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제 MBC 사장이 "CJ 회장과 만나고 싶다"고 한 이유
“제가 방송협회장이기 때문에 이 자리에서 CJ 이재현 회장님께 건의 드립니다. 마음을 열어주시고 저와 만날 기회를 만들어주셨으면 합니다. 여기 계신 기자분들이 꼭 기사로 써주십시오.”
박성제 MBC 사장이 이재현 CJ그룹 회장에게 러브콜을 보냈다. 박성제 사장은 20일 한국언론학회 주최로 열린 방송사 사장단 라운드테이블에서 지상파가 만든 OTT 웨이브(wavve)와 CJ의 OTT 티빙(tving)이 합쳐져야 한다며 이같이 말했다. “대한민국 콘텐츠 업계의 위기를 해결하려면 토종 OTT가 힘을 합쳐야 한다”는 취지다. 지상파 방송사업자 단체인 한국방송협회 회장을 맡고 있기도 한 박 사장은 “현재 우리나라 한류 콘텐츠, K-콘텐츠를 얘기하는데, 그 열쇠는 토종 OTT가 힘을 합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면서 “정부가 이끌고 마중물을 만들어주고 관련된 이해당사자들이 협의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밝혔다.
이날 라운드테이블은 언론학회 봄철 정기 학술대회 한 세션으로 마련된 자리였다. ‘글로벌 경쟁시대: 방송의 위기와 도전’이란 주제 아래 김의철 KBS 사장, 박성제 MBC 사장, 이강택 TBS 대표, 이규연 JTBC 대표 등 공영미디어와 종합편성채널을 대표하는 사장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이례적인 자리인 만큼 행사가 열린 공주대학교 인문사회과학대학관 124호 강의실에는 언론학 연구자, 방송계 관계자, 방송통신위원회 고위 간부 등 많은 청중이 참석해 보조 좌석까지 가득 찼다.
회당 제작비 100억 시대인데 광고는 완판해도 5~6억 수입
방송사 사장들은 글로벌 OTT 등이 국내 시장을 잠식하면서 콘텐츠 제작, 유통, 소비까지 미디어 지형이 전례 없는 변화와 위기를 맞이했다고 진단했다. 김의철 사장은 “글로벌 OTT 등 대규모 자본에 한국은 제작 시장, 가입자 시장에서 가장 뜨거운 각축장의 하나가 됐다. 이는 양날의 검으로 작용하고 있는데, 우리 콘텐츠 제작의 기회가 확대되고, 세계 시장에 콘텐츠를 선보일 판로를 개척하는 측면이 있는 반면, 광고 시장 중심으로 발전해 온 방송사와 방송사가 참여하는 토종 OTT에겐 극복하기 어려운 타격이 되기도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방송사 관점에서 더욱 우려되는 위기는 글로벌 OTT로 인해 콘텐츠 제작비가 무한대로 상승하고 있다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넷플릭스가 제작한 ‘오징어게임’(9부작)은 총 제작비가 250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고, 애플TV의 오리지널 드라마 ‘파친코’(8부작)엔 무려 1000억원이 투입됐다. 회당 제작비가 100억원을 넘어선 것이다. 김의철 사장은 “자국 내 광고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국내 방송사로선 점점 상승하는 제작비를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면서 “통상적으로 방송을 제작해서 IP(지적재산)를 확보해 2차 유통을 통해 콘텐츠 수익을 내던 구조가 깨지고 있다”고 말했다.
박성제 사장도 “글로벌기업이 주도하는 콘텐츠 제작 시스템에 비해서 재원과 제작비를 조달하는 게 힘들어졌다”며 “구체적으로 최근 주연 배우 출연료는 2~3억원 정도로 굳어졌다. 연출료도 편당 3000만원은 싼 편이고 5000만원, 1억원까지도 한다”고 설명했다. 제작비의 절반이 연출료, 작가료, 출연료 등으로 나가는 셈이다.
제작비가 폭등했다면 그만큼 경쟁력 있는 콘텐츠를 만들어 광고를 많이 팔면 되지 않을까? 그러나 “드라마 한 편 광고를 풀로 받아도 5~6억원”이라고 박 사장은 설명했다. 결국, 높아진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OTT에 판매되는 게 관건이 됐다. 박 사장은 “모든 고민은 같다. 손실이 덜 나게 하는 게 과제다. 한류 콘텐츠의 핵심인 드라마를 만드는 사람들의 고민이 이렇다. 과거엔 유통을 통해 (수익을) 보충했는데 이젠 유통을 OTT가 독점하고 글로벌로 넘어가다 보니 지상파 방송을 중심으로 드라마를 만드는 사람에게는 해방구가 아닌 거다”라고 했다.
