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 위해 목숨바친 내 친구..사실 난 그럴 일이 없길 바랐어"
[경향신문]
데니스 안티포우씨(33)는 촉망받는 한국어 교육자이자 청년사업가였고, 애국자였다. 우크라이나 출신인 그는 키이우 대학교 한국어과를 다니며 서울대학교에 교환학생으로 왔다. 공부를 마친 뒤에는 키이우대에서 한국어를 가르쳤다. 2014년 친러시아 정부에 맞선 우크라이나 민주화 시위(유로마이단 혁명)에 적극 가담한 그는 혁명 이후 참전용사들의 취업을 돕는 사업을 시작했다.
22일 오후, 줄리아 스물리악씨(34)는 서울 중구 정동 주한러시아대사관 앞에서 재한 우크라이나인 100여명이 연 전쟁 규탄 집회에 친구 데니스씨의 사진이 인쇄된 하드보드지 피켓을 들고 나왔다. 줄리아씨는 “데니스는 만날 때마다 우크라 역사와 유로마이단 이야기, 2차 대전 때 있던 독립운동 이야기를 하곤 했다”고 했다.
1989~2022. 군복을 입은 데니스씨의 사진 아래 그의 생몰년이 적혀 있다. 지난 2월말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자 데니스씨도 전장에 나섰다. 3월 전투에서 다쳐 입원했지만 퇴원하자마자 다시 전선을 찾은 그는 지난 11일(현지시각) 전사했다.
“데니스는 영웅으로서 살다 갔습니다. 진짜 애국자인 그가 기꺼이 우크라를 위해 죽으려 했다는 걸 알았지만, 저는 그의 희생이 필요할 일이 없기를 바랐습니다.” 줄리아씨는 준비한 원고를 읽다가 몇 차례 울음을 터트렸다. 키가 줄리아씨의 무릎 높이만한 줄리아씨 자녀들이 데니스씨의 사진을 만지며 손을 꼬물댔다.
이날은 러시아가 전쟁을 일으킨 지 88일째 되는 날이다. 우크라이나인들은 러시아가 대대적 침공을 시작한 지난 2월24일 이후 매주 주말마다 규탄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 집회가 열리기 1시간 전에도 전쟁에 반대하는 한국인·우크라이나인·러시아인·우즈베키스탄인 등으로 구성된 ‘보이시스 오브 코리아’가 명동 일대에서 러시아를 규탄하며 행진했다.
석 달 가까이 이어진 전투는 최근 더 격화됐다. 6차례에 걸친 평화회담은 사실상 결렬됐다. 우크라이나군은 제2의 도시로 불리는 북동부 하르키우를 수복했지만, 참호 속 러시아군과 격한 교전을 이어가고 있다. 격전지였던 남부 마리우폴에서 항전하던 우크라이나군은 러시아군에 항복했다.
우크라이나인들은 한국 사회의 지속적인 관심과 도움을 호소했다. 한국인 남편과 결혼한 아나스타샤씨(31)는 “한국은 민주주의 국가라서 국민들이 정부한테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며 “더 많이 관심을 가지고 목소리를 내주시면 한국 정부도 적극적인 도움에 나설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페이스북 페이지 ‘한국의 우크라인들(Ukrainians in Korea)’ 관리자인 크리스티나 마이단축씨(35)는 “내 어머니는 최근 폴란드로 피난했지만 남편의 부모님과 형제들은 아직 우크라에 있다”며 “한국이 우크라를 도와줬으면 좋겠고, 가능하면 우크라 사람들에게 비자를 줬으면 좋겠다. 일자리를 잡고 집을 얻으면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그가 운영하는 한국의 우크라이나인들 페이지에는 한국 이주를 문의하는 글이 눈에 띄었다. 유엔난민기구는 이번 전쟁으로 약 500만명의 난민이 우크라이나를 떠났다고 본다.
시민들도 이들의 집회에 관심을 보였다. 주말을 맞아 가족 단위로 나들이를 나선 이들이 걸음을 멈추고 회견을 지켜봤다. 회견장에서 만난 홍모씨(57)는 휴대전화를 켜고 자신의 유튜브 댓글 기록을 보여줬다. 우크라이나인들이 올린 유튜브 영상에 그는 구글 번역기로 번역한 응원 댓글을 종종 단다. 홍씨는 “다니는 교회에서도 매주 우크라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며 “우리도 침략당한 역사가 있는 만큼 마음이 쓰인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는 말을 우크라인들에게 들려주고 싶다”고 했다.
조해람 기자 lenno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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