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 경성] 논밭 팔아 東京 공연까지 보러다닌 음악狂 김영랑

김기철 학술전문기자 2022. 5. 21.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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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라이브러리속의 모던 경성]성악으로 유학 꿈꿔..판소리·거문고·북 연주실력도 수준급
강진의 영랑 사랑채 방 하나는 레코드로 가득차있었다. 베토벤, 슈베르트, 모차르트 음반과 판소리, 거문고, 가야금 음반이 쌓여있었다고 한다. 영랑은 1923년 귀국 후 해방 때까지 고향 강진에서 유성기로 음악을 들으며 소일했다. /일러스트 이철원

영랑(永郞) 김윤식(1903~1950)이 성악가가 됐으면 ‘모란이 피기까지는’같은 절창(絶唱)을 불렀을까. 1921년 여름 도쿄 아오야마(靑山)학원 중학부에 유학하던 영랑이 방학을 맞아 귀국했다. 아버지께 도쿄음악학교에서 성악을 공부하고 싶다고 했다. 성악가를 딴따라 취급하던 아버지는 결사반대했다.학비를 끊겠다고도 했다. 영랑은 하는 수 없이 성악가의 꿈을 접고 아오야마학원 영문과에 진학했다.

◇우에노 음악당 단골 손님

전남 강진의 지주 집안 맏아들로 태어난 영랑은 어려서 바이올린을 배웠고 음악을 좋아했다. 김학동이 정리한 영랑 연보에 따르면, 일본 유학 시절 자주 우에노 음악당 연주회를 다녔다. ‘1920년 10월 우에노 음악당 주최 슈베르트 바이올린 독주회를 감상하고 돌아오자 하숙집 주인이 영랑이 3·1운동 만세사건에 가담한 사실을 알고 나가라고 하여...’ ‘1921년 4월 새학기가 시작되어 영랑과 용아(박용철)는 학업에 열중하면서 틈틈이 음악회와 영화관에 함께 다니기도 했다.’ ‘1922년 어느 겨울날 밤, 영랑, 용아, 형식 등과 우에노 음악당 주최로 열린 베토벤 연주회 감상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정지용과 채동선을 극적으로 만나게 된다’…(‘돌담에 소색이는 햇발같이’ 313~314쪽)

우에노 음악당은 1890년 건립된 옛 도쿄음악학교 주악당(奏樂堂)으로 보인다. 우에노 공원 근처에 지금도 남아있을 뿐 아니라 가끔 콘서트도 열린다. 영랑의 유학은 1923년 9월 관동대지진이 일어나 귀국하면서 중단됐다.

김영랑은 클래식과 국악을 사랑한 음악 마니아였다. 베토벤과 슈베르트를 좋아했고, 바이올린을 연주했다. 판소리와 북, 거문고 연주 실력도 수준급이었다.

◇미야 엘만 공연보러 上京

유학에서 돌아온 영랑은 해방을 맞을 때까지 대부분 고향 강진에서 보냈다. 하지만 경성에서 볼 만한 음악회가 열린다는 소식이 들리면 만사 제쳐놓고 상경했다. 아들 김현철은 ‘경성에서 러시아의 세계적인 베이스 가수 표도르 샬리아핀, 바이올리니스트 미샤 엘만 등의 공연이 있을 때는 물론이고, 도쿄에 세계적인 교향악단이 오거나 20세기 최고의 테너 가수 엔리코 카루소가 왔을 때에도 영랑은 어김없이 논밭을 팔아서까지 배편으로 다녀오곤 했다’(‘아버지 그립고야’44쪽)고 회고했다.

영랑이 카루소 공연을 보러 일본까지 갔다는 증언은 좀 따져볼 필요가 있다. ‘세기의 테너’ 카루소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극장을 무대로 활약하다 1920년12월 무대에서 쓰러져 이듬해 숨졌기 때문이다. 영랑이 공연보러 다닐 만한 나이에, 카루소가 일본 투어공연을 했는지 조차 불확실하다. 러시아의 전설적 베이스 샬리아핀 경성 공연도 성사되지 않았다. 샬리아핀이 도쿄나 하얼빈에서 리사이틀을 한 사실은 있지만, 경성 공연은 추진하다 실패했기 때문이다. 일제시대 음악 공연 기획을 주도하던 피아니스트 김영환이 남긴 증언이다. (‘한국양악백년사’ 131쪽)

미샤 엘만은 1937년 2월23일 경성 부민관에서 독주회를 열었다. 조선일보 출판기자 함대훈은 ‘조광’ 1937년4월호에 ‘세계적 제금가 미샤 엘만 회견기’를 쓰기도 했다. 아무튼 친구들은 영랑이 경성에 나타나면 이번엔 무슨 음악회가 열리느냐고 물을 정도였다고 한다. 근대적 ‘취향의 시대’, ‘개성의 시대’의 선구자였던 셈이다.

◇사랑채에 레코드 앨범이 산더미처럼 쌓여

영랑은 평생 음악속에서 살았다. 바이올린, 거문고, 가야금 연주를 즐겼고, 유성기로 음악 듣는 게 낙이었다. 영랑 생가 사랑채의 방엔 레코드 앨범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다시 아들 회고다. ‘영랑은 종종 어린 자식을 네 살 무렵부터 초등학교 입학 전까지 무릎 위에 앉히고 베토벤, 브람스 등 서양 고전음악을 비롯해, 거문고와 가야금 산조, 춘향전, 흥부전, 토끼전, 적벽가, 쑥대머리 등 국악을 함께 감상했다.’

당시 SP판은 한쪽면에 5분도 수록할 수없으니, 앞 뒤 다해도 최대 10분이었다. 1시간 넘는 베토벤 합창 교향곡 하나를 들으려면 7장짜리 음반 세트가 필요한 시대였다. 방 하나를 음반으로 가득 채워도 부족했을 것이다.

