은 정확한 앎이다. 그 정확한 앎의 시작에는 ‘자신에게 제대로 된 지식이 없다’는 반성이 있다. 그 모름에 대한 반성이 더 정확한 지식을 찾도록 만든다. 소크라테스의 지적처럼 부정확한 지식에 근거한 실천이 불의를 만든다. 이는 명백하게 반지성의 시작이기도 하다. 후보 시절 대통령에겐 정확한 앎이 부족했다. 그래서 여성과 외국인을 혐오에 빠뜨릴 수 있는 발언을 거리낌 없이 할 수 있었다. 그런 대통령이 자신은 아무런 관계도 없었다는 듯 반지성주의를 말하고 있다. 소크라테스라면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까. ‘지성주의를 해결책으로 삼고 싶다면 자신부터 성찰하길 바란다. 무엇보다 내가 모른다는 것에서 시작하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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