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출 구조조정'이라는 허깨비

한겨레 2022. 5. 22.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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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윤석열 대통령은 작년 2차 추경에서 F-35예산 감액을 비판했으나 올해 추경에도 F-35예산이 감액됐다. 윤석열 대통령 페이스북 갈무리

[기고] 이상민 | 나라살림연구소 수석연구위원

유령이 여의도를 배회하고 있다. ‘지출 구조조정’이라는 유령이. 국회는 지금 밤에도 환하게 불을 켜고 2차 추경을 심의하고 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논의 주제는 존재하지도 않는 지출 구조조정이라는 유령에 불과하다.

‘지출 구조조정’이 무엇일까? 국민 세금을 아끼고자 불요불급한 예산 사업 금액을 삭감하여 지출을 막는다는 의미다. 이렇게 마련한 돈으로 손실보전금 등을 마련한단다. 언뜻 생각해보면 좋아 보인다. 그러나 불요불급한 사업이라는 판단과 평가는 누가 할까? 특정 사업이 시급한지 아닌지는 서 있는 위치에 따라 달라진다. 장애인 이동권 예산이 불요불급한 예산일까? 아니면 F-35A 도입 예산이나 주택구입 융자 사업은 어떤가?

결국, 예산은 정치다. 정답이 없고 가치판단에 따라 달라진다는 의미다. 그래서 예산심의는 국민의 대표인 국회가 한다. 그리고 정치적 책임을 진다. 이것이 국회의 예산심의권이다.

그런데 정부는 이번 추경에서 ‘지출 구조조정’을 7조원이나 했다고 자랑한다. 작년 여야가 논쟁과 타협을 통해 국회를 통과한 예산을 정부가 임의대로 따르지 않아도 될까? 지난 정기국회에서 여야는 주택 구입 융자 사업에 9.5조원을 쓰기로 확정했다. F-35 성능 개량 사업에도 200억원을 쓰기로 국회 심의를 마쳤다. 그런데 이번 추경에서 정부는 주택 구입 융자 사업에 1조원을 덜 쓰겠다고 한다. 그리고 F-35 성능 개량 사업에 50억원을 덜 쓰겠다는 ‘지출 구조조정’안을 내놓았다.

국회가 심의하고 확정한 예산 지출액을 행정부가 이렇게 임의대로 덜 쓰자고 해도 될까? 국회 예산심의권을 무시하고 이미 국회에서 확정한 예산액을 다시 깎겠다고 국회에 재심의를 요구하는 것이 정상적인 정치 관행일까?

그러나 사실 걱정할 필요가 없다. 붕어빵에 붕어가 없는 것처럼, 지출 구조조정안에는 지출 구조조정 사업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럼 7조원의 감액 사업은 지출 구조조정이 아니라면 무엇일까?

첫째로 올해 지출할 돈을 내년으로 미루는 단순한 ‘지출 시기조정’이다. 이는 방사청 사업에 특히 많다. 해상작전헬기 도입 금액 526억원 삭감이나 F-35 성능 개량 사업 50억원 삭감이 그렇다. 둘째는 사정상 올해 다 쓰지 못하고 어차피 불용이 될 것 같은 사업을 이번 추경에 감액하는 사업이다. 실업급여액 3500억원 삭감 등이 그렇다. 마지막으로 융자 사업을 이차보전 사업으로 전환하는 사업이다. 쉽게 말해 시장금리가 5%라면, 1억원 융자에 이자가 1년에 500만원이다. 이를 정부가 정책금리 3%를 적용하여 300만원만 이자를 받고 1억원을 융자해주고 있다. 그런데 정부가 1억원을 융자하는 대신 이자차액인 200만원만 보전하면 어떨까? 즉, 융자 사업을 이차보전으로 전환하면, 정부 지출액은 1억원에서 200만원으로 급격하게 낮아지는 것처럼 보인다. 경제적 실질은 변하지 않는 단순한 통계 착시만 벌어진다. 결국, 이번 추경에서 지출 구조조정은 불요불급한 지출을 줄여 국민의 세금을 아끼고자 하는 의미의 ‘지출 구조조정’은 거의 포함되어 있지 않다.

이제 정리해보자. 국회 심의를 통과한 예산지출액을 행정부가 추경에서 임의대로 줄이는 지출 구조조정안은 국회의 예산심의권을 무시하는 나쁜 행동이다. 그런데 정부는 단순히 지출 시기 등을 조절하는 세출 감액경정을 지출 구조조정이라는 잘못된 개념을 통해서 홍보하고 있다. 그리고 야당인 민주당과 언론은 “왜 F-35 구매 예산 등을 줄여서 방위력을 악화시켰는지, 왜 서민들의 주택 융자 사업 예산을 줄였는지” 비판하고 있다. 그런데 실제는 방위력이 악화되지도 않고, 세금을 아끼지도 못하는 무늬만 지출 구조조정에 불과하다. 이를 지출 구조조정이라고 표현하는 정부도 문제고, 예산을 삭감했다고 비판하는 야당도 문제다.

정명론이 이래서 중요하다. 이제는 더 이상 이를 ‘지출 구조조정’이라는 잘못된 단어로 표현하지 말자. 그냥 ‘세출 감액경정’이라고 하자. 올해 지출할 돈을 내년에 지출하거나, 결산에 인식할 불용액을 추경에 미리 인식하는 것은 세출 효율화 측면에서는 필요한 일이기는 하다. 다만 국민의 세금을 아끼고자 불요불급한 사업 금액을 줄이는 ‘지출 구조조정’은 아니다.

작년 2차 추경에도 F-35 구매 예산이 감액되었다. 민주당과 국민의힘 간사가 협의하여 F-35 구매 지급 시점을 단순히 미뤘다. 윤석열 당시 국민의힘 예비후보는 이를 간첩사건과 견주며 문재인 정부를 비판했다. 국민의힘을 포함한 국회가 F-35 구매 지급 시기를 미뤄놓고 왜 문재인 정부에 간첩혐의를 씌웠는지는 모르겠다. 이번 윤석열 정부의 첫 추경안에도 F-35 구매 사업이 감액되었다. F-35 구매 예산 감액은 간첩도 아니고 방위력 저하도 아니다. 단순히 지출 시기만 조절한 ‘세출 감액경정’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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