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마진국] ‘택시운전사’ 빼고…‘5월 광주’ 그린 영화 4선

강푸른 2022. 5. 22.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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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8일, 윤석열 대통령은 5·18 유족들과 함께 광주 민주화 운동 기념식에 참석했다. 보수정당 대통령 가운데 처음으로 민주묘지 정문을 넘어 유가족들과 함께 식장에 들어섰고, 유가족 손을 잡고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불렀다. "5월 정신은 국민 통합의 주춧돌", "대한민국의 귀중한 자산"이라는 평가도 내놨다. 금남로에 공수부대가 투입됐던 1980년 5월 18일부터 전남도청이 함락됐던 5월 27일까지, 광주에선 무슨 일이 있었을까. 42년이 지난 오늘, '오월 정신'은 무엇을 말할까. 책과 기록을 훑어볼 자신이 없다면 영화도 좋은 선택이 될 수 있다. '택시운전사'와 '화려한 휴가' 등 잘 알려진 작품을 제외하고, '5월 광주'를 그린 작품 4편을 골랐다.


■ '꽃잎' (1996년, 감독 장선우)
영화 '꽃잎'은 광주를 정면으로 다룬 국내 첫 상업영화로 꼽힌다. '테크노 여전사' 이정현의 배우 데뷔작이기도 하다. 촬영 당시 고교 1학년에 불과했던 이정현은 전라 노출까지 감행하며 계엄군에 의해 어머니를 잃고 미쳐버린 소녀를 연기했다. '이 영화를 논리적 단위로 보지 않았다', '광주를 서사가 아닌 서정적 단위로 바꿔 정서적 반응을 불러일으키려 했다'던 장선우 감독의 설명대로 영화의 만듦새는 거칠고, '민족의 아픔'을 '미쳐버린 누이'로 풀어내는 접근 등 지금의 눈으로 보면 구태에 가까운 장면도 이어진다. 그러나 대규모 엑스트라를 동원해 광주 항쟁을 재현했다는 것만으로도 주목을 받던 시절, '어느 날 그녀가 당신을 쫓아오거든 (중략) 그저 잠시 관심 있게 봐주기만 하면 됩니다'라며 직접적으로 광주 민주화운동에 대한 관심을 호소했다는 데 이 영화의 의의가 있다. 한국영상자료원 홈페이지에서 무료로 볼 수 있다.


■ '박하사탕' (1999년, 감독 이창동)
"나 다시 돌아갈래!" 남자의 절규 뒤 영화의 시간은 자꾸 거꾸로 흐르고, 양파 껍질처럼 벗겨지는 주인공 영호의 과거엔 1980년 5월 광주가 있다. 섬세했던 청년이 어떻게 타락했는지 역순으로 보여주는 영화의 시선에는 잃어버린 순수에 대한 그리움 못지않게 5월 광주를 벌써 잊었느냐는 분노가 스며 있다. 첫사랑 순임의 연락을 받고 잊었던 과거를 마주한 뒤, 영호는 미친 사람이 되어 떠돈다. 그러나 20년 만에 만난 친구들은 영호가 간직한 진실에는 관심이 없고, 삼겹살을 구우며 노래방 반주를 틀어놓고 춤을 추기 바쁘다. 고문 경찰 시절 영호가 자백을 받아냈던 운동권 청년은 십여 년 뒤 고깃집에서 가족들과 식사하는 중년 남성이 되어 자신이 한 말도 기억하지 못한다. 번듯한 가구점 사장이 된 영호의 자가용과 휴대전화, 아파트 등에선 1990년대 중반 중산층이 누리던 풍요가 묻어나지만, 이는 영호가 자신의 손을 '똥과 피'(비유적 표현이 아니다)로 더럽혀 얻어낸 타협과 굴종의 대가다. '글로벌', '밀레니엄' 같은 단어가 곳곳을 도배하며 오직 새로운 세기를 열어젖힐 기대에 들떠 있던 1999년, '박하사탕'은 슬슬 구시대의 얘기가 되어가던 80년 광주를 순수의 이름으로 불러내 관객의 양심을 자극하려던 시도였다.


■ 스카우트 (2007, 감독 김현석)
제목과 카피, 포스터 어디에서도 느껴지진 않지만, '스카우트'는 광주에 대한 영화다. 임창정이 연기하는 대학교 야구부 직원 호창은 초고교급 투수 선동열을 스카우트하러 광주로 급파된다.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나기 딱 열흘 전에. 영화 속에서 하루하루가 지날 때마다 그 끝을 알고 있는 관객은 조바심이 나지만, 영화는 거의 대부분 밝고 유쾌한 톤을 유지한다. 코미디 장르를 빌려 '21세기 광주 영화'를 만든 감독의 선택에선 상반된 두 가지가 읽힌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출범을 잇달아 겪으면서 이제는 광주도 즐겁고 가벼운 방식으로 풀어낼 수 있는 소재가 되었다는 자신감, 혹은 이렇게 말랑말랑한 외피를 씌우지 않으면 아무도 주목해 주지 않을 거라는 절박함. 제작사가 어떻게든 평범한 코미디 영화로 홍보하려 애쓴 걸 보면 후자의 해석에 무게가 실린다. "왜 00은 항상 무겁고 딱딱해야 해? 좀 더 많은 사람이 편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하면 안 돼?" 2000년대 이후 학생 운동과 노조, 집회·시위 현장 등에 부과되던 이 요구는 광주를 다루려는 영화인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었다. 새로운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갈 장이 열린 동시에, 이제는 재밌으면서 흥행까지 해야 하는 숙제를 받아든 셈이다.


■ 김군 (2019년, 감독 강상우)
잠시 다른 영화 이야기를 해 보자. 2016년 개봉한 영국 영화 '나는 부정한다'는 홀로코스트 부인론자에 대한 이야기다. 이들은 가스실 잔해에서 지붕에 난 구멍이 발견됐는지, 문이 왼쪽이 달렸는지 오른쪽에 있었는지 같은 지엽적인 문제를 파고들며 나치의 유대인 학살 자체를 부정한다.
5·18 북한군 개입설을 주장하는 지만원 씨의 무기는 사진이다. 사진 속 얼굴이 닮았다며 북한군 수백 명의 정체를 밝혀냈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다큐멘터리 영화 '김군' 제작진은 지 씨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그가 지목한 사진 속 '광수 1번'의 주인공을 찾아다닌다. 생존자 오기철 씨는 그런 제작진에게 되묻는다. "우리 스스로가 이놈을 찾아다니면서 증명한다는 것도 이해가 안 돼. 똑같은 거 아닌가 그럼?"
영화 '김군'은 진위를 의심받는 처지가 된 광주민주화운동의 현재다. 광주를 받아들이지 않아도 좋으니 왜곡만 안 했으면 좋겠다는 또 다른 생존자의 인터뷰 뒤에는 곧바로 지 씨가 마이크를 잡은 집회 장면이 따라붙는다. 어느덧 중년이 된 생존자들이 모두 떠나고 나면, 광주는 이대로 잊혀지는 건 아닐까. 83년생 감독을 포함해 영화 제작진 모두가 5·18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젊은 세대였다는 사실을 기억해본다.
https://news.kbs.co.kr/special/danuri/2022/intro.html

강푸른 기자 (strongblue@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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