박 사장은 이를 “자본의 불균형”으로 설명했다. 여기에 “규제의 불균형”과 “정보의 불균형”이 더해진다. 지상파는 내용 규제와 광고 규제는 물론, “시청자의 정서상 규제” 등 많은 규제를 받고 있고, 방송 플랫폼을 장악한 IPTV와 케이블TV가 시청 정보까지 독점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이런 “제도의 불균형”에 ‘신뢰의 위기’ 또한 상수처럼 존재한다. 김의철 사장은 “미디어 수용자의 양극화 속에서 어떻게 신뢰를 확보하느냐가 중요한 과제”라고 말했다.
이규연 JTBC 대표도 “우리 사회가 서초동과 광화문 집회로 상징되는 극심한 양극화를 겪었고, 지금도 그게 해결이 안 되고 비슷하게 반복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양극화 과정에서 JTBC도 고통을 많이 당했다”면서 “어떻게 하면 탈출구나 개선 방향을 찾아낼 수 있는지 그 길을 찾고 있는 과정이고, 한국을 포함한 세계적인 양극화 속에서 언론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 늘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방송사’ 넘어 디지털·미디어 기업으로
방송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방송은 방송사란 정체성을 넘어서야 했다. 박성제 사장이 취임 후 직원들에게 가장 많이 강조한 건 “MBC는 지상파 방송사가 아니다. 지상파 플랫폼을 가지고 있는 미디어 콘텐츠 그룹이다”라는 것이었다. KBS 역시 공영방송을 넘어 공영미디어를 표방한다.
개국 12년차 ‘신생 방송’이지만 역시 같은 올드미디어인 JTBC가 최근 디지털 전환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다. 이규연 대표는 “지난해 언론 수용자 조사에서 가장 심각하게 본 데이터는 연령대별 TV 뉴스 이용률이었다. 60대 이상에선 TV를 꼽은 응답자가 90%였는데 20대는 9%였다. 어느 조사를 보니 10대는 4%였다”고 전했다. “TV 대신 네이버와 유튜브로 보는 게 현실인데 우리는 TV 광고를 주 수입원으로 해왔다”는 것이다. 이 대표는 “빨리 디지털로 돌리지 않으면 생존 자체가 불가능하다”면서 “디지털 전환은 곧 데이터 경영이다. 데이터 경영을 할 수 있게 회사를 바꾸느냐가 방송사 생존의 문제와 연결돼 있다”고 말했다.
KBS도 최근 데이터정책부를 신설하는 등 데이터 경영에 비중을 두고 추진하고 있다. 김의철 사장은 “구성원들의 감과 경험에 의존하는 의사 결정 방식이 더는 통하기 어렵다”면서 “회사 내부에 산재해 있던 각종 데이터를 모으고 필요한 데이터를 만드는 데 이미 착수했다. 데이터 설계를 잘 해서 실질적인 제도적 변화를 이끌고 정책 결정에 이르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미래 경쟁력을 위한 초석을 놓겠다는 차원”이라고 설명했다.
규제 완화, 공영방송 법·제도 정비 한 목소리
하지만 개별 방송사 단위의 노력만으로는 현 위기 상황을 타개할 수 없다고도 이들은 한목소리를 냈다. 박성제 사장이 지상파/유료방송, 공영방송/민영방송 구분 없이 글로벌 OTT의 경쟁 상대로서 ‘토종 OTT’의 힘을 모아야 한다고 주장한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규제 완화, 방송 관련 법률·제도 정비에 대한 요구도 많았다. 규제 중에서도 내용 규제에 해당하는 방송 심의에 대한 성토의 목소리가 높았다. 이강택 TBS 대표는 “우리나라의 과잉 심의체제가 검열성 심의체제와 결합해서 많이 증폭된다”면서 “심의체제를 돌아볼 때가 됐다. 이런 심의체제를 기반으로 해서 정치가 방송과 언론에 작동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함께 힘을 합쳐 해결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규연 대표도 “심의가 과해서 너무 힘들고 불편하다. 자율규제로 갈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 대표는 또한 “저널리즘의 가치와 신뢰를 잃지 않는 조건에서 공공섹터와 민영섹터의 역할 분담도 필요하다. 좀 더 혁신적이고 실험적으로 우리가 보도도 하고 경영도 할 수 있는 정책이 필요하다”면서 “우선 크로스미디어렙을 풀어줬으면 한다. 지금 시청자들은 TV와 디지털 이용을 구분하지 않는데 미디어렙은 TV만 광고하게 돼 있어 합리적으로 안 맞는 대응이다. 지혜를 모아달라”고 했다.
김의철 사장은 공영방송 관련 제도와 법률 정비가 시급하다고 주장했다. 김 사장은 “수십 년 동안 공영방송 관련한 논의는 KBS 사장을 어떻게 뽑고 이사를 어떻게 뽑는지에만 머물러 있다”면서 “거버넌스도 중요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딱 세 가지, 공영방송의 역할과 책임이 무엇인지 명확히 규정하고, 그 역할과 책임에 충실하려면 어디까지 서비스를 해야 하는지, 그 서비스에 소요되는 재원은 어떻게 할 것인지, 세 가지가 상호 연결돼서 명확히 법률로 구현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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