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주말]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인류를 구원할 단 하나의 작물

이용재 음식평론가 2022. 5. 21.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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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재의 필름위의 만찬] 영화 '마션'과 감자
영화 ‘마션'의 주인공 마크 와트니(맷 데이먼)와 그가 직접 재배한 감자. /20th Century Studios

아이고, 다행이다. 보고 또 보면 감동이 희석되는 영화도 있지만 ‘마션(2015)’은 드문 예외다. 화성에 약 560일가량 고립된 마크 와트니(맷 데이먼)가 드디어 구조될 때, 나는 주먹을 불끈 쥐고 환호를 내지른다. 해냈어! 그가 더 이상 감자만 먹지 않아도 된다고! 2035년, 미국의 화성 탐사팀 아레스-3는 갑작스레 불어닥친 모래 폭풍에 임무를 중단하고 귀환길에 나선다. 하지만 마크 와트니는 설비의 잔해에 맞는 바람에 생체 모니터가 고장 나고, 죽은 것으로 판단돼 화성에 남겨진다.

유일한 구조 가능성인 다음 탐사팀 아레스-4가 화성에 도착할 때까지 4년을 버텨야 하는 상황. 그는 식물학자로서 전공을 살려 감자 재배에 성공한다. 하지만 살아남기 위해 감자만, 그것도 아껴서 죽지 않을 만큼만 먹어야 한다니. 게다가 그 감자가 자신의 대변으로 경작한 것이라면? 농담이 아니고 개봉 당시 ‘마션’을 본 뒤 나는 한참 동안 악몽에 시달렸다. 마크 와트니가 아닌 내가 지구에서 5천 4백 6십만 킬로미터 떨어진 화성에 외따로 떨어져 인분 감자를 먹으며 버티는 악몽이었다. 절대적인 고독감과 감자만 먹어야 하는 지겨움, 과연 어느 쪽이 더 치명적일까?

그렇다고 감자를 폄하하는 건 아니다. 비록 허구이지만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인간을 살려줄 유일한 작물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감자다. 화성에서조차 재배를 시험해 볼 만큼 척박한 환경에서 잘 버티며, 다른 식물에 비해 2~4배 빨리 자란다. 1532년 처음 원산지인 안데스 산지에서 건너갔을 때는 ‘노예가 먹는 비천한 음식’이라며 무시당했지만, 결국 아일랜드를 비롯한 유럽 대륙 전반에서 구황작물로 많은 이의 목숨을 구하기도 했다. 게다가 근 삼십년 전인 1995년, 컬럼비아호를 통해 우주 재배 실험에 성공했으니 자격은 다 갖춘 셈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감자를 잘 먹고 있는 걸까? 당장 화성에 고립돼 살아남기 위해 먹어야만 하는 상황이 아니라고 가정한다면 답은 ‘글쎄올시다’이다. 일단 너무 흔한 나머지 당연하게 여기는 경향이 강한 가운데 선택의 폭이 너무 좁다. 사실 감자는 전분 함유량에 따라서 맛과 질감이 매우 다양하게 갈리지만 우리는 그걸 잘 모르고 제대로 누리지도 못하고 있다. 전분 함유량이 높은 감자를 전분가루가 날린다고 해서 분질(粉質), 낮은 감자를 점질(粘質)이라 분류한다. 조리를 위해 썰어보면 분질에 칼이 훨씬 더 폭신폭신 잘 들어간다. 그만큼 조리를 하면 잘 뭉개진다.

국산 감자의 80퍼센트를 차지하는 수미는 분질과 점질의 중간이라 하지만 막상 조리해보면 꽤 잘 부스러진다. 따라서 조림이나 튀김 등 본격적인 요리보다 삶아 먹는 데 잘 어울린다. 나머지 20퍼센트를 차지하는 감자들 가운데서도 본격적인 점질 품종은 찾아보기가 쉽지 않아 아쉽다. 가끔 큰 규모의 마트에서는 조림에 잘 부스러지지 않음을 내세우는 감자를 찾아볼 수 있는데, 막상 익혀 보면 점질 특유의 매끄러움은 잘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희망이 없지는 않으니 감자 요리의 꽃이라 할 수 있는 튀김이 있다. 상식적으로 날것의 식재료가 냉동식품보다 더 나을 것 같지만 감자튀김의 세계는 다르다. 튀김에 어울리는 품종을 엄선해 균일하게 썬 데다가 표면에 보이지 않는 감자 전분의 막을 입혀 질감을 보완한 제품도 있다. 여기에 에어프라이어가 대중화된 우리의 부엌 현실까지 감안한다면 튀김만큼은 냉동식품을 권한다.

지구로 무사 귀환한 와트니는 다시 감자를 먹었을까? 나라면 쳐다도 보지 않을 것 같지만 감자를 향한 애정을 회복하는 데 좋은 요리는 권해줄 수 있다. 바로 2018년 세상을 떠난 거물 프랑스 셰프 조엘 로뷔숑의 으깬 감자다. 감자와 버터를 1대1로 섞은 그의 으깬 감자는 세계에서 가장 맛있는 감자 요리로 꼽히곤 했다. 그걸로도 안 된다면 말기름으로 튀긴 프렌치프라이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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