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B컷]檢만 들린다는 '정영학 녹취'..보름동안 개와 늑대의 시간

CBS노컷뉴스 박희원 기자 2022. 5. 22. 0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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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학 녹취파일' 증명력 논란
로비 정황 입증할 스모킹건? 재판부도, 변호인도 안 들리는데 이어폰으로는 들린다는 檢
대장동 개발사업 특혜·로비 의혹 사건과 관련해 불구속 기소된 정영학 회계사. 연합뉴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상임고문의 측근들이 대장동 개발 사업에서 김만배씨와 그 일당들의 편의를 봐줬다는 대장동 사건. 일명 '정영학 녹취파일'은 이들이 성남시에 포진해있던 이 고문의 측근들에게 로비하는 과정이 담겨 사건 초반부터 '스모킹건'으로 꼽혀왔습니다. 그런 만큼 '정영학 녹취파일'에 대한 증거조사는 1심 공판의 백미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녹취파일은 지난 2일부터 13일까지 뇌물과 배임 등의 혐의로 각각 기소된 '대장동 5인방(유동규·김만배·남욱·정영학·정민용)'에 대한 다섯번의 공판에서 재생됐습니다.

문제는 다섯번의 공판에서 재판부와 변호인 등 공판 당사자들은 물론 이를 취재하는 기자들도 녹취파일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검찰의 판단에 따라 사건과 큰 관련이 없는 부분은 1.5배속으로 재생한 탓도 있지만, 녹취파일 음질 자체가 조악했기 때문입니다. 누가 들어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녹취를 다섯번의 기일동안 들리는 척 듣고 있었던 셈. 재생을 마친 지금도 녹취 내용만으로 김만배씨 일당이 정말 이 고문의 측근들한테 뇌물을 주면서 로비를 한 것인지 확신하기란 쉽지 않아 보입니다.

이어폰으로 들어야만 이해할 수 있다?



녹음파일의 음질은 증거조사 첫날부터 문제가 됐습니다. 검찰도 이에 대해 우려라도 하듯 지난 13일 공판에서는 증거조사 시작 직전 "이어폰으로 들으면 더 잘 들린다"고 설명합니다.
2022. 5. 13 서울중앙지법 28차 공판
검사 : 019번 파일에 대한 증거조사를 시작합니다. 이 파일 녹음 일지 2021년2월18일 이고 대화자는 정영학과 김만배입니다. 피고인 유동규에게 (김만배 측이) 이익을 지급하는 대화 내용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중략) 김만배는 유동규에게 700억원을 지급하기로 했으나, 500억원을 이미 지급하였으므로 700억원에서 이 부분을 공제해야 한다는 취지로 언급합니다.

녹음파일의 음질이 상당히 좋지 않아 청취하는 데 어려움이 있을 것으로 예상하는데요. 일단 주요 대화 부분은 속기사의 속기록을 기준으로 5쪽부터 7쪽까지입니다. 파일 재생 시간을 기준으로 5분 30초부터 20분까지입니다. 이 부분을 정배속으로 진행하고 그 외 부분은 빠르게 재생하는 방법으로 하겠습니다. 
이어폰으로 들으면 더 잘 들립니다.


김만배씨와 정영학 회계사의 대화는 주로 카페에서 이뤄졌는데, 두 사람의 대화는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소리에 묻혀있습니다. 오죽하면 녹취파일 재생 중간중간 검사가 "7쪽까지 재생했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좀 더 빨리 (재생하겠다)"고 일러줍니다.

하지만 속기록을 보면서 녹취파일을 듣는 변호인들은 무슨 대화인지 식별이 불가능하다고 호소합니다. 검찰이 친절하게(?) 몇 쪽에 해당하는 대화라고 일러줬지만, 그 부분이 재생되는지조차 판단할 수 없을 만큼 음질이 나쁘다는 주장입니다.

재판부는 지난 13일 녹취파일 재생이 끝난 뒤 김만배씨와 정영학 피고인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2022. 5. 13 서울중앙지법 28차 공판
재판부 : 오늘도 정영학 증인의 선서 효력은 유지됩니다. 방금 녹음파일 잘 들으셨죠? 직접 녹음하신 건가요?

정영학 : 네, 맞습니다.

재판부 : 녹음 날짜는 2021년2월18일이고 대화자는 증인과 피고인 김만배가 맞나요?

정영학 : 네.

재판부 : 끊기거나 편집되지 않고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것을 확인했나요?

정영학 : 네.

재판부 : 김만배씨에게 묻겠습니다.녹음파일 상태가 좋지는 않은데 대화하는 사람이 피고인과 정영학이 맞나요?

김만배 : 
네, 맞습니다. 맞는데, 제가 말하는 내용 자체를 제가 못 알아듣겠습니다.

