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희은의 어떤 날] 5월의 사람 구경, 정말 좋았다

한겨레 2022. 5. 22. 1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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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희은의 어떤 날]

이십대 청년이 먼저 읽고 그리다. 김예원

양희은 | 가수

5월에는 좀 바빴다. 여기저기 다녔다. 언젠가도 얘기했지만 열린 직업의 폐쇄성이 강한 나로서는 일 외에 외출을 스스로 금하는 편이다. 호기심 천국이었던 시절도 가고 누군가의 작업에도 기웃거려지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정신건강에도 안 좋아서 사람 만나 얘기하고 여기저기 자꾸 디밀고 다니기로 정하고 실천했다. 물론 잘 아는 이들과의 만남이지만….

거리엔 이팝나무꽃이 흐드러져 있다. 많이 눈에 띄는 걸 보니 많이 심은 것인데 예전 농사를 많이 짓던 시절에는 논밭가에 이팝나무를 심어 풍년, 풍작을 바라는 마을 사람들의 기원이 있었으리라 생각하는데 요즘엔 가로수가 많다. 특히 자유로 양옆에 많다. 어쩌다 실내 환기 겸 차창을 열면 바람 타고 확 들어오는 아까시(아카시아) 내음, 흠… 이팝에 이어 아까시 철이군!! 그 향을 맡으면 내 마음은 가회동 1번지 언덕 위 우리집으로 달려간다. 삼청공원 첫째, 둘째, 셋째 약수터까지 빨빨대며 뛰어다니던 어린 시절. 중앙고교 후문에서부터 눈에 훤하던 좁은 산길들. 비 온 후 아까시꽃 줄기에 달린 보석 같은 빗물을 털어내고 훑어먹던 아까시꽃의 기억. 미국 사는 친구는 엄마 오실 때마다 그 껌을 몇상자씩 가져달라 해서 식구가 그리울 때마다 입안 가득 넣고 씹으면 향수병이 낫는다 했다.

지난주에는 라디오 진행자 모임에서 봄소풍을 갔다. 오래전부터 인별그램으로 봐온 음식과 그릇, 나무로 만든 주방 식기들을 보며 궁금했는데 모임의 막내가 안내를 해서 따라갔다. 버스전용차로를 타고 가니 금세라 좋았고, 동네가 개발제한구역이어선지 온통 초록초록했다. 작업하는 스튜디오 분위기도 얼마나 우리 감성을 쓰담쓰담하는지. 꿈의 부엌시설에 감탄하는 중에 무슨 복으로 밥까지 대접받아 남이 차려주는 밥상에 눈물이 핑 돌 지경이었다.

그다음으로는 ‘엄마가 생각나는 음식’ 비덕살롱 5월의 식탐회 마실을 갔다. 부쩍 엄마 생각이 나는 5월에 손이 더 가도 먹는 이 편하게 가시를 다 발라낸 황태양념구이, 들통 가득 양지 넣고 끓인 미역국(주최한 분이 엄마 음식 중 가장 기억에 남는단다), 어린 날 솜씨 좋은 엄마의 특별메뉴인 멘보샤(몐바오샤), 오색겨자채 등을 물려주신 그릇에 정성껏 담은 상차림. 식탐회 주제만으로 ‘분홍 소시지에 나물 밥상?’인가 하며 찾아왔다는 얘기에 한참 웃었다. 초면인 여섯 사람이 앉아 나눈 이야기도 좋았다. 맹목적으로 아들만 찾았던 기억 속 엄마를 새롭게 느끼며, 수도 없이 받은 밥상의 순환으로 여러 사람에게 되돌려 차려주겠다는 다짐. 음식은 늘 그리움으로 엄마를 다시 만나게 한다는 얘기 듣고, 오는 길에 문득 나도 우리 윤 여사를 닮아 정성 들인 수공예품을 잘 알아보고 즐기는 눈과, 어설퍼도 맛나게 하는 솜씨를 물려받았구나 감사했다.

또 다른 밥상은 ‘도시락’이 주제였는데 정갈하고 고급스러워서 집에서 만든다면 3시간은 족히 걸리는 차림이었다. 노영희의 ‘철든부엌’에서 레시피를 나누며 한식 네다섯가지 코스의 시연을 8명의 학생이 자세히 지켜보며 질문도 하는 시간. 김치말이밥, 다시마말이밥, 케일쌈밥의 밥 양념이 다 다르고, 스틱샐러드 자르는 법, 더덕무침과 전복조림, 떡갈비구이까지 보고 나니 도시락 먹기까지 2시간이 걸렸다. 그래도 나는 집밥 위주로 부엌을 지키는(?) 주부인데. 정석대로 모든 과정과 그릇, 또 플레이팅까지 나를 위한 눈호사를 즐겼다. 한달에 한번이지만 사실 내 시간은 내 것이 아니라서 뽑히면 대기해야 하는 게 일이다. 무얼 배우려면 일정이 들쭉날쭉해서 정해진 시간을 지키지 못하고, 강의는 대체로 오전에 있어서 무얼 배우기가 쉽지 않다. 나는 매일 오전 9시5분부터 11시까지 엠비시 라디오 <여성시대> 진행을 한다. 어쩌다 티브이 출연이나 더빙 내레이션 일정이 잡히면 일이 우선이니, 다른 약속 시간을 지키지 못한다. 유감이지만 어쩔 수가 없다.

네번째 나들이는 카페 ‘책 읽는 고양이’에서의 <고양이들의 아파트> 상영회였다. 단지 내 길고양이 대피전략 성공사례를 담은 다큐영화인데 둔촌주공아파트 재건축 때 사람이 떠난 텅 빈 곳에 남겨진 250마리 길고양이 족보 만들기가 인상적이었다. 일일이 고양이 사진을 찍고 디자인 전공하신 분이 그림을 그려 얼굴의 무늬와 특징을 책으로 만들어 캣맘들과 나눈 3년간의 기록이었다. 20명이 참석했는데 역시 모르는 사람들과의 고양이 이야기가 재미났다. 어떤 아저씨는 자기는 새벽부터 일하고 너무 피곤해서 앉아 있었지만 제대로 못 봤다는 감상평도 있었다. 그분이 제일 재밌었다. 이렇듯 5월엔 여기저기 바스락대며 다녔는데 밤마실 3건, 낮마실 1건이었다. 피곤했지만 그런대로 사람 구경이 내게는 정말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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