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무기도 없는 '전범국' 출신 독일이 '민주주의'의 희망인 이유

2022. 5. 21. 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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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books] <독일은 왜 잘하는가-성숙하고 부강한 나라의 비밀>
[이재호 기자(jh1128@pressian.com)]
"특히 '고상한 척 하는'(Snobbish) 영국인들이 저를 좋은 배우로 인정해줬다는 점에 대해 매우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배우 윤여정이 지난해 4월 영화 <미나리>로 영국 아카데미상 시상식 (BAFTA)에서 여우조연상을 받은 뒤 했던 수상소감의 일부다. 영국인들을 '고상한 척'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한 이날 그의 수상소감에 대해 영국의 매체들은 불쾌한 감정을 표하기보다는 재치있고 유머러스했다고 평가했다.

농담 반, 진담 반 이었겠지만 영국인들이 '고상한 척 하고, '자존심도 세다'는 것은 영국인들 스스로 인정할 정도로 일정 부분 통용되는 말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런 성향을 지닌 영국인이 2차 세계대전의 주범이었고 수도 런던을 공습했었던 독일을 칭찬한다면 이건 진심일까, 아니면 비꼬는 것일까?

영국의 저명한 방송인인 존 캠프너는 <독일은 왜 잘하는가-성숙하고 부강한 나라의 비밀>(박세연 옮김, 열린책들 펴냄) 이라는 다소 직접적인 제목의 책을 통해 오늘날 독일을 칭찬하는 것을 넘어 영국,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유민주주의 세계의 새로운 리더가 될 자격이 충분하다고 주장했다.

▲ <독일은 왜 잘하는가-성숙하고 부강한 나라의 비밀>, 존 캠프셔 지음, 박세연 옮김. ⓒ열린책들
핵무기 하나 없는 세계 2차대전의 전범국인 독일이 자유민주주의 진영의 리더가 된다는 것이 가능할까? 실제 실현 여부를 떠나 그가 이러한 평가를 내린 가장 큰 이유는 독일이 가지고 있는 '가치', 그리고 이를 지켜가겠다는 공동체 구성원들의 의지 때문이다. 저자는 라이프치히에서 만났던 한 펑크족의 이야기를 통해 독일이라는 국가가 무엇에 뿌리를 두고 있는지 그 일면을 보여준다.
"그 펑크족은 모두가 제일 두려워하는 것은 '법으로부터 자유로운 영역'이라고 말했다. 그 영역이란 강자가 약자를 착취하는 공간을 의미한다. (중략) 그는 이렇게 주장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국가의 역할은 약자가 강자에 맞설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부자와 가난한 사람 사이의 균형을 새롭게 맞추는 것이어야 한다고"

독일 국민들이 가지고 있는 이러한 가치는 1949년 임시헌법으로 만들어진 이른바 '기본법'에 서부터 출발했다. 법에 근거한 국가 가치 정립은 나치 정권이 일으켰던 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본받을 만한 역사가 없는 독일에서 국민들이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는 것이 저자의 설명이다.
"자신들의 군사적 상징물을 갖고 있던 러시아나 프랑스와는 달리, 건국의 아버지 이야기를 갖고 있는 미국 혹은 자국의 역사를 가르치는 애국가와 전쟁에 집착한 '노인부대'를 운용하는 영국과는 달리 독일은 의지할 곳이 아무 데도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독일은 절차에 대해, 즉 아무렇게나 하는 것이 아니라 똑바로 하는 것에 대해 그토록 열정적인 관심을 기울이게 된 것이다"

독일이 전후 나치의 역사에 대해 통렬한 반성을 하는 것도 이러한 연장선상으로 이해된다. 저자에 따르면 독일도 세계대전 종료 직후에는 속죄의식을 찾아보기 힘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1968년 학생 운동을 거치면서 기성세대에 대한 저항의 흐름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이 때문에 반성의 기류가 강해졌다는 것이 저자의 분석이다.