항의하는 변호인, 발끈한 검사, 체념한 재판부


스마트이미지 제공

두 피고인의 변호인들도 반발했습니다. 우리 법원이 공판중심주의를 채택하고 있는 만큼 법정에서 채택된 증거에 예민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습니다. 재판부도 이를 의식한듯 녹취록(문서)은 녹취파일에 대한 '보조 수단'으로 이해하고 있다며 변호인단을 안심시키려고 합니다.
2022. 5. 13 서울중앙지법 28차 공판
변호인 : 오늘 절차를 증거에 대한 조사과정의 일환으로, 녹취에 대한 검증으로 이해합니다. (중략) 검사가 녹음파일을 중간에 끊거나 편집의 가능성이 있는지, 또 하나는 이 녹음파일과 관련해서 검사가 증거로 제출하는 녹취록이 녹취파일의 내용과 일치하는지 여부도 검증의 대상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중략) 지난 녹취파일도 그렇고, 오늘도 이 법정에서 녹취파일이 재생됨에 따라서 들리는 진술자의 내용이 변호인 입장에선 거의 99% 이상 안 들리는 상황입니다. (중략) 검사께서는 이어폰으로 들리면 잘 들린다고 주장하시지만, 현재로선 일방적인 주장에 불과합니다.

재판부 : 변호인께서 검증을 전제로 말씀하시는데, 이 절차는 검증하는 게 아니라 증거조사입니다. (중략) 재판부도 거의 내용을 알아듣기 힘들었고, 검찰에서 제출하신 녹취록을 보면 녹음 시간 분량은 1시간 21분인데 녹취록에 작성된 페이지는 17페이지에 불과합니다. 알아듣기 어려운 부분은 다 생략된 형태를 확인했습니다. 이 부분을 변호인 의견 진술 형태로 공판 조서에 기재하겠습니다.



변호인단이 증거가 다소 검찰에 유리하게 편집된 게 아니냐는 의심하자, 검찰이 발끈하며 공방이 펼쳐지기도 했습니다.
2022. 5. 13 서울중앙지법 28차 공판
검사 : 실제로 충분히 들을 수 있고 식별할 수 있게끔 재생했다고 판단합니다.

변호인 : 녹취록을 보면서도 어느 부분이 재생되고 있는지, 한 페이지 넘어갈 때마다 찾기 힘들 정도였습니다. 재생된 것을 다 인식될 정도로 들렸다고 하면 어이가 없습니다.


검사가 이어폰으로 들어야 잘 들린다고 했던 만큼 조악한 음질에 대해선 부분적으로 인정해놓고, 변호인의 이의 제기에 충분히 들을 수 있는 정도였다고 하자 변호인단은 거친 표현까지 동원해 검찰을 압박해 들어갔습니다.

사실 '정영학 녹취파일'은 지난해 민주당 대선 경선 국면에서부터 언론의 관심을 모았습니다. 정치권에는 특정 언론이 확보했다는 소문이 돌았고, 당시 경선을 치르던 이재명 고문에게 치명타가 될 거라는 얘기도 파다했었죠.  

황진환 기자


우여곡절 끝에 공개된 '정영학 녹취파일', 들어보니 석연찮은 점이 또 있었습니다. 대화 내용을 처음부터 끝까지 녹음한 게 맞느냐는 검찰 질문에 정영학 회계사는 "맞다"고 했지만, 유동규 전 성남도시개발공사 측은 △녹음파일 중 2014년부터 2019년 사이 파일은 없는 점 △파일명에 나타난 녹음 순번이 아라비아 숫자 순서를 기준으로 중간에 일부가 빠진 점 등을 캐물었습니다.

피고인들과 달리 판사들은 대체로 녹취파일의 가치가 크지 않다고 봅니다. 조악한 음질이 대부분인 데다 일부분만 녹음돼 있어서 그 맥락을 파악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의도적으로 녹음된 경우도 허다해 그렇게 가치있는 증거로 보기는 어렵다는 거죠.

'정영학 녹취파일'도 이같은 판사들의 경험칙에 대체로 부합하는 듯 합니다. 정영학 회계사가 자신에게 불리한 내용은 뺀 채 증거로 제출했을 가능성까지 배제할 수 없는 데다 검찰은 피고인의 혐의를 입증할 수 있는 부분만 임의적으로 정배속으로 틀었으니까요.

정영학 녹취록…개와 늑대 구분할 수 있을까


검찰의 대장동 수사팀은 수사과정에서 수많은 난관에 직면해야 했습니다. 성남시청에 대한 이해할 수 없는 늑장 압수수색 등으로 어려움을 자초한 측면도 큽니다. 실제로 현재 진행되고 있는 공판에서도 명쾌한 물증이 많지 않아 당장 구속 기소한 유동규 ·김만배·남욱 등의 혐의 입증에도 힘겨워 보입니다. 검찰에서는 이런 힘든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정영학 녹취록에 많은 기대를 걸고 있는 눈칩니다. 하지만 녹취 상태가 논란이 되면서 오히려 녹취록 공개가 악수가 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마저 나옵니다.

프랑스 격언에 해가 저무는 시간대를 '개와 늑대의 시간'이라 표현하기도 합니다. 황혼이 깃드는 시간대에 시야가 불분명해져서 멀리 있는 개와 늑대를 구분하기 힘들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보름동안 재판부와 검찰, 변호인, 그리고 취재진은 녹취록 내용이 '개'인지 '늑대'인지 구분하기 위해 모든 신경을 녹음파일에 곤두세워야만 했습니다. 검찰은 분명하다는데 다른이들에게는 여전히 불분명한 이 묘한 상황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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