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민의 탈인간] 모두의 전공필수, 교차성

한겨레 2022. 5. 22. 1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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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포르투갈 친구와 대화를 나눴다.

교차성이란 개념이 있다.

젠더, 성정체성, 인종 등에 따른 차별이 분리된 게 아니라 교차하며 일어난다는 점에 착안해 흑인 여성학자 킴벌리 크렌쇼가 처음 주창했다.

내가 생각하는 교차성의 힘은 정체성(identity)이 아니라 남의 일을 내 일처럼 동일시(identify)하는 데, 또 약자를 억압하는 힘들의 유사함에 주목해 그 본질을 드러내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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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민의 탈인간]

차별금지법제정연대가 지난 17일 국회 앞에서 지방선거 전 법 제정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김한민 | 작가·시셰퍼드 활동가

한 포르투갈 친구와 대화를 나눴다. 유럽 의회에서 일하는 진보정당 지지자로서 자국의 식민 역사와 인종차별주의에 비판적인 페미니스트 지식인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화두에 오르자, 그는 흥분한 어조로 전쟁은 러시아가 아니라 미국과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의 ‘동진’ 탓이라고 분개했다. 있을 수 있는 비판이지만 초점과 우선순위에 의문이 생겼다. 특히 러시아를 서방의 자극 때문에 ‘정당방위’를 행한 피해자로 묘사하는 대목에선 듣고만 있을 수 없었다. 반박을 해도 물러설 기미가 없는 그를 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성폭력 사건에서 여성의 행동·선택(무슨 치마를 입었건, 밤에 다녔건)이 가해자를 ‘자극’했다는 말 따윈 꺼내지도 않는 게 상식이 된 건, 당신도 동의하리라. 그런데 우크라이나의 선택(나토 가입 추진)이 러시아를 ‘자극’했기에 침공이란 폭력이 합리화된다는 논리, 약소국은 강대국을 자극하지 말고 ‘완충지’로서 잠자코 지내야 한다는 논리는 어떻게 수용하나! 물론 그는 두가지가 전혀 다르다고 하겠지만, 과연 그럴까.

교차성이란 개념이 있다. 젠더, 성정체성, 인종 등에 따른 차별이 분리된 게 아니라 교차하며 일어난다는 점에 착안해 흑인 여성학자 킴벌리 크렌쇼가 처음 주창했다. 최근엔 여러 소수자성을 단순 덧셈하는 식의 정체성 정치에 흡수됐다는 인상이다. 내가 생각하는 교차성의 힘은 정체성(identity)이 아니라 남의 일을 내 일처럼 동일시(identify)하는 데, 또 약자를 억압하는 힘들의 유사함에 주목해 그 본질을 드러내는 데 있다. 실제로 지배 세력이 작동하는 구조는 닮은 점이 많다. 가령, 여성을 차별하는 사회, 노동자를 착취하는 기업, 자연을 수탈하는 기업에는 일맥상통하는 원리가 있기에 이에 맞서는 사회 운동 연대도 가능하다. 그런 면에서 교차성은 한때 운동끼리의 상호 보완을 도우리라는 희망을 줬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갈수록 우물 안에 갇혀 자신이 비판하는 억압을 다른 방식으로 재생산하면서 자각조차 못 하는 현상이 눈에 띈다. 노동 정의를 부르짖으며 조직 내 성폭력에 쉬쉬하는 정치집단, 아시아인 폭행은 우발적 사고로 치부하는 흑인 인권 운동, 한 제국주의는 날카롭게 비판하면서 또 다른 제국의 소수민족 박해엔 너그러운 지식사회, 2주 된 태아의 생명은 끔찍이 소중해도 세계를 온전히 지각하고 고통을 느끼는 동물을 천문학적으로 살육하는 체제엔 눈도 깜짝 않는 낙태 반대 ‘생명존중’ 운동….

어차피 인간은 모순덩어리라는 뻔한 결론 대신 자문을 해보자. 더 많은 존재를 품도록 테두리를 확장하는 윤리체계는 정녕 불가능한 것일까? 아니면 특권화된 의제 외엔 “나중에!”라고 일축하는 사고에 너무 익숙해진 걸까? 후자의 대표적 결과가 15년간 표류해온 차별금지법이다. 차별금지에 반대하는 보수주의자도, 인류가 진보한다는 발전사관은 허상이라는 회의주의자도 역사의 비가역적 흐름이 존재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과거 배경에 묻혀 있던 소수자들의 전면 부상이 그중 하나다. 여성, 장애인, 노동계급, 유색인종, 성소수자, 동물 등 소수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는 경향은 막을 수 없다. 그래서 더 나은 세상을 갈망하는 노선끼리의 벽을 허물고, 공감대를 넓히며, 억압 세력의 공통성에 대항하는 교차적 상상력은 더욱 필요하다. 그렇다면 누가 교차성을 추구할 것인가? 정치적으로 완벽히 올바른, 온갖 소수자 정체성으로 ‘무장한’ 몇몇 초인? 아니다. 우리 모두 교차주의자가 되어야 한다.

그 친구와의 대화 다음날, 어느 원주민 대표의 초청 강연을 듣게 되었다. 연사의 말이 우연치곤 마치 내 고민에 대답을 하는 것만 같았다. “이 사회에선 우리 원주민뿐만 아니라 유색인종, 성소수자 등도 비슷하게 차별당합니다. 이걸 이해하는 데 전문가가 필요한 게 아닙니다. 제대로 볼 줄 알면 됩니다. 그게 뭐가 어렵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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