이러한 독일의 성향은 과거사 문제에만 그치지 않았다. 독일은 경제 부문에서도 저변에 있는 가치를 공동체 구성원들이 공유하고 있었다.

"독일 경제와 관련해서 깊은 영감을 주는 대목은 독일이 추구했던 정책이 아니라, 그 경제가 기반을 두고 있는 가치의 공유다. 독일은 자유시장경제에 집중하면서도 체계적이고 책임을 지는 자본주의를 추구하고 있다. 장기주의를 격려하고, 작업장에서 분쟁보다 협력을 강조하고, 근로자의 기술과 생산성에 투자하는 기업에 혜택을 제공한다.

독일은 앵글로색슨 세상에서 유행이 되기 오래 전부터 경제 성장과 사회적 포용을 동시에 추구했다. 독일은 규제받지 않는 자유 시장과 대처 정책의 과잉에 의존하지 않고서 부를 창출했다. 지역적 불균형이 해소되지 않았을 때 다른 나라들이 달성하지 못한 많은 목표를 오래전에 실현했다. 또 통일 이후로 최고 수준의 고용률과 급증하는 세수와 더불어 반세기에 걸쳐 가장 긴 성장을 이어왔다"

독일의 기업 지배 구조에서도 공동체에 대한 깊은 고민이 묻어 나온다. 책에서 저자는 "기업 지배 구조의 핵심에는 공동 결정의 관행이 있다. 이는 1976년 법으로 제정됐다. 이에 따르면 대기업은 감사 위원회 의석 중 절반을 노동조합이 선출한 근로자 대표에게 주어야 한다. 중소기업의 경우 그 비중은 3분의 1이다"라고 소개했다.

물론 독일 경제를 긍정적으로만 전망할 수는 없다. 저자에 따르면 독일은 양자 컴퓨터와 인공지능 분야에서 발전 속도가 상당히 느리며 금융 산업에서도 일정 부분 정리해야 할 필요가 있는 측면이 있다. 여기에 미중 간 무역 전쟁이라는 험난한 파도를 헤쳐 나가야 한다.

그럼에도 저자는 독일이 내재적 탄력성을 바탕으로 힘든 시기를 이겨낼 수 있다고 예측했다. 독일의 연구·개발에 대한 지출은 비교 가능한 다른 국가보다 수십 년 동안 훨씬 더 높았고, 독일인들의 "지나치게 복잡한 경향" 때문에 변화가 느리기도 하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산업 기반과 고숙련 노동력, 현금 보유고 등을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공동체의 가치를 확립하고, 협의와 절차를 중요시하며 그에 따라 사회를 움직여나가는 데에는 독일의 권력 배분 구조도 한 몫을 담당했다. 저자도 "전후 서독의 정치 시스템 구축은 자유민주주의가 거둔 위대한 승리 중 하나"라면서 "그 과정에서 영국도 나름 기여했다. 독일 헌법은 대단히 성공적인 결과물로서 독일인들은 이를 대단히 자랑스러워한다"고 평가했다.

저자는 그러면서 "앵글로색슨 세상이 시대에 뒤쳐진 것으로 치부했던 가치인 가족과 책임, 국가의 역할을 21세기 세 번째 10년이 시작되는 (지금) 시점에 독일에서 굳이 새롭게 불러일으킬 필요는 없었다. 독일에서는 그러한 가치가 사라진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당선 이후 민주주의의 위기라는 진단이 나오는 가운데 독일은 공동체를 지키면서도 더 나은 민주주의의 대안을 보여줄 수 있을까? 동북아시아에서 사실상 유일한 민주주의 국가인 한국에게 독일의 경험과 이후의 행보는 단순한 '남의 나라 사정'이 아닌, 우리가 마주하게 될 현실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관심을 두고 지켜볼 필요가 있다.

[이재호 기자(jh1128@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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