◇판소리와 거문고, 북 연주 실력도 전문가 뺨치는 수준

영랑이 부르는 남도 판소리는 당시 명창들도 놀랄 수준이었다고 한다. 당대 명창 임방울, 박초월, 이화중선, 임춘행, 김소희, 박귀희 등이 영랑 초청으로 강진 생가를 찾아 영랑의 북 장단에 맞춰 소리를 했다. 영랑의 북 실력을 믿고 고수를 데려오지 않았을 정도였다.

◇3·1운동으로 옥고치르고 도일

영랑은 강진 보통학교를 거쳐 1917년 휘문의숙에 진학했다. 홍사용, 박종화, 정지용, 이태준이 선후배로 다니고 있었고, 화가 이승만이 동기였다. 3·1운동 때 고향 강진에서 시위를 계획하다 붙잡혀 대구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일본 유학은 1920년 휘문을 졸업하지 못한 채 떠난 것이다.

영랑의 문단 데뷔는 1930년 친구 박용철과 함께 만든 ‘시문학’을 통해서였다. 순수시 운동을 내걸고 정지용 변영로 정인보 이하윤 등이 참여한 동인지였다. 영랑은 ‘시문학’창간호에 ‘오ㅡ매 단풍 들것네’, 2호에 ‘돌담에 소색이는 햇발’을 잇달아 실었다. ‘모란이 피기까지는’은 1934년4월 박용철이 주재한 ‘문학’3호에 실렸다.

1935년 11월 첫 시집인 ‘영랑시집’을 냈다. 당시 조선일보 학예부 기자였던 이원조가 리뷰를 썼다. 일본 호세이대학에서 불문학을 전공한 이원조는 날카로운 문학비평으로 이름을 날린 문학평론가이기도 했다. ‘이 시집을 대하면 무슨 고혹적인 황홀감이나 침을 흘릴만한 식욕을 자아내는 것이 아니라 다만 이 작자의 보드라운 호흡과 어여쁜 손가락을 상상하는 기쁨을 맛볼 수 있는 것이다.’(‘영랑시집’, 조선일보 1936년5월14일자)

◇일제 말 절필, 창씨개명 거부

영랑은 첫 시집 출간 후 3년 여 침묵하다 1938년 9월 ‘조광’에 수필 ‘감나무에 단풍드는 전남의 9월’을 실었다. 조선일보에도 수필 ‘두견과 종다리’(1939년5월20일~21일) ‘남방춘신’1~4(1940년 2월23일~24일, 27일~28일)를 썼다. 시는 ‘조광’’여성’에 주로 발표했다. 1939년 ‘조광’ 신년호에 쓴 ‘거문고’ ‘가야금’을 비롯, 그해 12월호에 실은 ‘묘비명’ 등이 대표적이다.

영랑은 1940년 9월 시 ‘춘향’을 발표한 뒤, 1946년12월까지 절필했다. 신사참배도, 창씨개명도 거부했다. 그의 자존심과 의기는 높이 평가할 만하다. 임종국의 ‘친일문학론’에서 친일 문장을 한 줄도 발견하지 못한 시인 중 한 사람이 김영량이라고 했을 정도다. 영랑에겐 불이익은 좀 감수하더라도 그 정도는 지킬 수 있는 능력이 있었을 것이다. 오백석 지기 지주였던 영랑은 마당에서 모란을 가꾸고, 정구장을 만들고, 갯벌과 언덕을 산책하면서 보낼 만한 여유가 있었다.

◇詩仙 이백만큼 사랑한 베토벤, 모차르트

일제 말기, 고향에 칩거한 영랑에게 음악은 탈출구였다. 영랑의 수필 ‘남방춘신’2(南方春信·조선일보 1940년 2월24일)엔 이런 대목이 나온다. ‘몇세기에 한 사람 적선(謫仙·선계에서 쫓겨온 선인)이 난다 하더라도 사람에게 큰 자랑이 아닐까.‘뻬—도밴’ ‘모찰트’ ‘슈벨트’ ‘쇼팡’이 났다는 것은 사람의 큰 자랑일 밖에 없다.’ 적선은 보통 당나라 시인 이백을 가리킨다. 영랑은 베토벤, 모차르트, 슈베르트, 쇼팽을 시선(詩仙) 이백에 견줄 만큼, 사랑했다.

◇공보처 출판국장이 처음이자 마지막 직업

영랑은 해방 후 대한독립촉성국민회 강진군 선전부장과 청년단장을 맡았다. 1948년 5·10총선에 출마했다가 낙선했다. 정부 수립 후 가족을 이끌고 고향을 떠나 서울에 올라왔다. 10월 여순 사건 현장 답사단에 참가해 시 ‘새벽의 처형장’을 썼다.

영랑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유일하게 가진 직업은 1949년 8월 취임한 공보처 출판국장이었다. 그것도 이듬해 4월에 관뒀다. 6·25가 터지자 피난 가지 못한 채 서울에서 은신했다. 9·28 수복 공방전 와중에 날아온 포탄 파편에 복부를 맞아 9월29일 숨졌다. 베토벤과 모차르트를 사랑한 영랑은 모란이 뚝뚝 지듯, 별안간 우리 곁을 떠났다. 영랑은 3.1운동에 참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2018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

◇참고자료

김현철, 아버지 그립고야, 동아일보, 2010

이헌구, ‘김영랑평전:멋에 철한 시인’, 자유문학, 1956

김학동, ‘김영랑 전집·평전: 돌담에 소색이는 햇발같이’, 2012, 새문사

조영복, 김영랑과 강진, 어두운 시대의 빛과 꽃, 민음사,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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