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말고] 선거 가뭄
[서울 말고]
권영란 | 진주 <지역쓰담> 대표
날이 너무 가물어, 도시 사람들은 생소하겠지만 농촌 사람들은 하다못해 무우제라도 지내고 싶다. 저수지가 있어 논에 물 대고 모내기는 한다지만 밭농사는 애면글면해도 소용이 없다. 수확을 앞둔 골짝 감자밭이며 양파밭은 줄기가 타들어가고 있다. 평소 말수 적은 상동 양반이 마른 고랑을 보며 툭툭 뱉는다. “옛날 같으모는 죽는다고 난리가 났을끼라요. 백마산 뫼 파러 간다고 괘이 들고 벌써 몰려갔을끼요. 일사도 시상이 조용하이 이상타.”
어디 농사만 가뭄일까. 지금 경남도내 선거 분위기가 딱 이렇다. 5월19일 6·1지방선거 공식 선거운동이 시작된 가운데 난리바람이 불어야 하는데 왠지 조용타. 경남도내에서 총 23명의 무투표 당선자가 나와도 돌아서 혀를 찰 뿐이다. 도의원 선거구 6명, 기초의원 선거구 8명, 기초의원 비례대표선거구 9명이다. 정당으로 짚어보니 국민의힘이 17명이고 민주당이 6명이다. 등록하자마자 곧 당선 확정이니 인물 검증 받을 필요 없고 유권자의 선택을 호소할 필요가 없다. 유례없는 이상한 선거를 치르고 있는 셈이다. 선거가 민주주의의 꽃이라지만 지방자치 이후 여덟번째 지방선거는 참담하기 그지없다.
5월14일 후보 등록이 끝나자마자 우리 동네 선거운동은 사실상 이미 막판 분위기다. 국민의힘 공천이 확정되면서 기초자치단체장 선거는 당선 인사 올리는 모양새이고, 지역구 시의원 선거는 국민의힘에서 2인 선거구에는 2인, 3인 선거구에는 3인 후보를 꽉 채워 내놓고 술자리에서 자기들끼리 당선 순번을 정하고 있다. 진보당, 정의당 등 소수 진보정당은 3인 선거구에 후보를 내놓고 한 석이라도 따려고 고군분투 중이고, 녹색당은 경남에서 처음으로 도의원 후보를 내놓았다. 그럼에도 이들이 지방선거에서 지역 정치지형을 바꾸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여느 때보다 ‘지역정당 허용하라’는 목소리가 수면 위로 올라왔다는 점이다. 지역정당은 현행 정당법상 정당으로 등록할 수 없다. 대한민국 헌법은 제8조에서 정당 설립의 자유와 복수정당제를 보장하고 있고 정당의 목적이나 조직, 활동이 민주적 기본질서에 위배되지 않는 한 제도적으로 보장하도록 규정함으로써 대한민국이 정당민주주의 국가임을 선언하고 있다. 하지만 현행 정당법은 서울을 포함한 5개 이상 광역자치단체에 시·도당을 두고 각각 1000명 이상의 당원을 둬야 ‘정당’으로 인정한다. 지역을 지방으로 둔 중앙집권화에 근거한 법이다. 현행 정당법이 개정되지 않는 한 지방선거는 지금처럼 서울·중앙정당의 땅따먹기로 전락한다.
지방분권 시대를 내건 지 제법 되었다. 하지만 지방선거에서는 자치분권 강화, 재정자립도 강화 등의 목소리는 나오지 않는다. 지방정부가 중앙정부의 교부세와 보조금에 의존하다 보니 지역구 국회의원과 중앙정부의 눈치를 보거나 입김에 좌우되는 것 또한 현실이다. 재정자립도는 지방정부 권한 밖이라 여기니, 선거 정책과 공약이라는 게 너도나도 경쟁적으로 국·도비 끌어들여 뭘 만들고 뭘 하겠다는 얘기다. 성장과 개발을 내세워 꼬드기는 말이다.
그럼에도 오늘 동네 곳곳에 내걸린 선거 현수막이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누군가가 사회관계망서비스에 올린 글이 현수막과 겹쳐 보인다. 공식 선거운동 개시 시간을 오전 9시로 하자는 얘기였다. 매번 선거 개시가 0시를 기준으로 이뤄지면서 선거 현수막 달기 전쟁이 시작되고 이 때문에 옥외광고 노동자들이 캄캄한 길바닥에서 이리저리 매달리다 사망 또는 상해를 입는 일이 허다하다는 토로였다. 후보자 공약을 짚기보다는 머릿속으로 밤 내내 현수막을 내걸었을 노동자의 고단함을 더듬게 된다.
이번에도 선거 없이 지방만 남았다. 중앙정치에 예속된 지방의 남루함을 벗어던지려는 정당, 후보는 없다. 지방분권, 자치는 쏙 들어갔다. 민주주의 씨앗도 못 건지는 ‘선거 가뭄’이다.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 “윤 대통령, 성 불평등 질문에 7초 침묵…불안 내색” 미 WP 보도
- 0선 무명 후보와 접전…이재명 ‘티켓파워’ 시들해졌나
- 바이든, 김정은에 딱 ‘두 단어’ 전했다…“안녕” 몇초 뒤 “끝”
- ‘박지현 비토’ 2030 갑론을박
- 남북-북미관계, 2018년 ‘판문점 선언’ 이전으로 돌아가나?
- ‘테라·루나 사태’ 사기죄냐, 아니냐…형사법 쟁점 2가지
- 이재명에 ‘치킨 뼈 그릇’ 던진 60대 구속
- 일자리만 준다면…이재용·정의선 버선발로 찾은 바이든
- 오늘 청와대 가는 윤 대통령 부부…‘열린음악회’ 참석
- 대통령실 “질문은 하나만”…한·미 취재진 “더 하면 안 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